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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라는 말에 왜 기독교인들은 불안과 공포와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가?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전직 지질학자

입력 Jan 20, 2021 08:58 A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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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사제관 앞 기도처에 서 있는 고난 받는 예수상.

성서는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 예수와 성서 저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같은 생각을 상상조차도 못했다. 식물이나 동물 및 인간의 생명에 대한 고대의 지식이란 원시적 수준에 불과했다. 오늘날 물리학, 특히 극미의 세계인 소립자 물리학, 천문학, 우주 이론 등에 대한 상식적인 사실들에 대해서 창세기 저자는 말할 것도 없고, 신약성서 저자들의 눈에도 그야말로 믿기 어려운 사실들이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의 경험은 경험자 자신에 의해 해석되는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그림도 자신의 이해의 틀 속에서 그려진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체 삼층천을 상상했고, 상층에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를 설정했다. 이것이 고대에 유신론적 종교들이 탄생하게된 동기이다. 신과 경전과 종교와 세계는 인간의 창작품이며, 인간의 의식이 발달하면서 수없이 수정되고 변형되고, 더 이상 쓸모없는 부분들은 폐기처분되었다.

삼층 세계관이 주류 사회를 지배하던 고대에 인격신론의 유신론은 도시 국가나 로마 제국의 신성한 의무로 여겨지는 기본적인 믿음이였다. 역사적으로 국가가 숭배하는 신(들)을 믿지 않는 시민은 중죄로서 무신론자로 고발되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인들도 역시 로마의 종교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로 취급되어 심한 박해를 받았다. 당시에 무신론의 의미는, 권력을 장악한 종교체제가 자신의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단순히 이교도나 무신앙자로 규정했으며, 반대편들을 제거하는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했다. 예수 당시에 하늘 위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철저히 신봉했던 유대교인들에게도 무신론에 대한 개념은 자신들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이방인, 이단, 무신론자로 정죄했다. 고대 유신론적 세계관의 사회에서 무신론에 대한 박해는 부족적인 생존의 두려움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종교적 안전장치였다. 따라서 고금을 막론하고 유신론적 종교에 심하게 세뇌된 사람들은 신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착각하고, 신을 믿지 않으면 징벌과 불행이 따른다는 미신적인 사고의 노예가 되었다. 따라서 무신론에 대해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감추지 못하며 때로 폭력적인 분노를 드러낸다.

지난 수세기 동안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 운동으로 사람들의 이성과 지성이 급속도로 성숙해지면서 삼층 세계관의 유신론적 신학과 믿음은 더 이상 설득력과 신뢰를 잃고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래서 신(神)은 죽었다. 오늘날 무신론적 우주진화 세계관의 주류 사회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 참 사람 예수의 인간성이 절실히 필요하며, 예수의 신성(神聖)은 차별주의와 우월주의를 조장하고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분단시키는 위험한 장애물이라고 인식한다.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는 완전히 끝이 났다. 또한 예수의 신성이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을 통제하던 시대도 끝났다. 21세기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은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의 시대에 들어섰다. 이 시대의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은 1세기에 참 사람 예수에게서 탄생했다. 성서문자근본주의자들은 역사적 예수의 정신과 그의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을 무신론이라고 비판하지만, 우리는 기독교 후기 시대 즉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다.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의 시대는 유신론적 하느님을 맹신하던 시대의 종말을 가리킨다. 새로운 시대는 잃어버린 참 사람 예수 즉 유신론적 하느님을 철저하게 반대한 무신론자 예수를 되찾아 그의 정신을 탐구하고 살아내는 시대이다.

예수는 믿어야 하는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신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었다. 예수는 하느님도 아니고, 하느님이 될 필요도 없다. 예수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을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제도적이고 관념적인 종교와 믿음체계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을 심어주었다. 예수는 유신론적 하느님의 믿음체계와 이분법적이고 내세적인 종교의 상징인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도전했다. 그러나 예수가 죽은 후 참 인간 예수와 그가 가장 중요하게 가르쳤던 참된 인간성은 사라져 버리고, 예수는 그가 철저히 반대했던 유신론적 하느님으로 변신되었다.

오늘날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하느님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죽었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과정과 예술과 문학과 철학에서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초자연적인 신을 믿어야 한다는 말을 들을 수 없다. 고대인들이 만든 유신론자 예수, 유신론적 하느님 예수, 초자연적인 예수, 이분법적인 예수, 금관을 쓰고 성상의 자리에 앉힌 예수는 더 이상 인류의 밝은 미래에 장애물이 될 뿐이며 대단히 위험하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예수 세미나 학회(www.westarinstitute.org)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참 사람 예수, 유신론적 하느님을 철저히 반대했던 무신론자 예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비전의 예수가 무엇을 가르쳤고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탐구하며, 죽어가는 교회기독교에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을 고취시키고 있다. 한국 교회에도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신학자들과 목회현장에서 예배와 교육에서 참 사람 예수를 살아내는 목회자들이 있다.

유신론적 하느님 예수가 세계를 정복하여 기독교화했던 낡은 시대는 이제 끝이 났다. 기독교인들은 참 사람 예수, 역사적 예수의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을 탐구하고 살아내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참 사람 예수를 성서문자적-교리적-유신론적-내세적 감옥에 감금시켰다. 이제 종교를 넘어서 이분법적인 유신론을 철저히 반대한 역사적 예수를 해방시켜야 한다. 교회가 만든 유신론자 예수는 믿음체계의 한정된 영역 안에서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오직 부족적인 생존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려고 만들어낸 가짜 예수이다. 갈릴리의 현자, 참 사람 예수, 제도적인 종교와 교리와 믿음을 거부한 역사적 예수를 재발견하는 것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절실히 필요하다. 오늘 기독교인들에게 성서나 교리적 믿음보다 예수의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이 삶의 가치관과 윤리관이 되어야 한다.

역사적 예수는 사회개혁가로서 세속적인 현자였다. 원초적으로 신약성서의 기적 이야기들은 예수의 신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인간성이 종교 넘어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함을 밝힌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제도적 종교와 믿음체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예수는 유신론적 종교의 형식적이고 관념적인 보상심리의 믿음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했으며 오히려 그것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심하게 질책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는 공정한 분배의 정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이 땅 위에 건설해야 한다는 비전을 세속적-비종교적-무신론적으로 가르쳤다. 따라서 유신론적 종교체계는 예수를 신앙과 믿음이 없는 무신론자 이단으로 정죄하고 처형했다.

예수는 신앙과 믿음의 객체적 대상이 아니다. 예수는 우상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에 대해서 믿기 보다, 예수가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고 몸소 살아내었던 그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수가 선포한 참된 인간성이 하느님과 종교와 믿음 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제도적인 종교의 믿음체계가 예수를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교회의 권위와 교리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교회가 강요하는 믿음이란, 사심으로 가득한 보상심리의 표층적이고 상업적인 행위이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이기적인 욕심과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주면서 인간의 존엄성인 자율성과 창조성과 잠재력과 가능성을 무참하게 박탈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는 겸손하고 평범한 갈릴리의 현자였다. 예수는 믿어야만 하는 유신론적 교리를 만들지 않았으며 가르치지도 않았다. 예수는 거룩한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치기 보다는 냄새나는 장터와 바닷가에서 그리고 자연의 들판과 산 위에서 오직 새로운 의식과 참된 인간성에 대해 가르쳤다. 무엇보다 예수는 그의 생애 동안에 사회와 종교에서 버림받은 하층계급의 사람들, 죄인들, 세금징수원들, 창녀들, 문둥병자들, 여인들, 어린이들,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받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식탁에 둘러 앉아 웃고 울고 먹고 마셨다. 유신론적 종교가 무시하고 추방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정면으로 대하고, 대화를 나누고, 접촉하고, 먹고 마시는 것은 부족적 종교의 경계와 부족적 생존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 버리는 혁명적이며 무신론적인 행동이었다. 이것은 유신론적인 제도적 종교에 반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는 무신론자 예수의 정체성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숭상하는 유신론적 하느님 예수는 삼층 세계관에서 만들어진 원시적인 우상이다. 예수는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이 아니라고 가르쳤는데도 불구하고 후대 사람들이 그를 성상(聖上)의 자리에 앉였다. 325년에 콘스탄틴 로마황제가 정치적으로 니케아 신경을 만든 이래 예수는 인격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되었으며, 유신론자들의 믿음의 대상이 되었다. 지난 1700년동안 예수의 신성을 믿는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고 약탈과 탄압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유신론적 하느님 예수는 인류 구원에 실패했을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고통과 절망을 안겨주었다.

오늘 우리가 속해 있는 우주세계는 어디가 하늘 위 상층이고, 어디가 땅 아래 하층이고, 어디가 중간층인지 구분할 수 없다. 성서가 기록될 당시에 고대인들은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와 지옥의 세계로 분리되는 삼층천을 상상했다. 최근에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협력해서 블랙홀을 촬영하는 데에 성공했다. 블랙홀은 더 이상 가설이 아니라, 사실로 판명되었다. 불랙홀이란 우주의 시간과 공간의 경계로써 별들과 은하계와 우주의 시작과 끝을 증명해 주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는 상중하 층이 없다. 빅뱅이라는 원점에서 출현한 우주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개체들 - 은하계, 별, 인간, 생명체, 자연 -은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하나의 생명의 망으로 한 몸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세계는 우연적이고 자연적으로 출현했으며, 일회적이다.

우리의 우주는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으며, 우주와 은하계와 태양계와 별은 언젠가 폭발해서 사라지고 새로운 우주세계가 등장한다. 이 사실은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담론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정설이다. 우리의 세계는 지금 여기가 전부이다. 죽은 후 이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갈 곳이 없다. 내세와 현세로 구분할 수도 없으며,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다. 사실(fact)로 밝혀진 불랙홀이 이 우주의 법칙을 말해주고 있다. 기독교 성서는 불랙홀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유신론적 하느님도 미래를 모른다. 그러나 유신론적 하느님을 거부한 무신론자 예수는 우리에게 불확실성의 우주에서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을 살아내는 참된 인간의 삶에 대한 길을 제시했다.

예수는 기독교의 믿음체계가 만든 그런 유신론적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인간의 삶 속에 새로운 의식과 참된 인간성을 살아내는 것이 유신론적 하느님을 관념적으로 믿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고 가르치고 자신이 몸소 살아내었다. 그래서 예수는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의 여명이 되었다.

예수의 하느님은 하늘 위에서 충성스러운 신자들(유신론자들)과 생존의 두려움에 벌벌떠는 사람들의 기도에 의해 멋대로 조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의 하느님은 무신론적 하느님으로써 인간이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살아내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의 방식이다. 예수는 인간들에게 안전과 부를 조건부적으로 제공하는 하늘 아버지 하느님을 철저히 거부했다. 다시 말해, 예수는 인간들에게 위협과 자비, 징벌과 보상을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으로 내려주고, 인간들이 수동적으로 순종하고 의존하기를 바라는 부족적이고 옹졸한 하느님을 반대했다. 예수는 인간의 존엄성을 폄하하고, 인간의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을 탄압하고 박탈하는 유신론적 하느님은 필요없다고 선언했다.

하늘 위 다른 세계에서 우주의 법칙을 깨트리며 기적을 일으키는 인격신론의 초자연적 하느님은 망상이다. 그런 하느님을 맹신하는 것은 시간과 돈 낭비이며, 그런 믿음은 인류사에서 인간과 생명과 자연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사회악이다. 하느님의 의미는 참 사람 예수-역사적 예수-무신론자 예수-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예수의 인간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신론자 예수의 하느님은 인종과 종교의 부족적 경계 넘어에서 인식할 수 있다. 예수의 하느님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가부장제도 하에서 고통받는 여성들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어린이들의 절망과 슬픔을 나의 고통으로 인식하고, 그들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삶의 방식이다. 오늘 제도적인 종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무신론적 하느님은 가정과 사회에서 실패자와 외로운 사람들과 왕따당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들의 희망과 용기와 힘으로 살아있다. 무신론적 하느님은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와 죽어가는 생태계에서 인류의 희망이 되고 있다.

예수는 부족적 생존의 안전장치로 만들어진 유신론적 하느님을 반대했기 때문에 무신론자 이단으로 낙인찍혀 성전에서 쫓겨나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교회들이 믿는 유신론적 초자연적인 예수는 인류사회의 분단과 혼돈을 가증시킬뿐이다. 인류의 밝은 미래는 참된 인간 무신론자 예수의 정신에 달려있다. 무신론자 예수의 하느님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개체들이 하나의 생명의 망으로 한 몸을 이루는 상호의존관계의 삶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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