베리타스

[설교]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Dec 21, 2020 08:56 AM KST

- 이사야 9:2-7, 요한1서 1:1-4, 마태복음 2: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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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코로나 속에서 처음 맞이하는 올해 성탄절에 산타는 내년 1월 9일이 돼야 온다고 합니다. 올해 12월 25일 새벽에 도착한 후 2주를 격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혹 이번 성탄절에 아이들에게 줄 선물 준비를 잊으셨더라도 이 핑계를 대고 다시 준비하시면 되겠습니다.

터키의 안탈리아 지역에는 미라(Myra)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성 니콜라스 교회가 있는 마을입니다. 산타클로스의 기원이 된다고 알려진 성 니콜라스는 3세기경 동로마제국 뎀레(Demre)교회의 주교였습니다. 부모님께 상속을 많이 받았지만 그 재산을 다 이웃에게 나눠주고 평생 소외된 사람을 도우며 살았습니다. 지금도 전해지는 그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자신의 선행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성 니콜라스는 어느 가난한 집의 굴뚝으로 동전 주머니를 던졌는데 우연히 그 주머니가 말리려고 굴뚝에 걸어두었던 양말 속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것이 성탄 선물을 양말에 넣어두는 관례의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성 니콜라스의 무덤 위에 교회가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의 마당에는 어린아이들에게 둘러싸인 행복한 얼굴의 성 니콜라스 동상이 서 있습니다. 앞으로 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때, 꼭 한 번 터키의 미라에 들러 이 '원조 산타'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성탄절은 산타가 아니라 메시아가 오시는 날입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우리에게 밝은 빛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린다는 것은 구원의 빛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빛을 기다린다는 것은 지금 여기가 구원의 현실이 아님을 직시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어둠 속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둠의 고통이 큰 만큼 빛을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해지고, 생명의 빛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만나는 기쁨은 그 기다림의 크기만큼 커질 것입니다.

오래전 오늘 우리처럼 구원의 빛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동방박사들입니다. 성서에서 마태복음만이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동방'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당시 동방으로 지칭한 곳은 별자리에 관한 연구가 활발했던 페르시아(바빌론) 지역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별을 보고 메시아가 탄생한 곳을 찾아온 박사들(마고이: 마고스의 복수형)은 일반적으로 천체의 운행을 살피는 점성학자들이었습니다. 현자(賢者)로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이후에 멜콘(Melkon), 발타자르(Balthasar), 그리고 개스퍼(Gasper)로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던 당시 유대인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도 동방으로부터 어떤 지배자가 나타나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구약성서에서는 "동쪽 산"(민수기 23:7)에서 온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에 축복을 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올 것이다. 한 통치 지팡이가 이스라엘에서 일어설 것이다"(민수기 24:7)라는 신탁(神託)을 전합니다. 이 신탁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백성이 앗시리아와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가 근동 각지에 흩어졌을 때 이 이야기가 전해졌을 겁니다. 동방의 박사들도 수백 년 전의 이 예언을 그렇게 전해 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별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고 그들은 마침내 메시아 탄생의 예언을 확인하러 먼 순례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받은 헤롯은 긴장했습니다. 로마를 등에 업고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받은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말하는 동방박사들 때문에 심기가 매우 불편했습니다. 헤롯은 교활한 통치자였습니다. 교활할 뿐만 아니라 잔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두 아들마저 처형한, 피도 눈물도 없는 폭군이 헤롯입니다. 그래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헤롯의 아들(휘오스)이 되느니 헤롯의 돼지(휘스)가 되는 게 낫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방문에 당황한 헤롯은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분명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찾았는데, 헤롯은 '그리스도'로 바꾸어 물은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자리에서 밀려날까 두려움에 떨던 헤롯은 급기야 먼 옛날 이집트의 파라오가 모세가 탄생할 때 히브리 남자 아기들을 다 죽이라고 명했던 것처럼,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마태 2:16)라 명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유대인의 왕'인지를 구약성서의 미가 5장 2절을 인용하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태 2:6). 이 구절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마태는 분명 구약성서의 미가 5장 2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마태의 본문은 구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이나 또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표준이 된 <맛소라> 본문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미가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미가 5:2)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스리다'라는 말을 <70인역>은 '아르콘타'(αρχοντα)를 썼는데, 마태는 그 용어를 '헤구메누스'(ηγουμενος)로 바꿉니다. '아르콘타'나 '헤구메노스' 모두 통치자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아르콘타'는 동사로 '다스리다'라는 의미를 갖지만, '헤구메노스'는 동사로('헤게오마이') '인도하다'라는 뜻을 갖습니다. 둘의 차이는 큽니다. 마태는 헤롯의 통치과 메시아 통치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단어를 선택한 것입니다.

마태는 지금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 헤롯이 아니라 본문의 뒤따르는 말처럼 양을 치는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말합니다.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리는' 헤롯과 같은 거짓 왕이 아니라 여호와의 양 떼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한 길로 '인도하는' 목자(시편 79:13, 95:7, 110:3; 이사야 40:10)와 같은 선한 왕이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군림하고 굴종시키는 통치자가 아니라 섬김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선한 목자라는 선언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한 10:11)라고 주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목자는 양 떼를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고, 위험으로부터 지키며,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립니다. 그런 왕이, 그런 새 왕이, 목자와 같은 선한 통치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이 전하고 있는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에서 한 왕권이 일어나 인류의 보편적인 희망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는 이야기로 읽혀야 합니다. '유대인의 왕,' '한 다스리는 자,' 그리고 '이스라엘의 목자'는 하나님의 약속(예언)이 성취된 메시아이며 인류의 구세주입니다. 이 세상의 절대적 권력자인 로마 황제의 다스림이 아니라 절대적 사랑이고 참 생명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선포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누가 2:10)이 바로 성탄절의 신비인 것입니다. 2,500년 전 중국의 노자는 "산에서 흐르는 시냇물이 강물이 되어 바다로 끊임없이 흐르는 이유는 바다가 강물의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바다는 모든 강물을 지배하고 있으며, 모든 강물은 언제나 바다에 모이게 되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성탄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된 사건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요한 1:14) 이 사건은 하늘 높은 곳으로부터 자신을 낮추고 비우시며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셔서 우리를 섬기신 (빌립보서 2장) '고난의 종'의 탄생을 알리는 복된 소식이었습니다.

성탄의 신비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 이사야 9장 1-7절은 '메시아 예언'이라 불리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이사야 9:2). 이사야는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올 것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칠 것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통치자가 와서 백성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을 것이라 약속합니다. 아, 얼마나 기다리던 은총의 날입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을 절망과 어둠 속에서 구원해줄 메시아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오실 때 얼마나 찬란한 능력과 영광의 광채를 발하실까요?

하지만 놀랍게도 메시아는 전혀 뜻밖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분은 '한 아기'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이다"(이사야 9:6, 개역개정과 새번역 혼용). 평화의 왕이신 메시아는 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황금 용포(龍袍)에 싸여 요람에 누운 황태자가 아니라, 누추한 포대기에 싸여 구유(말이나 소에게 먹이를 담아주는 그릇, manger) 위에 누워 있는 아기로 오셨습니다. 아기라니요? 온갖 영웅들을 다 소환해도 감당할 수 없는 구원의 역사를 위해 겨우 한 아기가 왔다는 말입니까?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제 한 몸조차 스스로 가눌 수 없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왔다는 말인가요?

그러나 바로 이 아기가 성탄의 은총입니다. 우리의 구세주는 어머니의 사랑과 돌봄이 필요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감싸주고, 보듬어 안아주고, 사랑해야 할 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의 손에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인간 어머니의 손길과 돌봄에 생명을 맡기셨습니다. 구원은 그저 주저앉아서 받는 구호품과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황제의 하사품과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방적인 수혜자나 시키는 대로 하는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고 사랑하며 나누는 참사람으로 일으켜 세웁니다. 아마도 아기 예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를 향해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은 잘 해낼 거예요. 당신에게 나를 온전히 맡깁니다.'

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격려입니다. 많은 말 중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말은 격려의 말입니다. 그래서 격려의 말은 예술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아무나 작가나 화가가 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격려의 예술가는 될 수 있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멋진 칭찬을 들으면 그것만 먹어도 두 달은 살 수 있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은 음식을 못 먹어서 배고픈 게 아니라 격려와 칭찬과 긍정과 희망의 말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격려는 기적을 낳습니다. 지쳐버린 영혼을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성탄은 격려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격려입니다.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 어머니의 돌봄과 사랑에 온전히 내어맡긴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은 잘 해낼 거예요!' 주님은 우리에게 힘을 내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용기를 잃지 말라고, 세상 끝까지 반드시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아기로 오신 메시아 탄생의 신비이고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우리의 고난에 참여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 사건이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아픔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연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2020년 성탄절에 다시 오시는 예수께서는 서광선 목사님의 말처럼 마스크를 쓰고 오실 겁니다. 우리 대학교회 전직 담임목사이신 서광선 목사님은 코로나로 외출을 하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서 어느새 시인이 다 되신 것 같습니다. 그가 쓴 <마스크의 예수>를 읽어봅니다.

"누구신가 했더니 / 예수님 아니신가요? // 풍채는 건장하신 청년 같으신데 /건강 그 자체로 보이시는데 / 왜 마스크를 쓰셨나요? /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보다 / 더 높으신 분이 / 웬 마스크를 쓰셨나요? // 하나님의 아들인데, / 코로나보다 힘이 세고 / 마스크가 필요 없다는 트럼프보다 / 더 힘 있는 분인 줄 / 알고 믿고 있었는데... // 웬일로 나 같은 늙은이나 쓰는 마스크를 쓰셨나요? // 동네 경찰이 무서워서요? / 마스크 안 썼다고 10만 원 벌금, / 낼 돈이 없으셔서요? // 아니 코로나에 걸리실까 봐요? / 하나님의 아들이? / 유대인의 메시아가? / 온 인류의 구세주가? /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 코로나가 무서우신가요?// '내가 코로나를 쫓아내려고 / 이 세상에 왔다 / 모두 회개하고 /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 그리고 마스크 같은 것 / 벗어 던지고 / 교회로 모여라!!! /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여라.' / 그러실 줄 알았는데... // 예수님도 나처럼 / 마스크를 쓰셨네. // 예수님도 힘이 없으신가 봐... // 우리가 기다리던 예수님, / 우리처럼 마스크 쓰시고 오셨네!!!"

예수께서 코로나가 뭐가 두려우시겠습니까.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서 트럼프가 두려우시겠습니까, 벌금 10만 원이 두려우시겠습니까? 우리의 고난에 참여하시는 메시아께서는 지난 1년 내내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성탄절이 되어도 예배당에 모이지 못하고, 거리두기 3단계라도 발동하면 이 추운 겨울에 더 이상 먹고살 수가 없게 된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을 한없이 연민하시고 아파하시며 그 아픔에 동참하시려고 그렇게 우리처럼 마스크를 쓰고 오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이 답답함의 짐을 나눠지시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오시지 않겠습니까? 성탄은 하늘 높은 보좌를 버리고 오늘 우리의 고통과 아픔 속으로 들어오시는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를 믿고 격려하시며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가 탄생한 사건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천사로부터 메시아 탄생의 큰 기쁨의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이 목자들이었습니다(누가복음 2:8-20). 그들은 오랜 시간 집을 떠나 거친 광야에서 지내야 했고, 벌이도 적어 살림이 매우 궁핍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목자들과 결혼을 하려는 여자가 드물었다고 합니다. 목자들은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밤에도 잠들지 못하고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밤에도 쉬지도 못하고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께서 탄생한 기쁜 소식이 가장 먼저 전해졌습니다. 오늘날에도 밖에 나가서 고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시간을 일하면서도 벌이가 시원찮아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이 추위 속에서 내복을 두 겹씩 입고 검진소를 지키는 분들이 있습니다. 메시아는 오늘도 그 누구보다 이들에게 먼저 찾아오실 것입니다. 베들레헴 들판의 목자들처럼 어둠 속에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게 성탄의 기쁜 소식이 가장 먼저 들려올 것입니다.

오늘의 공동기도문을 다시 읽어봅니다.

"지금쯤 / 가난한 마을 외딴 주막 /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가 외롭게 태어나셨겠지요. / 온 인류를 위해 오시는 그리스도가 / 왜 그런 곳에서 / 호화 주택이 아닌 누추한 곳에서 태어나셨는가를, / 우둔한 자 마음의 눈을 열어주십시오. // 지금쯤 / 베들레헴 차가운 한 들 밖에서 / 밤을 허비며 서성이다가 아픔을 겪다가 / 홀연히 비쳐오는 한 줄기 빛을 / 목자들은 보았겠지요. / 하늘 영광의 노래를 들었겠지요. / 마음이 고단하고 슬프고 답답한 자 / 저 목자들처럼, 삶의 귀한 경험에 부닥칠 수 있도록 / 마음을 가라앉혀 기다리게 해주십시오. // 지금쯤 / 밤하늘을 보고 별들을 보고 / 땅의 운명을 좇던 동방의 박사는 / 이상한 별을 보자 뭔가를 깨쳤겠지요. / 하여, 새 슬기를 찾아서 / 온갖 미련을 버리고, 천신만고의 먼 / 나그네길을 훌훌 떠나겠지요. // 아, 오늘의 괴로운 상황에서 / 참 기쁨을 찾고자 하는 자 / 우리가 정녕 빈 손 들고 나아갈 길목에서 / 결연히 떠나는 결단을 / 하게 해주십시오. // 이 깊은 밤 하얀 눈이 소리 없이 / 내리어 미운 땅 위에 소복이 쌓이듯 / 그런 은혜를, 은혜를 내려 / 주십시오." (박화목, <크리스마스 심야의 기도>)

경애하는 이화 대학교회의 교우 여러분, 코로나로 모두 흩어져 예배하는 올해 2020년 성탄절은 바로 이 하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지치고 힘든 우리의 영혼 위에 그리고 이 세계 위에 이 놀라운 은총이 함박눈처럼 포근히 내리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은혜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께서 여러분과 세상 끝까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2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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