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8.15단상] 8.15 해방 76년의 생각(1)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본지 회장)

입력 Aug 18, 2021 04:18 P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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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베리타스)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

8월 15일, 1945년 8월 15일, 나는 우리 나이로 15살 난, 중학생이었다. 바로 그날, 나는 흙 파는 삽을 들고 만주 땅, 이름 없는 산 언덕에 서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일본 제국주의 정부가 조선의 기독교 전도사나 목사들에게 일본의 전쟁희생자들을 모신 신사(神社)앞에 서서 절하라는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이유로 가진 괴롭힘을 당하다가, 견딜 수 없어, 교회를 사직하고, 식구들을 끌고,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망명하였다. 일본이 1941년 12월 미국 하와이 진주만 해군기지를 기습 폭격하여, 태평양전쟁을 발발하기 몇 달 전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만주 서부지역 일본 제국의 공업도시에 종사하는 일본인 기술자와 노동자의 아들들을 위해 세운 일본인 중학교에 조선인 학생으로 입학하여 일본 교육을 받고 있었다. 8.15가 터진 1945년 봄 학기는 우리 중학교 학생은 모두 학교에 등교하는 대신, 일본 군수공장에 소집되어, 허드레 일을 하면서 "전쟁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8월에 들어서면서, 여름 방학인데도, "전시(戰時)"라고 하여 학교 근처 산 위에 소집되었다.

산 언덕에 구덩이를 파는 일을 시작하였다. 우리 중학생들 키만 한 150cm의 깊이로 구덩이를 파면, 소련의 붉은 전차들이 처 들어오다가 빠져서 움직일 수 없게 되면, 일본 군인들이 소련 전차들을 폭파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애들은 그 말을 들으면서 심각하게 듣는 것 같지 않았다. 일본인 담임선생님들은 심각하게 소리 지르고 있는데 학생들은 모두 싱글벙글 비웃으면서 "빙정대는" 꼬락서니였다. 20 명가량의 우리 반 아이들이 구덩이 4개를 맡아 파기 시작했다. 한 주일이 지나도 한 팀이 구덩이 한 개도 파지 못한 상태에서 8월 15일이 되었다.

그날은 구덩이 파는 일을 독려하던 선생님들이 정신을 딴데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학생들이 파는 구덩이에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다가 12시 정오되기 5분 전 쯤엔가, 구덩이 파는 작업을 중지시키고, 3학년 모두 집합시키고, 구덩이 앞에 정렬시켰다.

12시 시보(時報)와 함께 우리 학생 모두는 선생님 구령으로 "차려"자세를 취했다. "천황폐하시다. 경례!!"라는 선생님의 구호에 맞추어 우리는 모두 배운대로허리를 90도 깊이 굽히고 있었다. "바로!!" 우리는 허리를 펴고, 선생님이 들고 있는 단파 라디오에 귀를 기우렸다.

라디오에서는 어떤 시골 할아버지의 감기 걸린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한마디로 일본이 이른바 "대동아 전쟁" (제2차세계대전)에서 미국에 항복했다."는 소리였다. 일본인 선생들이 훌쩍훌쩍 울음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나의 일본인 동기생들은 소리 내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무서웠다. 그리고 일본애들처럼 눈물이 나지를 않았다. 눈물이 나지 않아 우는 척이라도 안 하면, 일본 애들한테 햇꼬지를 당할텐데 하면서도 눈물은커녕, 나는 만세를 불으고 싶었다. 항일 기독교 망명 전도사의 아들로, 조선의 아들로, 이제 우리는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이 되고 독립된 자랑스런 대한의 아들이 되는구나...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일본인 선생이 눈물 섞인 맥빠진 음성으로 "사요나라!!! 일본에서 다시 보자..."란 말이 떨어지자 마자, 나는 걸음아 날 살려라, 달려서 산에서 내려 왔다. 바로 산 언덕 밑의 우리 집 문앞에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서 계셨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이 중학생 아들을 붙뜰고 "우린 이제 해방이야. 어서 짐 싸 가지고 우리 고향으로 돌아 가야지...."

아버지가 말씀하신 "고향"은 내가 태어난 평안북도, 지금의 자강도(慈江道), (우리 어머니가 태어난 자성이라는 고장 이름과 아버지가 태어난 강계읍 이름을 따서 김일성 북조선 공산정부가 새로 만든 도의)의 도청소재지 강계였다. 아버지는 강계지방의 장로교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으시고 강계 보다 더 동북 쪽에 위치한 후창(厚昌)이라는 곳에서 하나밖에 없는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셨다. 나는 자강도에서 하나 밖에 없는 공립 중학교에 전학하였다.

우리는 북조선에 고향이라고 자리를 잡기도 전에, 북위 38도 선으로, 남조선과 북조선이 분단됐다는 소식을, 남의 일처럼 듣고 있었다. 그리고 38도선 북쪽에는 소련군이 점령하고,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소련군이 북조선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과 일본 사람들을 모두 일본으로 추방하고, 남조선의 일본군과 일본인들을 일본으로 추방하게 되면, 조선은 하나로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독립국가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해방된 독립국가 조선"은 허황된 꿈이고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독립투사 김일성이라는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평양에 나타나, 북조선을 공산주의 나라로 만든다고 나서면서, 토지개혁을 해서 지주들의 땅을 뺏아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악질지주"들은 인민재판을 해서 마을어구에서 동네사람들의 직결 처형을 하기 시작했다. 교회 목사님들과 땅 마지기나 있던 장로님들이 야밤도주해서 38선을 넘어 남조선으로 도망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김일성 정부는 기독교 목사들과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신론자들이고 하나님을 믿지도 않거니와 두려워하지도 않는 반기독교라고 설교하는 목사들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김일성 공산정부는 사사건건 교회가 하는 일을 감시하고 목사들을 탄압하기 시작하고, 때로는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다. 우리 목사 아버지 교회 교인들은, 어서 속히 시골을 떠나 38선을 넘어 서울로 피신하라고 밤마다 찾아와 아버지를 설득하고 있었다.

강계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오자마자, 목사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야밤도주 하다시피 집을 나와 버스와 기차로 2일 걸리는 거리를 며칠에 걸쳐 평양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평양에서 교회일을 보다가 기회가 생길 때 다시 38선을 넘어 서울로 월남(越南), 오새말로 탈북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평양의 새 교회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목사 아버지는 무신론자 공산주의는 곧 망할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미군이 곧 공산주의 북한을 정복하고 우리 나라가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라고, 이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자는 설교만 하고 계셨다. 그리고 나는 평양에 남아 있는 장로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성경과 영어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목사 아버지의 그 무서운 설교를 들으면서 가슴이 떨렸다. 너무 희망찬 이야기여서 좋았다. 그러면서 무섭고 떨렸다. 공산당 보안서 경찰이, 일제 강점기 때 일본 형사들처럼, 목사 아버지의 언동을 지켜보고 있얼 텐데, 일제 때 일본 경찰에게 당하신 것처럼, 이제는 같은 조선말을 하는 공산당 보안서 경찰의 감시를 받을 게 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그날은 주일 아침이었다. 아버지는 주일날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헐레벌떡 교회 옆의 목사 사택으로 뛰어 들어오시면서, "라디오를 틀어, 어서..."하시는 것이었다. 라디오에서는 북조선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쳐들어오는 남조선의 이승만 군대를 물리치고 서울을 향해서 진격하고 있다고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날, 그 주일날, 아버지의 11시 예배 설교는 확신에 찬 "해방과 독립"의 설교였다. 김일성의 인민군이 뭘 모르고, 미군이 얼마나 센지, 남조선의 국군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고, 쳐 내려갔으니, 얼마 안 가서, 인민군은 몰살하고 공산당은 패망하고 통일이 될 것이라는 희망찬 설교였다. 나는 뒷자리에 앉아 벌벌 떨면서, "저러시면 안 되는데..."하면서 뒤만 두리번거리며 가슴을 조이고 있었다.

주일 예배가 끝나자 목사 사택으로 돌아오신 목사 아버지는 목사관 사무실 마루를 뜯고, 마루 아래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대 갈 나이가 됐다고 우리 나이로 20살 된 나는 사무실 마루 밑의 구덩이에 들어가 숨어 있게 하셨다.

다음날부터 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소식은 내가 다니던 장로회 평양신학교 교장님이시던 이성휘 박사님이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신학교 영어 강사로 수고하시던 감리교 성화신학교 박대선 목사님 가족 역시 행방이 모연해졌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버지 사무실 마루 밑에 숨어 들어간 지 한 달이 못되어 목사 아버지 역시 교인 가정 심방에 나가셨다가 밤이 늦도록 귀가하지 못하셨다. 행방불명이 되셨다는 것이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 난 해 8.15에는 정말 "진짜"해방이 온다고, 그날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자던 목사 아버지는 다시 나타나시지 않았다. "진짜 해방"은 커녕, 평양 시내와 공장지대와 군 기지에는 매일 같이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가 벌떼같이 나타나 하루 종일 폭탄을 퍼붓고 사라지곤 하였다. 평양 남쪽 대동강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우리 아버지 교회 언덕에 서서, 불바다가 돼 버린 평양 시내를 바라보며, 행방불명된 목사 아버지는 괜챦은 곳에 잡혀 계시겠지 하고 멍청히 서 있다가, 그만, 순찰중이던 인민군에게 붙들려 심문을 받고, 곧장 인민군 징집 장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신체검사 장소라고 하는 시내 어떤 학교 건물에 끌려 갔다. 긴 줄에 서서 기다리다가, 흰 가운을 입은 군의관이 혼자 앉아 있는 신체검사장에 들어 갔다. 그런데 인민군 군의관이 틀림 없는데, 내가 심한 기관지염을 앓고 있다고 했다. 나는 얼떨결에 아니라고 했지만, 인민군 군의관은 "자넨 군대 갈 형편이 아니야. 여기 신체검사 불합격증을 떼어 줄테니 여기서 나가, 집으로 가!!"

나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신체검사장에서 나와 신체검사를 기다리고 있는 기나긴 줄을 뒤로하고 집을 향해 나오는데, "형? 형 아니야?"하는 소리에 뒤돌아봤다. 놀랍게도 내 바로 밑의 17살 난 동생이 서 있었다. 나는 신체검사불합격증을 보여 주면서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형은 군대 가면 안 되지. 내가 대신 갔다 올게..." 동생은 내가 붙잡은 손을 뿌리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오늘까지 생사를 모르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아버지가 교회 사무실 마루 밑에 땀흘려 파주신 구덩이 속에 피신했다. 그리고 그속에서,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인천 앞바다에서 상륙작전에 성공하고, 인민군을 물리치면서 서울을 탈환했다는 "승전보"을 듣고 있었다. 그것이 9월 중순이었고, 10월 초에는 맥아더 장군이 이승만 남한 대통령과 함께 평양을 탈환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평양 시청 앞에 미군과 우리 남한 국군의 평양 입성을 환영하는 시민대회에 어설프게 그린 미국 성조기와 대한민국의 태극기를 들고 모두 뛰어 나가는 동안, 우리 목사 아버지 교회의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이 평양 곳 곳에 다니면서 행방불명된 목사님을 찾기 시작했다. 한 주일을 그렇게 헤매고 다니면서, 미군과 국군의 공격을 받고 도망가던 인민군이 죄 없는 수 많은, 양민들을 학살하고 간 시체를 만났다.

대동강 하류 강 언덕에서 목사 아버지의 시체를 찾았다는 전갈을 받고 달려가

온 몸과 얼굴에 인민군 따발총 자국으로 피투성이 되어 누어있는 아버지를 부등켜 안았다. 아버지는 다른 목사님들로 보이는 네(4)분과 함께 밧줄로 결박되어 있었다. 소리 내서 울고 싶었지만, 눈물 대신 알 수 없는 분노만 치밀어 올라왔다. 아버지 얼굴의 핏자국을 흠쳐 드리면서, "아버지, 이 원수를 갚아 드리겠습니다."

아버지 교회 뒷산, 멀리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아버지의 제자 벌 되는 문창권 목사님의 주례로 장레식을 올리고 묻어 드렸다. 그리고 중국 공산군이 쳐내려온다는 소식과 함께 미군과 국군이 평양을 포기하고 남으로 철수하는 화물차 꼭대기에 올라타고 38선을 넘어 "월남," "탈북"하는 전쟁 피란민 신세가 되었다.

화물차가 달리다가 멎으면 내려서 걷기도 하고, 다시 타기도 하면서 며칠을 걸렸는지 기진맥진, 허기가 져서 더 이상 살아 남을 것 같지 않은 자포자기 상태에서 38선을 넘어 겨우 서울역에 도착했다. 피난민들이 서울 시내 영락교회를 찾아가면 살 수 있다고 달려가고 있었다. 나도 그 일행에 간신히 섞여 있었다.

서울 영락교회 좁은 뜰안에는 전쟁 피난민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고 있었다. 교회 안에 설치된 광고판에는 이산가족들 찾는 쪽지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거기에서 남과 북의 교회 순교자 가족들을 찾는 쪽지를 찾아냈다. 한국에 선교사로 와 있다가 심사참배 문제로 한국을 떠나 갔거나 일본정부에 의해서 추방당했던 미국 선교사들이 미군 군목으로 일하면서, 순교자 유가족들을 서울에서 부산으로 운송하고 돌본다는 것이었다. 나는 평양에서 가까이 지내던 평양신학교 선배동창이며 유명한 아동문학가 안성진 목사님의 도움으로 평양의 순교자 목사 서용문 목사의 아들이라는 소개로, 미군 군목 선교사가 마련한 화물차를 타고 부산역까지 무사하게, 아니 너무도 평안하게, 미국 빵에 쵸콜렛 선물까지 받아먹으면서 즐겁게 기차여행을 했다.

부산 피란지에 모인 탈북민, 피란민들이 제주도로 다시 배를 타고 피란길에 올을 때, 나는 부산항에서 대한민국 해군 소년통신병 모집광고를 보고, 응시했다. 서울의 모모한 중학교 재학생이니 졸업생, 서울대학교를 다니다가 625로 피난 내려 온 친구들 틈에 끼어 5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군 함정을 타고 진해로 가서 6개월 동안의 고된 신병 훈련과 통신학교 훈련 교육을 받고 해군 통신학교 교관 조교로 임명되었다. 해군 통신학교 교관 조교로 임명된 친구로는 나중에 연세대학교 한국교회사 교수가 된 민경배 박사가 나와 같은 군대 막사에서 지낸, 군대 전우이며 평생 친구가 되었다.

나에게 해군 통신학교 조교생활은 평안했고 즐겁기까지 했다. 평양 철수의 복새통에서 서로 떨어지게 된 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구사일생으로 부산으로 피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감리교의 지원으로 순교자 유가족을 물신양면으로 지원하고 주택까지 마련하고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부산시내의 "미실회" 신세를 지게 되 것은 너무나 다행스러운 것이었다.

나에게 더 큰 행운이 온 것은, 진해 해군 통신학교에서 조교로 일한지 2년도 못되어, 38선에서는 우리 국군과 미군이 중공군과 인민군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가, 휴전이니 종전이니 하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나는 미국 해군의 하사관 학교에 유학하는 시험을 치르고 합격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해군 수병의 흰색 정복을 입고 여권도 비자도 없이, 부산 수영 공군기지에서 풀로펠라의 Northwest Airline 항공기에 올라타고 괌과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해군기지에 도착하여 하루밤을 자고, 샌프란시스코 기차역에서 미 대륙 횡단 기차에 올라 쉬카고를 거쳐 미국 동해안 남부에 위치한 해군 기지 종합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두달 동안의 미 해군 첨단 무기에 대한 교육 훈련을 받고, 다시 부산 수영 비행장으로 귀국하면서, 6.25 전쟁을 잠시? "쉬게" 되었다는 휴전협정을 38선 판문점에서 미국 (유엔군)과 중공군, 그리고 북조선 인민군 대표들이 발표했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에 반대하여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진해 해군기지에 위치한 해군종합학교 교관으로 전보되어 미국에서 배워온 신예 무기에 대한 교육 훈련과, 첨단 무기 교재 번역 등 일로 바쁘게 지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진해 중심가에 위치한 장로교회에 출석하면서, 주일학교 선생으로 어린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과 교회 성가대 대원으로 교회를 섬기는 일에 정성을 다할 수 있었다.

미국 해군 종합학교에서 만난 미국 친구가 교육 훈련이 끝난 날 저녁, 이별의 만찬 석상에서 나를 미국 대학에 입학시키겠다고 약속한 것을 잊지 않고, 나는 미국 대학 입학준비를 위해서 열심히 영어 공부와 문교부와 외무부 유학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 미 해군 친구, 자기는 중학교 중퇴자라고 하면서도, 나를 꼭 미국 서부 시골, 카우보이 동네에 있는 기독교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그 대학의 입학허가서와 재정보증서까지 마련해서 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다.

휴정협정이 체결되고, 남과 북을 갈라 놓았던 38선이 "휴전선"으로 바꾸어 지는 1953년 7월 27일, 내가 미 해군 종합학교에서의 교육 훈련을 마치고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귀국한 날부터 3년이 넘도록 미 해군 친구의 편지를 고대하고 있었다. 중학교도 못 나온 친구가 무슨, 내 대학 교육을 위해 어떻게 내기 어려운 대학 입학 허가서니 재정보증서를 마련할 수 있으랴 생각하며 거의 단념하고 있던 참에ㅡㅡ모든 서류가 완벽하게 진해 해군 종합학교 주소로 무사히 도착하였다. 1956년 봄이었던가? 나는 조용히 서울로 상경해서 문교부와 외무부 유학시험에 응시했고, 1차에 모두 합격했고, 해군본부를 찾아 가, 명예제대 수속을 밟았고, 외무부에서 무난히 유학생 여권을 발급 받고, 그길로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유학생 F비자 신청을 했다. 대한민국 해군 하얀 세일러 복을 입고 미국 영사를 만나러 간 나에게 몇마디 질문을 던지고는 곧바로 그 받기 어렵다던 미국 입국사증을 내 여권에 부착해 주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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