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교회에서 쫓겨나 "노숙자가 된 참 사람 예수"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전직 지질학자

입력 Mar 25, 2021 09:55 A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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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pixabay)
▲교회 예배당 모습. 사진은 해당글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참 사람 예수를 찾아볼 수가 없다. 신약성서 누가복음서의 보고에 따르면 참 사람 예수는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신봉하는 종교체제와 이것에 세뇌된 고향사람들로부터 추방되어 심지어 살해될 뻔했다(누가 4:16-30). 또한 그 후에 예수는 고백하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했다(누가 9:57-62). 이렇게 예수는 자신의 교회(유대교 회당)와 고향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는 노숙자가 되었다.

이렇게 예수는 기존의 유신론적 믿음체계와 여기 세뇌된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무신론적 이단자가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원초적으로 기독교는 기존의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이고 내세적인 유신론적 종교체제에 순종하는 신자들에 의해서 탄생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전통적인 제도적 종교에서 추방된 노숙자 예수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정신을 따르는 힘없고 병들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탄생했다.

예수의 목회현장은 거룩한 성전이나 신학교나 부유한 권세가들의 저택이 아니었으며, 98%의 노숙자 민중들이 살고 있는 장터와 들판과 해변가였다. 그러나 괴상하게도 오늘 교회기독교가 열심히 믿고 있는 예수는 그때에 쫓겨난 참 사람 예수가 아니라, 성상의 자리에 앉은 만들어진 하느님 예수이다.

세월이 흘러서 325년에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의 정치적인 야욕에 의해서 참 사람 노숙자 예수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강압적으로 이분법적이고 내세적이고 권력과 부를 선호하는 불평등의 하느님 예수가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1700년 동안 교회는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을 철저히 말살하고, 만들어진 예수를 맹신하고 있다. 예수가 쫓겨난지 2천 년이 지났는데 예수는 여전히 다시 교회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세기에 예수의 고향에서 일어났던 일이 21세기의 교회에서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 솔직해야 한다. 오늘 교회에서 열심히 믿고 있는 예수는 2천 년 전에 생선비릿내가 물신 거리는 바닷가와 쓰레기와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시장터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 먹고 마시던 참 사람 예수가 아니다. 예수는 오늘 교회가 믿고 있는 성전신학과 제국신학에 목숨을 내걸고 종교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저항했다.

따라서 현대 신학자들은 그를 종교개혁가이자 사회개혁가라고 부른다. 당시에 예수는 성전에서 가르치지 않고 세속적인 세상에서 종교체제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의 열악한 삶의 현장에서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살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는 인격신론의 유신론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거부하고, 정반대로 우주적이고 무신론적인 하느님의 의미를 가르쳤다. 그리고 새로운 의미의 하느님을 세상 속에서 힘없는 민중들과 구체적으로 살아내였다.

오늘 교회 안에 만들어진 예수는, 내세적이고 특히 이분법적인 차별주의의 성전종교에서 쫓겨나 세속적인 세상에서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자고 소리높여 외치던 현세적인 역사적 예수가 아니다. 오늘 교회의 예수는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장사꾼 예수, 금관을 쓰고 성상의 자리에 앉은 예수,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 예수, 기독교인들만 구원하는 부족적인 예수, 현대과학에 무지하거나 무시하는 유신론적 예수, 진노하고 징벌을 내리는 재판장 예수이다. 교회의 예수는 해변과 장터와 들판과 산에서 만났던 참 사람 예수가 아니다.

오늘 교회의 예수는 만들어진 예수이며, 이 예수는 인종차별, 종교차별, 성차별, 성적본능차별, 빈부차별, 신분차별 등으로 권력층과 부유층을 우대한다. 만들어진 예수를 믿는 교회에서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면 장로와 집사 자리는 커녕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기 어렵다. 또한 하느님의 축복에는 필수조건이 따르는데, 교회의 권위에 절대적인 복종과 수동적인 맹신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서 헌금을 바치는 액수에 따라서 축복의 등급을 매긴다.

참 사람 예수는 성전종교의 이런 추악한 행태에 대하여 철저히 반대했으며, 결국 종교체제에서 쫓겨나 세속적인 세상에서 목회를 했다. 불행하게도 2천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쫓겨난 참 사람 예수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참 사람 예수를 버리고, 만들어진 예수를 숭상하는 오늘의 교회는 예수를 추방했던 성전으로 전락했으며,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갈매기의 꿈>이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조나단은 보통 갈매기와는 다른 갈매기였다. 대부분의 갈매기는 눈만 뜨면 고작 어선 뒤를 따라다니면서 생선이나 주워먹는 것으로 나날을 보내는데, 조나단은 이것을 당연한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더 높이 더 빨리 더 자유하게 더 아름답게 나는 것, 비상의 신비스런 경지를 탐구하는 데 시간과 정력을 쏟는다.

조나단의 부모들은 아들이 걱정스러워 제발 "다른 갈매기들 같이 되어" 추운 겨울이 닥치기 전에 "과거에 먹던 것"에나 열중할 것이지, "나는 것" 같은 허황한 것에 신경 쓰지 말 것을 권유하고 애원한다. 그러나 높이 자유하게 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신의 실험을 계속한 조나단은 마침내 갈매기들의 한계와 두려움을 넘어서는, 일반 갈매기는 상상할 수 없는 경지를 체험한다. 그리고 이 신나는 돌출(breakthrough) 즉 참다운 삶의 의미와 진정한 자유에 대한 깨달음과 새로운 발전을 자기 부모들과 친구들에게 나누려고 한다.

그러나 기대와는 전혀 달리, 결국 그는 갈매기 사회의 권위와 전통을 파괴하고 당치도 않게 이상한 소리를 하는 못된 갈매기라는 판결을 받고 갈매기 집단에서 추방되고 만다. 그는 한없이 슬펐다. 그 슬픔은 그저 고독하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과 동료들이 이 놀라운 비상의 기쁨을 거절했다는 것, 눈을 뜨고 보기를 거부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갈매기의 꿈> 이야기는 고향에서 쫓겨난 역사적 예수의 이야기이며(누가 4:21-30), 또한 인간의 존엄성 곧 자율성과 창조성과 잠재력과 가능성을 무시하는 과거의 패러다임을 거부하고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의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양심적이고 담대한 인간의 이야기이다.

신약성서를 기록한 복음서 저자들과 사도바울은 예수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다. 다만 예수가 죽은지 50-100년의 세월이 흘러간 후에 성서저자들은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자신들의 주관적인 깨달음에 따라서 수정첨삭을 거쳐 편집했다. 그러나 원초적으로 성서저자들은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을 가르치고 살아내었던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을 전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사실상, 참 사람 예수가 하느님과 인간과 종교의 의미에 대해서 가르친 것과 당시의 종교체제(오늘의 교회기독교)가 신봉하던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에 대한 믿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예수가 죽은지 약 80년이 지난 후, 이 이야기를 기록한 누가의 공동체는 예수가 가르치고 산 것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산다는 것에 있어서 큰 장벽에 부딪쳤다. 마치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 따라서 살자고 설교하면 교인들이 떠나거나 교회 내부가 시끄러워지고 외부에서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상황과 흡사하다.

1세기에는 물론 21세기에도 역사적 예수가 가르치고 살았던대로 온 인류를 조건없이 사랑하고, 공평하게 대하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의 방식,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이 종교, 인종, 문화, 성, 성적본능, 빈부, 지역출신의 차별적인 경계 넘어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선언하는 교회는 큰 장벽에 부딪친다. 다른 모든 종교와 인종에도 구원이 있고, 하느님은 진노하고 징벌하는 무서운 재판장이 아니고, 기적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새로운 의식과 인간으로 참된 인간이 되어 사심없이 사랑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고, 자신이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사심없이 사랑하는 것이 진실한 신앙이라고 말하면 이단이라고 정죄한다.

예수 당시에나 지금이나 부족적인 생존의 두려움에 빠져있는 회당과 교회에서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의 방식에 대해 언급하면 예수처럼 고향에서 추방당하거나 절벽 위에서 떠밀리는 위험이 따른다. 그러나 오늘 희망은 있다. 정치 종교 사회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인식하고,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의 참된 인간으로 양심적이고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 숫자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성서문자근본주의 믿음은 더 이상 사회에서 설득력과 영향력이 없다.

예를 들자면, 기독교 성서는 절대적인 권위가 아니라 이 세상의 많은 권위들 중에 하나라는 진보적인 사상이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었다. 성서를 은유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진보적인 신학에 기초하여 동성애결혼을 합법화하는 움직임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캐나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폴투갈, 네델란드, 벨기에, 스웨덴, 놀웨이,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호주, 브라질, 멕시코 같은 소위 기독교 국가들의 의회가 동성애결혼을 합법화했다. 인종과 종교와 문화의 경계 넘어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평등하게 존중하자는 참 사람 예수의 우주적인 정신이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확장되었다.

예수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차별주의와 우월주의를 넘어서서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우주적인 신앙과 삶을 몸과 마음으로 살자고 요청했으며, 만인평등과 구원을 선언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성전종교와 자신의 고향에서 추방된 이유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예수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유대교 회당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다. 예수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신학과 사회적인 개혁의 인도주의자였기 때문에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인 생존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종교체제와 이것에 세뇌된 고향 사람들로부터 쫓겨났다.

21세기에 가정과 사회에서 모든 인간들은 인종과 종교와 성적본능과 성차별의 경계 넘어 우주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교회는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인 차별주의와 우월주의를 폐기처분해야 한다. 이것들로는 심지어 자신들의 구원도 불가능하다. 기독교인들의 유일한 구원의 길은 모든 사람들을 경계 넘어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평등하게 소중히 대하는 것 밖에 없다. 예수는 사람들을 유대인과 이방인, 깨끗한 사람과 더러운 사람,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분리하거나 차별하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는 이분법적인 편견과 부족적인 구원론에 사로잡힌 고향 사람들로부터 쫓겨났다.

조나단 갈매기처럼 더 높이, 더 빨리, 더 자유롭게, 더 아름답게 날려는 것은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기독교인의 숙명이고 참된 인간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렇게 살다가 자신의 가정과 종교체제와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 교회에서 조나단 갈매기처럼 끊임없이 더 높이 날며,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의 부활의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들려져야 한다. 원초적으로 기독교의 탄생은 예수의 신성이나 예수의 기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기독교는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과거의 패러다임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삶의 공동체에서 일어났다. 따라서 교회는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을 따라서 온전하고 참된 인간으로 새롭게 살아보려는 사람들의 생명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삶의 이야기 하나 하나는 마치 공동체를 세우는 벽돌 한 장 한 장과 같다. 삶의 공동체는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다. 앞으로 여러 세대가 지나면서 계속해서 진화하고 발전해 가야한다. 때로 수정하고 보수하고 새롭게 다시 세워나가야 한다. 이것이 참 사람 예수의 교회의 운명이고 책임이고 정체성이다.

현대 기독교인들과 교회는 유신론적 성전종교에서 쫓겨난 역사적 예수의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을 탐구하고, 세속적인 세상에서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을 살아가면 참된 행복과 자유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렇지않고 여전히 만들어진 예수를 맹신하면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와 이기적인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한체 수동적이고 지루하고 땨분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기독교인들의 중대한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하느님과 교회와 목사와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지 않고, 100% 나의 책임으로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사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 이 글은 전 지질학자인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외부필자의 기고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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