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네 속에 있는 빛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입력 Jun 07, 2021 06:22 A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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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신명기 26:16-19, 유다서 1:17-21, 누가복음 11:33-36

코로나로 인해 우리 모두 마스크를 쓰고 살고 있습니다. 벌써 1년 넘게 마스크를 썼습니다. 언제까지 이 마스크를 써야 하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니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마스크를 쓰고 살았습니다. '마음의 마스크'를 쓰고 살았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가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자신의 겉모습을 인위적으로 만들어간다고 합니다. 그 마음의 마스크를 '페르소나' 혹은 '가면'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마음의 마스크를 쓰고 있습니다.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 칼 융(Carl Jung)은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terrifying)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스마일'의 가면을 씁니다. 어떤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할까 두려워 일부러 '까칠이' 가면을 씁니다. 종교인들도 종종 '거룩의 가면'을 쓰고 자신의 불완전한 내면을 숨기려 합니다.

인간 안에는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괴감과 부적절감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심리상담가들에 의하면 마음의 아픔을 토로하기 위해 찾아온 이들도 정작 그 마음의 내면 깊은 골짜기로 내려가려 하면 이내 브레이크를 잡는다고 합니다. 소위 '마음의 저항'을 시작합니다. 왜 그럴까요? 내담자들은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혼자 울고 있는 무기력한 아이가 숨겨져 있거나, 난폭한 괴한 같은 공격성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수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융의 말처럼,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끄러운 자신을, 어두운 내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발휘하는 이들에게만 비로소 자신을 초월한 곳에서부터 오는 빛과 치유의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권수영, "내면 안의 부끄러운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 『지구정원사 가치 사전』 중에서)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두 교황 The Two Popes>은 스스로 물러나려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그 후계자로 지목된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 즉 현 프란치스코 교황 사이의 밀고 당기는 대화가 인상적인 영화입니다. 앤서니 홉킨스와 조너선 프라이스가 열연했습니다. 두 사람은 신학과 스타일과 방법이 너무도 다릅니다. 후임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에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완강히 거절합니다. 그의 내면에는 남들에게 밝히기 싫은 어두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76년에 아르헨티나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3만 명이 살해됐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수백만 명의 어머니들이 실종된 자식을 찾아서 온 나라를 헤맸습니다.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신부와 수녀들은 암살당했습니다. 당시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예수회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신부와 수녀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게 자기 일이라고 생각해 군사정부 지도자와 타협을 시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동료 신부들은 납치되어 고문당하고 살해당했습니다. 1983년 민주화가 되었을 때 그는 해외로 추방되었습니다. 자신 안의 이 어두운 기억 때문에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자신은 절대 교황이 될 수 없다고 베네딕토 16세에게 완강히 버텼습니다.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내면의 어두움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싫은 부끄러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적으로 그렇게 힘들던 군사독재 시절 그는 남몰래 일주일에 한 번씩 정신분석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부끄러움을 털어놓았습니다. 자신의 가혹한 진실과 마주하는 용기를 냈습니다. 그리고 성직자가 정신분석가를 찾아갔다는 고백도 용감하게 했습니다. 그 용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매일 웃는 연습을 합니다"라고 말하는 이 교황은 "화려한 바티칸 궁을 마다하고 소박한 방 한 칸을 선택한 사람"으로, "고급 리무진 대신에 소형 승용차에 올라 손 인사를 전하는 사람"으로, "축구에 열광하고 탱고를 즐기며 유머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이웃의 작은 고민을 제 일처럼 마음 쓰고 공감하는 사람"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스와미 묵타난다의 시 <조용하게 앉으라>입니다. "조용하게 앉으라. / 그리고 그 안에서 누가 / 너의 생각을 관찰하고 있는지 찾아보라. / 주의 깊게 바라보면 / 네 안에서 또 하나의 너를 발견하게 되리라. / 그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 너 자신을 분명히 알게 되리라. / 그렇게 안을 들여다보라. / 네 안의 또 하나의 너를 찾으라. / 그러면 완성이 가까우리라."

오늘 예수님이 조금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누가 11:33-3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이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당연한 말씀입니다. "등불을 켜서 숨겨두거나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공동번역)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라고 하십니다. 왜 갑자기 눈 이야기를 하시는 걸까요. 등불과 눈은 어떻게 연결됩니까.

빛의 본성은 '감추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빛은 오직 밝히 드러날 뿐입니다. 빛이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는 언제일까요? 오직 빛을 받는 사람 때문입니다. 등불을 켜서 숨겨두거나 됫박으로 덮어두면 빛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눈을 감거나 마음의 문을 닫으면 빛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눈 이야기를 하십니다. 만일 사람이 온전한 눈을 갖고 있다면 빛은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 온 존재를 환하게 밝힐 것입니다. 하지만 눈이 성치 않으면 빛은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그의 내면은 어둠 속에 거할 것입니다. 여기서 눈은 막지만 않으면 들어갈 수 있는 어떤 창문과 같은 것입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혼의 눈, 마음의 창입니다. 영혼의 눈을 감거나 마음의 창을 닫으면 아무리 강한 빛이라도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주님의 빛조차 그렇습니다.

성서는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편 36:9)라고 했습니다. 또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즉]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시편 56:13) 하신다 했습니다. 예수께서도 친히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 8:12)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생명의 빛입니다. 그 빛 안에서 우리를 참 생명을 봅니다. 하지만 그 빛은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마음의 눈을 뜨면 그 빛은 내 안에 들어와 어두운 내면을 환히 밝혀줄 것입니다. 내가 영혼의 창문을 열면 하나님의 생명의 바람이 내 안에 들어와 내 삶을 소생케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누가 11:35). 저 밖에 있는 빛을 보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안에 그 빛이 비취고 있는가 보라 하셨습니다. 내 안에 그 생명의 빛이 비취지 못하게 눈을 감고 있는 건 아닌지, 그 빛을 됫박으로 덮어두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라 하셨습니다. 오늘의 공동기도문, 최용우 님의 <예수 마음>을 다시 읽어봅니다.

"주님! / 바람이신 주님 / 제가 코로 숨을 들이킬 때마다 / 바람과 함께 제 몸 안에 들어오소서. / 그리하여 제 주인이 되어 주소서. // 주님! 빛이신 주님 / 제가 햇볕을 쬘 때마다 따스한 열과 함께 제 몸 안에 들어오소서. / 그리하여 제 힘이 되소서. // 주님! / 물이신 주님 / 제가 깨끗한 생수를 마실 때마다 / 시원한 물과 함께 제 몸 안에 들어오소서. / 그리하여 제 생명이 되소서."

박기평 시인이 언젠가 사람들과 함께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이었습니다.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렵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신기루인가 /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 희미한 불빛 하나"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그들을] 부르는 /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가 보였습니다. 산 것입니다! 그때 시인은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박이고" 있습니다. 만년설 봉우리 사이에 호롱불 하나 들고 서 있는 께로족 청년처럼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사라지지 말아라"라고 시인은 노래합니다.(박기평,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집이 없어 추우십니까? 많은 일에 일이 지치셨습니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해 괴롭습니까? 혹 친구의 배신에 치를 떨고 계십니까? 지금 쓰러져 울고 계십니까? 다시 시인이 노래합니다. "집 없이 추운 이여 / 그 사람도 집이 없었습니다 // 노동에 지친 이여 / 그 사람도 괴로운 노동자였습니다 // 인정받지 못하는 이여 // 그 사람도 자기 땅에서 배척당했습니다 // 배신에 떠는 이여 / 그 사람도 마지막 날 친구 하나 없었습니다 // 쓰러져 우는 이여 / 그 사람도 영원한 현실 패배자였습니다. // 그 사람도 그랬습니다 //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 포기하지 않은 희망이 있었습니다 / 피투성이로 품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 그것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 자신의 패배와 죽음까지를 끌어안고 / 마침내 무력한 사랑으로 이루어낸 것입니다 // 그 사람이 그러했듯이 / 당신도 그러할 것입니다 // 이 세상의 작고 힘없는 사람 중의 하나인 / 당신 속에 그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박기평, <그 사람도 그랬습니다>)

생명의 빛이신 그가 내 안에 살아계신다고 고백합니다. 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의 희미한 등불이 아니라 내 안에 진한 사랑의 빛으로 내 어둠을 몰아내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내 안에 살아계십니다.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한"(이사야 53:4) 그가 우리 안에 빛으로 거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생명의 빛입니다. 그가 내 영혼의 빛으로 '내 안에' 계십니다.

제가 최근에 작은 수술을 하나 받았습니다. 아직은 걷기가 불편해 쉬엄쉬엄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상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아프고 나니 꽃들이 더 예뻐지고 새소리가 귀에 더 크게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학교회 오는 길에 '미국 코스모스'라고도 알려진 금계국(金鷄菊, Coreopsis)이 활짝 피어 있습니다. 온통 노란 물결입니다. 작년 이맘때도 폈으니 또 필 줄은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이 꽃들이 더 사랑스럽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사실 싱거운 소리 아니겠습니까. 시각장애인이 아니라면 새도 보이고 백합화도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부러 "보라"고 하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새장의 새가 아니라 공중을 나는 새, 꽃병에 있는 꽃이 아니라 들에 핀 백합을 보라 하셨습니다. 번역이 백합이지 사실은 이름 없는 들꽃들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지천에 널린 들꽃을 "보라"고 하신 것은 평소에 눈여겨 잘 보지 않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새도 내가 보려고 해야 보이는 것이고, 들의 꽃들도 내가 보려고 해야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여기에 와 있습니다. 공중의 새가 날고, 들에 꽃들이 꽉 차 있듯이 우리 주변에, 우리 내면에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가득 차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켜서 됫박을 덮어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눈을 떠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으면 기쁨이 생깁니다. 기쁨이 생기면 감사가 솟아납니다. 내가 하루를 더 살 수 있는 것이 감사하고,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풀 한 포기도 사랑스럽고 대견해 하며, 산다는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하지만 내 안에 이 기쁨이 없으면 짜증이 나고, 내 안에 이 감사가 없으면 불평이 나옵니다. 내 안에 빛이 없으니 어둠이 나를 이깁니다. 내 안에 생명의 빛이 없으니 사망의 법이 나를 주장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린도전서 15:10)임을 잊고 남이 가진 재물에, 남이 가진 지식에, 남이 가진 건강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기쁨도 전염되지만 슬픔은 더 잘 전염된다고 하지요. 내 안에 고유한 기쁨이 없으니 저 사람의 어두운 감정에 휘말립니다. 내 안의 기쁨이 다른 사람의 슬픔에 밀려 빼앗깁니다. 나는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다닙니다.

하지만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란 감사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감사가 충만한 사람은 기쁨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은혜와 감사와 기쁨이 하나입니다. 무엇이 우리 영의 눈을 가리어 은혜를 보지 못하게 합니까? 공중의 새도 보려고 해야 보이고, 들의 꽃들도 보려고 해야 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중에 새들이 날고 길가에 들꽃이 꽉 차 있듯이 이미 우리 주변에, 내 안에 가득합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태 6:26)라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처럼 우리는 "그의 보배로운[소중한] 백성"(신명기 26:18)입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신명기 26:19)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소중한 보물로 택하셨다"(시편 135:4)라고 성서가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를 택하시고,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하물며 너희를 돌보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10대 자녀가 반항하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내야 할 세금이 있다면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옷이 몸에 좀 낀다면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이고, 닦아야 할 유리창과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집이 있다는 것이고, 정부에 대한 불평불만의 소리가 크면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주차장 맨 끝에 빈자리가 하나 있다면 내가 걸을 수 있는 데다 차도 있다는 것이고, 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면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림질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면 입을 옷이 많다는 것이고,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이민규, <항상 감사하기>)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나도 모르게 일궈진 불평불만들도 '생각을 바꾸면' 감사한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눈을 뜨면 은총의 빛이 내 안을 환히 밝히지 않겠습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오늘 시편 42편의 기자가 스스로 그리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답합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의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편 42:11).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그러면 그가 빛으로 나타나 여러분을 도울 것입니다. 내 마음의 골짜기 깊은 곳에 따뜻한 사랑의 빛, 풍성한 은총의 빛, 그리고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환한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실 것입니다. 그 빛으로 우리는 어둠을 이길 것입니다. 그 빛의 힘으로 우리는 나 자신과 용감하게 대면할 것입니다.

주님은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아직도 숨어서 혼자 엉엉 울고 있는 어린아이가 있습니까? 내 안에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난폭한 괴한과 같은 폭력성이 숨어 있습니까? 그래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어려워 오늘도 두꺼운 '마음의 마스크'를 답답하게 쓰고 계십니까? 스마일 마스크, 까칠이 마스크, 혹은 거룩의 마스크를 쓰고 숨죽이고 계십니까? 성서에 하나님은 "내 속에 정한 마음, 정직한 영"을 창조하신다 했습니다.(시편 51:10) 내 안에 "새 영"을 부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했습니다.(에스겔 36:26) "하나님의 법"을 우리 속에 두고(예레미야 31:33), 또 "진리의 영"을 보내어 우리 속에 계시게 하겠다 했습니다.(요한 14:17)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전능자의 숨결"이 살아 계시고(욥기 32:8), "하나님의 씨"가 심겨있습니다.(요한1서 3:9)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어서 주님의 생명의 빛이, 신선한 생명의 바람이 차갑고 어두운 여러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하십시오. 그리고 항상 내 속에 있는 이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십시오.

마지막으로 오늘 신약서신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다서 1:20-21) 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지키는 힘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빛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긍휼을 기다리며 영생에 이르는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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