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복음의 빚진 자로 살아가기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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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요나서 4장 5-11절, 시편 67편 1-7절, 로마서 1장 14-17절

설교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언제 어디서든 우리가 믿고 따르는 신앙을 선포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앗이 싹을 틔울 무렵 유대교와 로마제국은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진리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착하게 살아도, 사회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미신을 전파하며 남녀노소가 모여 사람의 피를 먹는다는 누명을 씌워 고문을 하고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AD 177년경, 프랑스의 리옹(Lyon)과 오스트리아의 빈(Vienne) 지역에서도 심한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코로나 시대 아시아계 사람들이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인종차별에 의한 묻지마 폭행에 시달리는 것처럼, 로마 지배자들의 선동으로 무지한 대중의 혐오 감정이 당시 소수자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향했습니다. 폭도들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과 거리로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을 붙들어 소란을 피웠고, 관원은 그리스도인들만 붙잡아 심문하면서,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은 용서해주고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은 목을 베어 죽이거나 짐승에게 던져버리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도 않은 일들을 심문하면서 가혹행위를 일삼았는데, 이것을 끝까지 견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빈 출신의 교회지도자 상투스(Sanctus)였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Quod tibi nomen est?)라는 질문에 상투스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Christianus sum)."라고 답하고, 네 출신이 어디냐는 질문에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어느 민족인지, 자유인인지, 노예인지를 물었을 때도, 그는 줄곧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일관되게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분노한 집정관과 관원들이 뜨겁게 달아오른 쇠 철판으로 그의 몸 예민한 부분들에 갖다 대었고, 그 때마다 살갗이 타들어갔는데도 그는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몸은 온갖 상처와 화상으로 부풀어 오르고,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도 그의 신앙고백은 여전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Christianus sum)."

이렇게 순교를 한 상투스에게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의미였을까요? 21세기 한국에서는 이런 비상식적인 박해와 특정 종교인에 대한 인권 유린이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 타락과 세속적 욕망, 배타적 태도, 무례한 복음 전파, 시대에 뒤처진 행태들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경멸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온 세상이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 하는 이 때, 계속해서 교회발 코로나 집단 감염이 발생하면서 교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의심과 혐오의 눈초리를 받은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과연 오늘의 시대에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그리스도인의 삶의 구성 요소: 세례, 성찬, 성경, 기도]

영국 국영방송 BBC의 한 다큐멘터리에서 지난 100년 이후 가장 탁월한 신학자이자 교회 지도자라고 소개한 로완 윌리암스 켄터베리 주교가 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Being Christia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 4가지를 말합니다. 세례와 성찬식, 성경과 기도입니다. 세례는 초기 교회가 구성원을 받아들이는 예식으로 세례요한으로부터 차용했던 예식입니다. 물속에 푹 잠기는 세례 예식을 통해 우리는 세상적인 삶에서 떠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납니다. 세례를 통해 자신의 욕망과 생각을 중심으로 지냈던 과거의 삶과 이별하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는 삶으로 거듭납니다. 세례 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불의하고 불평등한 세상을 향해 정의와 자유를 향한 목소리를 냅니다. 인간 사회 속에 하나님의 질서가 스며들도록 애쓰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이제 성찬식 즉 예배와 말씀과 기도를 통해 더 확고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갖추어 갑니다. 성경에는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더불어 울고 웃고, 기적을 체험하고 삶의 의미를 느꼈던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머릿속 상상이 아닌 치열한 삶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뜻을 붙들었던 이들, 주님의 계명대로 살기 위해 씨름하고 애썼던 이들의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지금 우리 자신의 신앙을 성찰합니다.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 사도의 용기와 능력을 보면서 환란 속에서 불안으로 헤매고 있는 우리 자신을 살피며, 풍랑이 거셀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쓰러지고 넘어졌던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는 동병상련의 아픔과 더불어 동시에 위로도 받습니다. 말씀 읽기가 깊어지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하여 훨씬 더 잘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깊게 읽을 때에만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지금 당장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도 될 일을 구분하게 됩니다. 말씀은 우리 마음을 들추어내고, 우리의 뼈 속까지도 드러냅니다. 말씀으로 나를 비출 때, 내 모든 것이 훤하게 보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는 사람만이 교만에 떨어지지 않고, 두려움에 휩쓸리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식탁, 성찬을 통해 우리가 귀하게 여김을 받는 손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서로를 초대하며, 그렇게 우리가 환영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함께 공동 식사를 함으로써 신앙 가족 안에서 사랑의 참 맛, 삶의 풍요함을 누리게 됩니다. 지난 창립기념 주일에 함께 나눈 가정 간편식을 통해서도 여러분은 작은 기쁨을 누렸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활 후 예수님은 낙망하고 실망했던 제자들, 하나님 나라의 기대와 비전을 포기하고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간 이들을 찾으셔서 식탁을 차려 주시고 "와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을 마주하면서 우리 모두는 새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비전을 다시 회복합니다. 더불어 우리 앞에 놓인 빵과 포도주를 보면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며 귀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식탁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수고가 있었는지도 기억합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들과 사건 배후에 계신 주님의 깊은 뜻도 알게 됩니다.

기도란 바로 그렇게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 향하여 주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우리의 이기적인 생각과 이상과 희망을 주님의 사역과 일치시켜가는 힘겨운 과정의 첫 걸음입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땀이 핏방울처럼 되기까지 기도하셨던 예수님,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맡겼던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이 기도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보여 주셨던 인간적인 연약함과 두려움, 그리고 간절함을 함께 느끼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주님 예수와 연결되고, 거룩한 하나님과 만납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를 통해 기도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관계가 치유되고, 내 맘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감정의 앙금이 사라집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말씀과 성찬과 기도를 통해 지속적으로 성숙하고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요나]

오늘 우리는 함께 읽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말씀을 통해 두 명의 주인공을 만납니다. 한 명은 요나요, 또 한 명은 바울입니다. 요나와 바울은 동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모두 이방인들에 대하여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전하라는 것입니다. 한 명은 주님의 명령에 거역하고 도망쳤다가 끝내 붙잡혀 왔지만 아직도 주님께 마음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한 명은 주님께 붙들려 완전히 새로운 길을 걷게 됩니다. 예언자라고 불리는 요나는 투덜이가 되어 하나님께도 화를 벌컥 내지만, 당대 최고의 지식과 혈통을 가졌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요나는 자신이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박넝쿨 하나 때문에 짜증을 내면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난하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보여도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진 부요한 사람이 되어 모든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정반대의 행동을 한 것일까요? 요나 입장에서 니느웨는 망해야 할 곳이었고, 망하면 좋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니느웨는 티그리스강 동쪽(오늘날 이라크의 모술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기원전 705년부터 681년까지 아시리아 제국을 통치했던 세나게립 왕의 멋진 수도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사르곤 2세는 722년부터 705년까지 통치하면서 721년에 북이스라엘을 약탈하여 완전히 황폐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세나게립 또한 701년 남유다도 침공합니다.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는 파괴되었으며, 그 주민들은 유배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따라서 유대 백성 요나의 자리에서 아시리아는 원수의 나라였고, 니느웨는 그 원수 나라의 핵심부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요나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요나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아마 우리도 같은 상황이었다면 요나와 비슷하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생각 너머에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예언자였지만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복수심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계속 고집을 부립니다. 요나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깨우쳐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내 자신의 고집과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정반대의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행동이 예언자라는 정체성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얼마든지 주님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인류의 역사와 그리스도교의 역사 속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많은 폭력과 저주와 전쟁의 역사들이 그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소수자들이나 무슬림들에게 욕설과 폭행을 일삼으며 혐오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또한 그 사례입니다. 자신이 중심이 될 때 우리는 자기도 속고 남도 속이다가, 하나님마저도 속이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 사도는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 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나,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빚을 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모든 이들에게 빚진 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기 때문에 바울은 교만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복음이 선포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해지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바울]

바울 사도는 두 가지 이유로 로마에 가고자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선물(신령한 은사)을 로마 교인들과 서로 나누어 서로가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예수를 따르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존재이지만, 그 놀라운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탐욕과 교만, 어리석음으로 주님의 형상을 가린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며 제 멋대로 굴러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과 적대적인 세상에서 박해를 받고, 상처를 입습니다. 정의는 때로 불의한 자들에 의해 모욕을 당합니다. 치고 박고 싸우는 세상에서 평화의 일군은 무력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고난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만날 때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마음, 영적 선물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합니다. 성도들의 모임은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한 준비처소이며, 지친 몸과 상한 마음을 다독이며 믿음을 굳세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영적 선물을 나눕니다. 자신의 의지나 뜻, 내적 성취나 자부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사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주신 선물로 나를 채우려면 우선 내 안의 더럽고 추한 것들을 비워야 합니다. 우리 존재는 자신을 비움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비운 존재로 남을 만납니다. 자신을 비운 대신 가득 채워 넘치는 거룩한 영을 나누며 서로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전하고 받는 자가 됩니다. 요나는 바로 이것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에 가려고 했던 두 번째 이유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답게 이방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여 열매를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그리스도 예수의 종(롬 1:1)으로 자리매김했기에 종으로서의 의무에 자신을 묶습니다. 그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소식, 세상을 구원하는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연거푸 길이 막혔지만, 그런 장벽과 어려움이 그의 의무와 삶의 의미를 막을 순 없습니다. 그는 복음 전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종교적 담장을 허물고, 철학과 문학을 꽃피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문명인과 배우지 못해 야만인으로 취급되던 비그리스인들 사이의 문화적인 장벽 또한 허뭅니다. 로마 시는 이것을 하기에 가장 적절한 도시였고,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에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는 온갖 정신과 종교가 모여든 시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갖가지 문화사조가 활개를 치고, 다양한 정치적 주장이 난무하고, 눈을 휘둥그레 만드는 환락의 서커스들이 매일같이 벌어지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곳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려고 합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Great boast and small roast.)는 속담도 있지만, 로마제국이나 오늘 시대나 모두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갈증이 나기 때문입니다.

'복음' 앞에서는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문명인이나 야만인이나 모두 굶주린 사람들일 뿐입니다. 문제는 진정한 복음의 실제 내용을 깊이 알아 전해 줄 자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복음에 빚진 자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신 예수를 전했습니다. 십자가형은 로마 제국이 시행하던 가장 끔직하고 혐오스러운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제국에 저항하는 반란자들을 철저하게 응징하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오늘날 귀걸이나 목걸이, 교회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서는 잘 느낄 수 없는 수치와 모욕, 공포의 상징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요,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고전 1:23). 유대 사람은 기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구했기에 십자가의 예수는 기적도 지혜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구원자라고 말하고, 그것이 복음(福音)이라고 외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능력은 어디에서 드러나는 것일까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기적과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여전히 부끄러움의 대상이거나 회피해야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건만, 많은 교인들은 영광을 얻기 바라고 십자가는 멀리 합니다.

우리가 세상이 추구하는 그 영광과 성공을 쫓는다면, 여전히 십자가는 우리에게 패배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세상을 바꾸는 것일까요? 제국을 꿈꾸며 모든 이들이 자신에게 굴복하기를 바라는 로마권력! 과연 그것이 세상을 더 좋게 변화시킬까요? 다른 나라와 민족을 착취해서 부를 누리는 맘몬의 세력이 과연 세상을 멋지게 가꿀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제국의 악을 폭로하며, 세속의 권력이 선전하는 지혜와 기적에 맞서 싸우며 자신을 내어놓는 십자가가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생명 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셨음을 믿고, 그래서 우리 또한 그 길을 가려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늘의 높은 자리를 내 것으로 삼지 않고, 낮은 이 땅으로 오신 예수께서 최종적으로 선택하신 자리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죽음마저 감당하려는 은총을 봅니다. 이제 우리 모두 복음에 빚진 자로 살아갑시다. 우리가 복음의 빚진 자로 살아갈 때, 우리 자신이 기쁜 소식이 될 것이고, 우리들에게도 늘 기쁜 소식이 들릴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 기도 : 낮은 곳으로 오신 하나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움으로써 거룩한 주님의 영을 채워 나갑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해 내 자신의 지평을 넘어서고, 내 능력의 한계를 돌파합니다. 나는 약하지만 주님은 강하시기에 우리는 함께 하늘나라의 문을 두드리며, 성령을 통해 함께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믿음으로 늘 서로를 격려하는 자 되게 하소서. 우리가 복음에 빚진 자로 살게 하소서. 주님께 받은 것을 모두에게 나누게 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지만 말고 우리 자신의 어깨에 걸머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전국으로 코로나 19가 재확산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은총을 누립니다. 영상으로 예배할 수 있는 것, 신앙 교육을 받고 우리들의 믿음을 성찰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고요히 집에 머무는 시간을 통해서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올 날들을 준비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지의 구름이 걷히고, 우리의 모든 이웃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과 예물을 드립니다. 꼭 필요한 곳에 써 주소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곳에, 생명을 살리고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곳에 쓰이게 하소서. 새 시대를 열어가는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우리 믿음이 굳세어지고 더욱 더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시다. 복음의 빚진 자로 살아 우리가 머무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피어나게 합시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친교가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거룩하게 살아가려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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