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의혹과 확신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입력 Apr 13, 2021 05:31 A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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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에스겔 34:11-16, 고린도후서 13:4-9, 요한복음 20:24-29

설교문

요한복음 20장에는 약 일주일 간격으로 벌어진 두 개의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안식 후 첫날 저녁", 즉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일어난 사건이고(19-23절), 다른 하나는 그로부터 여드레 지난 후에 일어난 사건(24-29절)입니다. 둘 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불안과 의혹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신 사건인데 두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져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19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어코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하고야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의 차례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포와 불안한 가운데 남의 눈을 피해 조용히 모여 숨었습니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혹 산헤드린의 밀사들이 자기들까지도 잡으러 온 것이 아닐까 그들은 두려움 속에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도마는 우연히 없었고, 유다는 이미 원수의 진영에 참여했으니 10명의 제자만 있었습니다.

이들 중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십자가형을 받고 살아서 내려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식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아니라, 뭔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만 가중시킬 뿐이었습니다. 너무도 불안해서 제자들은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해가 질 때까지 문들을 걸어 잠그고 조용히 숨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불안했는지는 모인 곳의 문들이 닫힌 상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문들을 '잠갔다'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닫았다'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닫았다'라는 단어의 그리스어 '클레이오'의 분사 제1 완료형은 '한번 잠기고 난 후 다시는 열리지 않고 그 상태로 계속 있었다'라는 뜻입니다. 그 문은 한 집의 문이기도 했고 제자들의 마음의 문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으면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마음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리고 한번 닫힌 마음은 좀처럼 열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갑자기 그들 한가운데로 모든 닫힌 문을 뚫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심한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두 마디 인사를 나누셨습니다. "에이레네 휘민!"(Peace be with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19, 21절) 뜻밖이었습니다.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이 주신 첫 메시지는 바로 평화, '에이레네'였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절) 했습니다. 현장에 있던 10명의 제자는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찾아오신 주님을 보고 평화를 찾았고, 그의 손과 옆구리에 난 십자가의 상흔(傷痕, stigma)을 보고 기쁨을 되찾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도 불안과 의혹에 떨고 있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굳게 닫힌 마음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십니다.

평화와 기쁨을 선물하신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락 말씀하시고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2절)라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성서 전체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숨'으로 표현한 곳은 여기를 포함해 단 세 곳뿐입니다. 첫 번째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7)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두 번째는 멸망한 민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실 때입니다. 약소민족 이스라엘이 패망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에스겔을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 가운데로 데려가 거기서 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여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에스겔 37:9)라고 말하자 마른 뼈들이 모두 살아나서 일어나 섰다고 했습니다. 패망한 민족을 다시 세우실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세 번째가 바로 요한복음 20장에서 떨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시어 그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실 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22절) 성령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서 전체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숨'으로 표현한 곳은 매우 특별한 때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민족을 재건하실 때, 그리고 부활의 사도들을 세상에 파송하실 때 단 세 번뿐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20장에 기록된 부활절 저녁의 그 사건은 새로운 창조, 새로운 시작, 새로운 세상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구원사의 대전환점이 된 이 사건의 현장에 없었던 한 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도마(Thomas)입니다. 스승을 배반해 원수의 진영에 가담한 유다를 빼면 도마가 유일하게 안식 후 첫날 저녁에 일어난 이 사건 현장에 없었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20장의 본문처럼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쌍둥이]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24절)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절) 선언했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라는 별명이 붙여지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여드레를 지나서"(26절) 부활절 저녁에 일어났던 사건과 똑같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본문을 보니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26절)라고 하셨습니다. 정말로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번에 주님은 도마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 그러자 도마가 외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28절) 본문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지난 2천 년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도마는 '의심 많은 도마'라고 불리며 닮아서는 안 될 불신앙의 표본처럼 여겨졌습니다. 설교자들은 대부분 '도마처럼 의혹을 갖지 말고 무조건 믿는 자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의심은 믿음의 적이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이라고 가르칩니다. 의심과 믿음의 이분법입니다. 하지만 이는 요한이 전하는 도마 이야기를 매우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전체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도마가 절규와 같이 외친 말, 곧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My Lord and my God - 28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퀴리오스)이시고 나의 '하나님'(데오스)이 되신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최종결론입니다. 그것은 요한 공동체의 신앙고백이었고, 그 고백이 다른 사람이 아닌 '의심 많은 도마'로 알려진 사람의 입에서 증언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도마(Thomas)는 어떤 사람입니까?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도마(마태 10:3, 마가 3:18, 누가 6:15)는 요한복음에서 특별한 조명을 받는데 모두 세 번 등장합니다. 맨 처음은 요한복음 11장입니다. 베다니에 사는 마르다의 남동생이며 마리아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그에게로 가자 하실 때의 일입니다. 성경을 보니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6절)라고 말합니다. 그는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은 제자들이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11절)라고 예수님께 물을 정도로 긴박하고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했습니다. 그 정도로 그는 대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다시 등장하는 곳은 요한복음 14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 앞에서 저 유명한 '고별설교'(요한 13~17장) 즉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남기실 때의 일입니다. 제자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또 그를 보내야 하는 제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황망했겠습니까.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1-4절) 그때 도마가 불쑥 주님께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Lord, we do not know where you are going. How can we know the way? - 5절)

어찌 보면 당돌한 질문입니다. 아니 눈치 없는 질문입니다.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죽음과 이별을 알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다들 할 말을 잃고 있는데 도마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갑자기 분위가 싸해지는'(갑분싸) 질문을 던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도마의 바로 이 질문 때문에 우리는 성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의 하나가 된 예수님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절)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는 도마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이보다 더 명확한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 명징한 신학적 선언을 이끌어 낸 이가 바로 도마입니다. 그는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솔직하게 묻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정직한 신앙' 그리고 '질문하는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이랬던 도마가 왜 부활절 저녁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과 함께 죽으려고 생각할 만큼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기에 십자가 처형으로 인한 도마의 상심이 매우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었던 것 같습니다. 홀로 비탄에 잠겨 자신의 슬픔과 싸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처음 오셨을 때 그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라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도마는믿기를 거부했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자기의 손가락을 직접 못 자국에 넣어 보아야 믿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런 도마에게 우리는 '의심 많은 도마'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를 그렇게 부르는 데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그리고 그분의 손과 옆구리를 보고도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은 오히려 다른 제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26절)라고 했습니다. 다시 문들이 닫혀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뵌, 도마를 제외한 다른 모든 제자는 여전히 불안과 의혹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고도 확신하지 못했고 파송을 받고도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달랐습니다. 주님 손의 못 자국을 눈으로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자기의 손가락을 직접 넣어 보고 자기 손을 창에 찔린 주님 옆구리에 직접 넣어 보지 않으면 절대 믿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의혹을 제기한 도마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렇게 하지 않고 바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카라바조가 그린 그림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의심 많은 도마'(a doubting Thomas)라는 주제로 그려지고 만들어진 대부분의 회화와 조각상은 하나 같이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본문 어느 곳에도 도마가 그랬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누구보다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그는 주님을 만지지 않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했습니다. 의혹이 깊었기에 확신이 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신학 선언을 이끌어 낸 것도 도마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신앙 고백을 이끌어낸 것도 도마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다른 모든 제자보다 가장 큰 믿음의 제자는 바로 도마입니다.

주님은 그런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 20:27)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공동번역 성서는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로, 새번역 성서는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마치 의심하는 도마를 책망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여전히 의심과 믿음을 이분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영어 성경이 원문에 가장 가깝게 번역하듯이("do not be unbelieving, but believing" - NASB), 이 구절은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강조점은 도마를 책망하시는 게 아니라 '보고 믿으라'는 초대입니다. 주님은 도마의 의심을 추궁하기보다 수용하셨습니다. 믿음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의심은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포용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최종적으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한 20:29)라고 덧붙이십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할지라도 믿는 신앙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이 '보아야 믿는 믿음'보다 더 복된 것임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의혹을 책망하지 않고 품으시며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을 가지라 격려하셨습니다. 이는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를 믿고 살아가는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2천 년 전 오늘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에게 미리 하신 말씀으로 저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더 큰 은혜가 됩니다.

한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얼치기로 알고 있는 신조(信條)보다 성실한 회의 속에 참다운 신앙이 살고 있다."(Tennyson) 참 인상적인 말입니다. 도마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두 가지 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타협하지 않는 성실함입니다. 그는 알고 있지 못하는 걸 알고 있다거나, 믿지 못하는 걸 믿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한 척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도마는 확신하고 싶었습니다. 확실히 알고 확실히 믿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해가 될 때까지, 납득이 갈 때까지 질문했습니다. 그의 신앙은 '질문하는 신앙',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믿음은 이해를 추구한다"(faith seeking understanding)는, 저 유명한 안셀무스의 신학적 정의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의심 많은 도마'라고 우리가 조롱한 그를 재발견해야 합니다. 그의 '성실한 회의' 속에 '참다운 신앙'이 꽃피고 있었음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의혹과 믿음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모든 질문을 가로막고, 무조건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강변하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몽매주의(蒙昧主義, obscurantism)로 전락시켜 지성과 영성의 편을 가르는 일을 이제 그만두어야 합니다.

도마가 가진 또 하나의 덕목은 그가 의혹을 통해 확신에 이르렀을 때 그 확신을 가지고 세상 끝까지 주를 따랐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20장 이후의 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멀리 인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다 순교했다는 사실은 여러 전승을 통해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들고 서쪽으로 갔다면 도마는 복음을 들고 동쪽으로 갔습니다. 서기 1세기에는 향신료 무역을 위해 남인도를 드나들던 유대 상인들이 있었는데 도마는 아마도 이들을 따라 인도로 갔던 것 같습니다. <도마행전 The Acts of Thomas>라는 외경(外經)을 보면, 사도 도마는 서기 52~53년경 인도 남부에 도착해 복음을 전하다 순교해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에 의해 인도에 일곱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지금도 인도 남부 타밀나두 주 첸타이(Chennai, 옛 이름 Madras)에 가면 <도마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성 도마 산 위에 있는 이 교회에 들어가 보면 도마가 직접 조각했다는 십자가 돌판도 있고 그의 손가락뼈 유해도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그는 첫 동방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도마는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인도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인도로 가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도 속에 "주 예수여, 당신이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에라도 가겠습니다"라고 그 길을 따랐습니다. 그는 확신을 얻을 때까지 의심하는 사람이었지만 한번 확신하면 모든 것을 다 던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도마와 같은 신앙은 말뿐인 신앙보다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 도마와 같은 순종은 깊은 확신 없이 무슨 일이나 떠맡아 결국에는 약속을 어기고 마는 안일한 묵종(默從, 말없이 따름)보다 나은 것 같습니다. 도마는 자신이 믿는 것과 믿지 못하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믿지 못하는 것을 믿게 해달라고 정직하게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이것이 성실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도마처럼 간구할 때 주님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우리를 찾아오셔서 못 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우리가 확신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사실 요한복음 20: 19-31에 나오는, 약 한 주일 사이에 일어난 이 두 사건은 의혹과 두려움에 가득 찬 제자들을, 그리고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찾아오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오늘 구약성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그분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며 병든 자를... 강하게 하려"(에스겔 34:16) 우리를 끊임없이 찾아오십니다. 굳게 닫힌 문과 마음의 장벽을 뚫고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불안과 의혹 속에 떠는 제자들과 우리를 향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평화를 선물하시며 자신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흔을 보이시고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요한복음 20장이 전하는 부활의 이야기는 우리를 찾아오고 또 계속해서 찾으시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오늘의 공동 기도문(조지 마테슨, <나를 저버리지 않는 변함없는 사랑이여>)처럼, 우리는 "아픔을 통하여 나를 찾으시는 기쁨이여, 당신께는 내 마음을 닫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주님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으며, 또 믿는 대로 사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찾으십니다. 얼치기로 알고 있는 신조보다 성실한 회의 속에 참다운 신앙이 꽃핍니다. 그러므로 도마처럼 질문하십시오. 도마처럼 이해를 추구하십시오. 확신 위에 서기 위해 의심하십시오. 오늘 읽은 신약서신은,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고린도후서 13:5)하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또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디모에후서 3:14)라고 했습니다. 배우십시오. 주님을 배우십니다. 그리고 확신 안에 거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도 도마처럼 길이신 주님을 따라 길 없는 세상에서 생명과 진리의 삶을 살 것입니다. 도마처럼 묵종이 아니라 진실한 순종의 삶을 살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도마처럼 "주 따라 가는 길 험하고 멀어도 찬송을 부르며 뒤따라가"는 삶,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사는 삶,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사는(찬송가 436장) 그런 복된 삶의 주인공이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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