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종려주일 설교] 왕의 입성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입력 Mar 29, 2021 03:40 A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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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스가랴 9:9-10, 골로새서 1:15-20, 마가복음 11:1-11

설교문

오늘은 종려주일(Palm Sunday)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제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의 마지막 단계가 시작됩니다. 주님은 갈릴리에서 요단강을 따라 남하하여 여리고를 지나 벳바게와 베다니를 거쳐 오늘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제일 먼저 성전을 둘러보시고 해가 저물자 베다니로 다시 나와 거기서 유하셨습니다.(마가 11:11) 내일 고난주간의 월요일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을 깨끗이 청소하셨습니다. 성전에는 돈 바꾸는 자들로 가득했습니다. 절기마다 속전의 값으로 드리는 성전세를 세겔이라는 돈으로 환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상인들은 환전하면서 약 12.5%의 커미션을 떼었고, 제사장들은 상인들과 결탁하여 백성들이 가지고 온 제물을 트집 잡아 돌려보내며 상인들이 폭리를 취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은 장사하는 도둑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백성들에게 가장 존경받던 종교지도자들을 강도라고 부르시며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이 사건은 삽시간에 예루살렘 전역에 퍼졌습니다. 모레 고난주간의 화요일에 예수님은 하루종일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날 은밀히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모여 예수님을 죽일 구체적 방법을 논의했습니다. 글피 고난주간의 수요일에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복음서에는 아무 기록이 없습니다. 아마도 화요일에 행하신 일이 많아 베다니에서 쉬시며 홀로 기도하신 날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이날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팔겠노라 약속하고 은 30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난주간 목요일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최후의 만찬을 여신 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료주일인 오늘부터 우리는 목요일의 최후의 만찬까지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삶의 최후의 단계인 이번 한 주간은 이렇게 주님이 가신 길을 구경꾼이 아니라 참여자로 따라가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신 후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금요일은 오는 4월 2일의 성금요일 예배에서 깊이 묵상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마태 21:1-11, 마가 11:1-11, 누가 19:28-40, 요한 12:12-19) 그만큼 중요한 사건입니다. 때는 유월절로 예루살렘과 주변 마을은 각지에서 몰려온 순례자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습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에서 도살된 양의 수가 무려 25만 마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최소 열 사람이 양 한 마리를 바치게 되어있는 유월절 규정을 감안할 때 이스라엘 민족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에는 최대 25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약 30km 이내에 사는 모든 성인 유대인 남자들은 반드시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와야 했습니다. 아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세상 끝에서부터도 예루살렘에 몰려들었습니다. 어느 곳에 살든 유대인들의 소원은 단 한 번만이라도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이 외국 땅에서 유월절을 맞이하게 되면 "올해는 여기서,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라고 말하곤 합니다.

네 복음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를 조금씩 다르게 보도합니다. 요한복음(12:12-19)에서 예수님의 입성은 전체적으로 승리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군중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적극 환영하였으며, 예수님의 적대자인 바리새인들마저도 "온 세상이 그를 좇는도다"라고 인정하고 한탄합니다. 마태(21:1-11)는 요한과 마찬가지로 구약성서 스가랴 9:9의 메시아적 본문을 인용하지만, 예수님이 다른 왕들과 달리 겸손하고 온유한 왕임을 강조합니다.("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 마태 21:5) 누가복음(19:28-40)에서는 비록 무리가 예수님을 환호하면서 그를 왕으로 맞이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부르지만, 누가는 예수님을 예언자로 묘사하면서 예수께서 입성하신 후 예루살렘의 파괴를 예언하시며 슬피 우셨다고 보도합니다. 이와 달리 마가는 단순합니다. 오히려 마가의 꾸미지 않은 소박함은 이 본문이 가장 원시적임을 알게 해줍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모호하고 예루살렘 입성은 풍자적입니다. 예수님은 침묵합니다. 그런데 그는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왕입니다.

마가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의 일행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벳바게는 '무화과나무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베다니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가 살던 곳으로 예수님이 자주 머물렀던 곳입니다.(마가 11:11; 요한 11:1-3) 그런데 이곳이 감람산에 있었다는 것을 성서가 특별히 강조합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편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는 해발 800m의 산으로 예루살렘보다 40m 더 높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에서 감람산이라는 이 배경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성서의 스가랴 예언자는 "그 날" 곧 "여호와 날"이라 불리는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온 세상의 왕이 되시기 전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스가랴 14:4)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감람산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바로 이 산에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 둘을 보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마가 11:2)를 가져오도록 하시고 거기서부터 행진을 시작하셨습니다.

나귀는 일찍부터 메시아와 관련된 짐승입니다. 랍비들은 "꿈에 나귀를 본 사람은 메시아가 오심을 희망해도 좋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처럼 스가랴는 메시아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 9:9) 나귀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비천한 짐승이 아닙니다. 왕들은 전시에 말을 탔지만, 평시에는 나귀를 탔습니다. 말은 솔로몬 시대에 이집트에서 수입하여 군마로 사용했지만, 나귀는 성지에서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의로운 구원자가 나귀 새끼를 타고 임하시면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스가랴 9:10)이라고 스가랴는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의도적으로 이 스가랴의 예언을 집행하셨습니다. 스가랴의 예언에 기초하여 치밀하고 세심하게 한 편의 '길거리 공연'을 연출하셨습니다. 용의주도하게 왕을 패러디하는 풍자극을 주도하셨습니다. 무엇을 보여주려 하시는 걸까요?

제자들에게 어느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가져올 때 왜 그러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면 즉시 보낼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일종의 암호로 나귀 새끼의 소유자와 이미 오래전에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합니다.

마가의 본문 중 대부분(1-7절)은 이 사건을 위해 예수께서 얼마나 치밀하게 미리 계획하셨는가를 보여줍니다. 사실 이스라엘 종교사를 볼 때 예언자들은 그들의 말이 사람들의 무관심과 몰이해의 장벽에 부딪힐 때 그들이 깨달아 알 수 있도록 극적인 행동으로 메시지를 전하곤 했습니다.(열왕기상 11:29-31, 예레미야 13:1-11; 27:1-11, 에스겔 4:1-3; 5:1-4 등) 예수님도 바로 이런 극적인 행동을 준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얹으니 예수께서 그 위에 타셨습니다.(마가 11:7)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과 또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폈습니다.(마가 11:8) 이 장면은 누가 보아도 '왕의 즉위식'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예후가 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 자기들의 옷을 펼쳐 길에 깔았습니다.(열왕기하 9:13) 시몬 마카비우스가 독립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었습니다.(마카비 제1서 13:51) 그래서 "들에서 벤 나뭇가지"(마가 11:8) 혹은 "나뭇가지"(마태 21:8)라고만 말하는 마가나 마태와 달리 요한은 그 나뭇가지가 "종려나무 가지"(요한 12:13)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종려나무 가지일까요? 종려나무는 '유대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왜냐하면, 이 나무는 불사조와 같은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종려나무의 학명은 "Phoenix dactyliferra"인데, 글자 그대로 '불사조'라는 말이 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도끼로 쳐서 남은 그루터기를 불러 태워도 1년 후 다시 자랍니다. 그렇게 아무리 밟아도, 아무리 불로 태워도 다시 살아나는 나무를 보면서 약소민족인 유대인들은 희망을 품었던 것입니다.

마가에 의하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사람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가 11:9-10)라고 외쳤습니다. "바루카바 헤쉠 아도나이"(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이 말은 시편 118:26의 인용입니다. 이 시편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도달했을 때 기쁘게 부르던 '할렐'(Hellel) 즉 찬양시편(시편 113~118)의 마지막 편입니다. '제왕시'(Royal Psalm)라고도 불리는 이 시편을 오늘 우리는 교독문으로 함께 읽었습니다. 그중 다함께 읽은 맨 끝 구절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시편 11:25)에서 "이제 구원하소서"가 바로 우리 귀에 익숙한 '호산나'(호쉬안나)입니다. 이 구절은 원래 하나님을 향한 기도문이었으나, 훗날 절기 때나 예배 때 자주 사용되면서 본래의 뜻을 잊어버리고 마치 "할렐루야"와 같은 하나의 환호 소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순례자나 유명한 랍비에게 건네는 인사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호쉬안나'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약 백 년 전에 예루살렘 군중이 크게 노래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시리아의 지배로부터 아크라를 탈환한 시몬 마카비우스를 환영할 때입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 마카비우스를 향해 '호쉬안나'(이제 구원하소서)를 소리 높여 외치며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루살렘의 군중이 다시 예수님을 향해 '호쉬안나'를 목놓아 외칠 때 그들은 마카비우스와 같은 전쟁 영웅의 귀환을 기억하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십니다. 사람이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는 어린 나귀라 아마도 예수님의 발은 땅에 질질 끌렸을 것입니다. 그는 전쟁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말 대신에 의도적으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십니다. 스가랴의 예언대로 '공의'와 '구원'을 성취하시는 메시아는 평화의 왕으로 오십니다. 그는 지금 사람들이 꿈꾸는 전쟁의 용사가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십니다. 당시에는 누구도 그런 메시아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마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잘 기획된 '길거리 공연'에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메시아 기대를 수정하려는 예수님의 의도가 역력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정면으로 수정하셨습니다. 군중은 마카비우스를 환영할 때처럼 예수님을 민족주의 메시아로, 배타적 메시아로 옹립하려 했으나 예수님을 그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화려했을 것으로 상상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장면은 마가가 강조하는 것처럼 행렬 내내 수수께끼 같은 침묵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마가의 예수님은 무리의 환호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본인이 준비하시고 연출하시는 이 요란한 행렬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단지 침묵할 뿐입니다. 군중의 환호 속에 예수님의 침묵, 그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꼭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 나는 메시아다. 하지만 나는 너희가 기대하는 그런 메시아가 아니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겠으나 너희가 기대하는 방법으로는 아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아니라 '자기들의 꿈과 욕망을 투사한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때도 지금도 공의와 평화를 이루는 겸손하고 온유한 왕이 아니라 부와 권세와 성공을 약속하는 영웅을 기대합니다.

(그림 1) 벨기에의 화가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 1860-1949)가 그린 <1889년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패러디한 그림입니다. 강렬한 원색이 심리적인 불안정을 고조시키는 그림입니다. 시민들은 들떠서 '호산나!'를 외치는데 예수님은 군중 속에 홀로 있습니다. (그림 2)노란 큰 후광을 쓴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브뤼셀에 들어와 오른손을 들어 군중에게 축복을 내리는데 아무도 그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자신을 감춘 채 단 한 명도 예수님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축복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아우성치며 어디론가 물려가고 있습니다. (그림 3) 이렇게 환영받지 못한 예수는 그림의 상단에 조그맣게 묘사되어 사실 관람자조차 예수님의 존재를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성서에서처럼 나귀를 타고 후광을 크게 두르고 있지만 당당한 구세주라기보다 초라한 모습으로 귀가하는 패잔병 같습니다. (그림 4) 이 그림에서 군중은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가면 쓴 군중은 솔직하고 진솔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위선과 허위의 가면을 쓰고 물질, 명예, 겉치레에 매달리는 우리 현대인을 비유합니다. (그림 5) 그런 군중이기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렇게 열광적으로 환영하다가 이내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며 광란의 피의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로 돌변합니다. (그림 6) 이 그림에서 화가 앙소르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메시아가 존재하지 않아서 비극이 아니라, 메시아가 존재함에도, 그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비극입니다.(김현화, <성서 미술을 만나다> 참조) 그것이 오늘 우리의 진정한 비극입니다.

(그림 7) 또 하나의 그리스도의 입성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미국의 조엘 펠레티에(Joel Pelletier)가 그린 <2008년 그리스도의 워싱턴 입성 (Christ's Entry into Washington in 2008)>입니다. 아마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다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와 같은 이미지는 아닌가 부끄럽습니다. 황금 배광을 한 예수, 엄청난 군사를 이끄는 지도자... 그런데 오른쪽 귀퉁이에 적힌 문구가 인상적입니다. "Long live Jesus the greatest political thinker."(가장 위대한 정치 사상가인 예수 만세!)

오늘 우리는 군마가 아니라 '나귀를 타신 왕'에게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도 낯선 이 왕에게 주목해야 합니다. '나귀를 타신 왕'은 '이해받지 못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버림받은 왕'이 되었습니다.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하던 군중은 불과 닷새가 못 되어 그를 "십자가에 못 받으라"(요한 19:6) 소리 질렀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이 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한이 말하듯이, 그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요한 12:16) 주님이 부활하신 이후에야 이 행렬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귀를 타신 왕'은 '이해받지 못한 왕'이 되었고 결국은 우리 모두에게 '버림받은 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오래전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은 성취되고야 말았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1-3)

오늘의 공동기도문, 이해인 님의 시 <당신이 왕이라면>을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구해야 할 자들이 하도 많아 / 혼자서 처절히 피 흘려 죽은 / 당신이 진정 왕이십니까 // 온통 귀먹고 병든 세상에 / 산천이 울리도록 큰 대답 주십시오 / 당신이 왕이라면 // 살아온 당신을 향해 / 또다시 밤마다 칼을 가는 자들이 / 유다와 함께 횃불 들고 달려오는데 // 당신을 모르노라 고개 흔드는 베드로와 / 나도 시시로 악수를 나누는데 / 그래도 당신이 왕이십니까 // 빛보다 어둠 짙은 세상에 안겨 / 바보처럼 숨어서 울지도 못하는 / 약자의 설움을 가엾이 여겨주십시오 //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 당신의 집은 보이지 않습니다 / 날마다 조금씩 내가 죽지를 못해 / 내 안에 그대로 죽어 계신 분이여 // 어떻게 당신을 살려내야 합니까 / 제발 큰 소리로 대답해주십시오 / 당신이 왕이라면."

솔직히 이 시는 매우 생경하고 불편합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가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히려 불의를 묵인하고 있는 것처럼 원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왕이신 예수님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압니다. 이 고통의 원인이 왕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오히려 무능해 보이는 이 왕만이 진정한 구원자이며 유일한 치유자임을 압니다. 그래서 "어떻게 당신을 살려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 답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날마다 조금씩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날마다 조금씩 내가 죽지를 못해 / 내 안에 그대로 죽어 계신 분"을 살리는 길은 날마다 내가 조금씩 죽은 것뿐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 8:34)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곧 나의 방식과 나의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방식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그것이 "날마다 조금씩 내가 죽"는 것입니다.(박종덕, <이해인 시와 영성의 시학> 중에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종려주일은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방식'과 '나의 방식'을 오해하는지 일깨워주는 주일입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혼동하는지 돌아보게 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고 소음 가운데 침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바람이 투사된 메시아, 군중이 기대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영접해야 합니다.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가르치기 위해 오시는 메시아를 영접해야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예수님이 여러분의 마음속으로 입성하십니다. 보무당당하게 군마를 타지 않고 어린 나귀를 타고 여러분의 마음속으로 들어오십니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이 겸손하고 온유한 왕을 여러분을 맞이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오늘 내 마음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처럼 거짓과 편견과 욕심으로 더러워진 내 마음의 성전을 깨끗이 청소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도 깨끗이 닦으시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살과 피마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다 내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실 것입니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고난주간, 이번 한주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경건하고, 가장 거룩하게 예수님이 가신 숭고한 희생과 고난의 길을 따라 한 걸음씩 묵상하며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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