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Ad Fontes"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입력 Oct 25, 2021 08:19 A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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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44:1-6, 빌립보서 1:3-11, 요한계시록 2:1-5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기 원하고 사랑하기 원합니다. 사랑은 사람의 가장 깊은 본성이고 열망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을 잘 모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정호승 시인이 그것을 예리하게 짚었습니다. 오늘의 공동기도문 다시 읽어봅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모른다 / 자기 마음대로 사랑하고 / 사랑한다고 말한다 // 너는 어찌되든지 / 나만 사랑하고 / 사랑한다고 말한다 / 너는 무엇을 원하는지 / 너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 / 물어 보지도 않는다 / 그저 내가 원하는 것만 / 내 마음대로 네가 되는 것을 / 사랑이라고 말한다 // 사랑하다가 죽어야 하는데 / 너를 사랑하기 위해 /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이 / 사랑인 것을 알지 못한다 // 나를 살리는 것은 / 사랑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 너를 살리는 것이 사랑인 것을 알지 못한다 // 그러므로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그런데 사랑이 무엇인지 정말로 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사랑하다가 죽어버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130여 년 전, 언어도 다르고 음식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이 땅에 와서 이화학당을 세우고 보구녀관을 세운 선교사들이었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 그러니까 다음 주일은 134년 전 보구녀관에서 첫 진료가 시작된 날입니다. 널리 '보'(普), 구할 '구'(求), 여자 '녀'(女), 집 '관'(館), 즉 '널리 여성을 구하는 집'이라는 뜻의 보구녀관(普求女館)은 이 나라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입니다. 이화의료원의 전신입니다. 1885년에 선교사 알렌에 의해 첫 근대식 병원으로 '광혜원'(廣惠院,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 - 후에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이 바뀜)이 세워지고, 1887년에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튼에 의해 '시병원'(施病院, '널리 은덕을 베푸는 병원')이 세워졌으나, 가장 난감한 문제는 여성 진료였습니다. 조선에서는 신분의 벽보다 더 높은 것이 남녀가 한 자리에 있는 것을 금하는 '내외법'(內外法)이었습니다. 아무리 심각한 질병에 걸려도 조선의 여성들은 눈앞에 병원을 두고도 관습법에 발목 잡혀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치기 일쑤였습니다. 때로는 생명까지 위태로웠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이화학당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선교사는 "지구상에서 가장 절실하게 의사, 교사, 자금을 필요로 하는" 조선에 여의사를 파견을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2년 이상의 끈질긴 요청과 오랜 기다림 끝에 1887년 10월 28일에 의료 선교사 닥터 메타 하워드(Meta Howard)가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이 땅에 발을 들인 첫 서양 여의사였습니다. 서울 정동에 도착해 짐을 푼 지 사흘 만인 1887년 10월 31일부터 하워드 선교사는 시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메리 스크랜튼이 여성병원을 위해 따로 확보해둔 기와집 한 채를 개조해 다음 해 11월에 여성을 위한 단독 건물까지 마련했습니다. 재정과 운영의 독립까지 갖춘 명실상부한 여성 전용 병원이 이 땅에 탄생한 것입니다.

한옥으로 된 병원은 큰 기와집으로 지어진 이화학당과 잘 어울렸습니다. 하워드 선교사는 원래 있던 창문을 외국식 창문으로 바꿨습니다. 햇빛을 잘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침대가 춥다고 생각한 조선의 여성들을 위해 모든 방엔 온돌을 깔고 두꺼운 요와 누비이불을 갖추었습니다. 환자들이 채광 효과를 볼 수 있게 하면서도 여성들에게 따뜻함과 편안함을 안겨주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사랑하고 /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여성이 "무엇을 원하는지" 듣고 배려한 사람이었습니다. 조선 왕실은 고통받는 여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병원이 개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감사를 표하며 이 병원에 '보구녀관'(普求女館)이라는 이름을 지어 사액 현판에 담아 선물로 보내주었습니다. 하워드 선교사는 그 이름의 뜻을 "Salvation for All Women Institution", 즉 '모든 여인들을 구하는 집'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종교적 열정 하나에 몸을 실어 낯선 땅을 찾은 독신 여선교사들에게는 언제나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건강 문제였습니다. 낯선 기후와 환경은 물론이려니와 익숙하지 않은 음식에 적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풍토병은 피해갈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의사인 하워드도 건강 문제는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물밀 듯이 몰려드는 환자들을 홀로 진료하느라 자신의 건강을 돌볼 틈이 없었습니다. 2년간 진료한 환자만 8천 명에 달했습니다. 결국 1889년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말았습니다.

메타 하워드 선교사에 이어 보구녀관의 2대 원장으로 의료 선교사 닥터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가 내한했습니다. 로제타 선교사는 이후 43년이나 조선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의 인생 전부를 조선에 쏟아부었습니다. 덕분에 보구녀관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동대문부인병원을 거쳐 오늘의 이화의료원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로제타 선교사와 같은 분을 가진 것은 큰 복입니다. 그는 동양에 대한 서양인 특유의 문화적 편견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동양'이라는 이름 자체가 '문명'이나 '문화'와는 거리가 먼 '미개하고, 불결하고, 야만적이며,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되었습니다. 하지만 로제타 선교사는 달랐습니다. 한양도성에 들어선 첫날부터 조선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메리 스크랜튼이 마련한 선교부지의 조선 가옥에서 서양과 다른 가치를 발견하고 그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이화학당을 세운 메리 스크랜튼은 처음부터 조선인들에게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다가갔고 조선인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화학당을 조선식 기와집 학교로 설계하고, 보구녀관도, 여선교사 숙소도 모두 조선식 기와집으로 개조한 것은 조선인의 삶 속에 깊이 녹아들고자 한 노력이었습니다. 그가 조선인을 두고 "내 백성"이라고 고백한 것은 헛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화학당 여성 교육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한국 소녀들을 우리 외국 사람들의 생활, 의복, 환경에 맞도록 변화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드는 데 만족합니다. 우리는 한국적인 것에 긍지를 갖는 한국인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교휸을 통하여 완전무결한 한국인을 만들고자 희망합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사랑하고 /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너를 살리는 것이 사랑인 것"을 알았습니다. 로제타 선교사는 스크랜튼의 이 신념과 철학에 공감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조선에 '힘을 과시하는 종교'가 아니라 조선인에게 '힘이 되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로제타 선교사는 어릴 때부터 타인을 위해 봉사하며 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습니다.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유달리 강했던 부모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의 가정은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 집안이었고, 미국에서 제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나던 1840년대에 감리교인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로제타는 청교도 전통으로부터 근면과 정직과 경건을, 감리교 전통으로부터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조화롭게 배웠습니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퀘이커교도 친구들과 함께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The Underground Railroad)라는 비밀조직에 가입해 위험을 무릅쓰고 흑인 노예들의 탈출을 도우며 노예해방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로제타에겐 어릴 때부터 인종에 대한 편견이 없었습니다. 타민족에 대한 문화적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분이 이 땅에 선교사로 온 것은 이 나라와 이화에 참 큰 복입니다.

사실 로제타가 의료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그가 처음 마음에 품었던 나라는 조선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뉴욕 빈민가 무료 진료소에서 인턴 과정을 밟던 어느 날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에서 발행한 한 책자를 읽게 되었는데, 거기 있는 짧은 연설문 하나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미국 여성교육의 선구자 메리 라이언(Mary Lyon)의 글이었습니다. "진정 인류를 위해 봉사하려거든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하라." 어느 졸업식에서 한 명연설 중 한 구절이었습니다. 로제타는 이 짧은 문구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평생 이 말을 좌우명으로 간직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 세상에서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 조선이라는 미지의 나라로 가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조선에 와서 힘들 때마다 이 문구를 꺼내 들었습니다. "인류를 위해 봉사하려거든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곳에 가서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하라!" 그는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닌 '변방'에 그리고 '고통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여성들이 처음부터 보구녀관을 신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환자들은 서양 의사가 자신들을 독살시키려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약을 의사가 직접 먹어보라고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보구녀관에 대한 신뢰가 싹트기 시작한 계기는 우연히 찾아온 한 화상 환자를 치료한 일입니다. 혼기가 찬 16세 소녀가 먼 지방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의 손은 4년 전 입은 화상으로 손가락 세 개가 손바닥에 엉겨 붙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결혼하지 못했고, 가족들은 이를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로제타는 손가락을 손바닥에서 분리하고 환자의 팔에서 피부조직을 떼어 피부가 없는 부분을 덮는 자가 이식수술을 시도했습니다. 환자와 가족이 펄쩍 뛰었습니다. 조선에서 피부 이식은 안 될 일이었습니다. 로제타는 자신의 피부조직을 직접 떼어 소녀에게 이식했습니다. 다른 선교사들이 동참했습니다. 그제야 환자도, 그의 오빠도 자신의 피부를 내놓았습니다. 말끔하게 고쳐진 딸의 손을 보고 감동한 어머니는 혈서로 감사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일은 '미담'이 되어 빠르게 조선 사회에 퍼져나갔습니다. 대학교육을 받은 서양 의사가 생전 처음 보는 조선 소녀에게 피부를 이식한 일은 서열과 반상의 차별이 당연시되던 조선에선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로제타도 이때 세상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하고 보편적인 언어는 '사랑'이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남긴 그의 말입니다. "나는 지금 내가 전혀 모르는 언어를 쓰는 낯선 사람들에게로 가지만 '사랑은 보편적 언어'라 하였고, 나는 내 일을 사랑합니다."

로제타는 서울에서 만난 윌리엄 홀(William James Hall) 선교사와 1892년 결혼해 가정을 꾸렸습니다. 하지만 2년 뒤 남편은 평양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다 감염되어 사망했습니다. 로제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갓 돌이 지난 아들과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한 채 미국으로 귀국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을 떠나 있는 동안에도 조선을 위해 일했습니다. 조선을 떠날 때 박에스더 부부를 미국으로 함께 데려가 박에스더가 의학을 공부해 의사가 되도록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3년 후 로제타 선교사는 네 살과 세 살 된 두 아이를 데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989년 봄 평양으로 파견되어 우리나라 북부지역 첫 여성병원인 '광혜여원'(廣惠女院, '널리 은혜를 베푸는 여성병원')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어린 딸이 이질에 걸려 사망하는 또 한 번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는 남편과 딸을 조선에서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픔을 조선 여성을 치료하는 것으로 달랬습니다. 2년 후 로제타는 딸의 죽음을 기억하며 조선에 첫 어린이 단독 병원을 세웠습니다. 그는 "그저 내가 원하는 것만 / 내 마음대로 네가 되는 것을 /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너를 살리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보구녀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병원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학교이기도 했습니다. 1903년, 안식년 휴가에서 돌아오는 로제타 선교사가 보구녀관에 큰 선물을 안겼습니다. 바로 간호 선교사 마가렛 에드먼즈(Margaret J. Edmunds)와 동행한 것입니다. 애드먼즈 선교사는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간호사 양성을 맡아줄 간호원장을 애타게 기다린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여 무려 6개월의 여정을 거쳐 이 나라에 왔습니다. 그는 '간호원'이라는 용어를 처음 탄생시킨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당시 한국에는 "nurse"를 부르는 명확한 호칭이 없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른 '간호부'라 번역했습니다. '간호'(看護)에 여성을 뜻하는 글자인 '부'(婦)를 붙여, 처음부터 여성의 직업으로 한정시켰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를 '호병인'(護病人, 병자를 돌보는 사람) 혹은 역시 여성을 뜻하는 '부'(婦) 자를 붙여 '간부'(看婦)라 불렀습니다. 일본의 '간호부'는 국가에 충성하고 남성을 지근거리에서 보조하는 부수적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애드먼즈 선교사는 "nurse"를 '간호원'이라 번역했습니다. 여자 '부'(婦)가 아니라 '구성원'(a member)이라는 뜻의 '원'(員)을 붙여 '간호원'이라 불렀습니다. 간호원은 남성과 여성 모두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즉 여성을 남성과 똑같은 사회의 일원으로 존중한다는 뜻이 이에 담겨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기독교 신앙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실천한 간호는 사람의 몸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고린도전서 3:16)으로 보고 인류 보편의 가치로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기 위한 신앙적 계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일본 정부에 의해 조선에 강제로 이식된 일본식 간호와는 완전히 성격이 달랐습니다. 일본에서 이식된 간호는 국가주의 체제와 결합한 형태였습니다. 일본은 국민의 생명조차 국가의 통제 대상으로 삼고 의료 기술도 제국주의 확장의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일본식 간호가 배타적 민족주의에 봉사했다면, 조선의 선교사들은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넘어선 기독교적 휴머니즘을 추구했습니다. 보구녀관의 선교사들은 "그저 내가 원하는 것만 / 내 마음대로 네가 되는 것을 /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살리는 것은 / 사랑이 아닌 것을... 너를 살리는 것이 사랑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이 참사랑의 마음이 이 나라 간호역사의 뿌리입니다.

1906년, 우리나라의 가장 큰 명절인 설날(1월 25일)에 보구녀관에서 첫 '예모식'(禮帽式, capping ceremony)이 열렸습니다. 일정 단계의 교육과정을 완수한 수련생들에게 간호모를 수여하는 의식으로 '가관식'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이날의 주인공은 이그레이스와 김마리아였습니다. 이그레이스의 본명은 '복업'입니다. 그는 다리에 장애를 가진 노비 소녀였습니다. 뼈가 괴사해 더 이상 거동하지 못하게 되자 주인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김마르다는 의처증에 사로잡힌 남편에게 코와 오른손 손가락이 잘려나갔고 아이들마저 모두 빼앗긴 채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둘 다 가족도, 돌아갈 곳도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이 1906년 1월 25일 설날에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머리에 '관'을 썼습니다. 유교를 숭상하던 한국에서 '관(갓)'은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오직 남성들에게만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한국 여성들도 머리에 관을 쓸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여성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세계를 위해 공공의 가치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이 열린 것입니다.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이었던 김점동(박에스더)은 로제타 선교사를 따라 미국에 건너갔습니다.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1900년에 귀국했습니다. 그는 남녀를 통틀어 근대 의학을 공부한 조선의 첫 의사라는 역사적 영예를 얻었습니다. 서재필이 1893년 미국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나 미국인으로 귀화한 후 한국에서는 의료 활동을 하지 않았으므로, 한국에서 활동한 정식 면허를 지닌 한국인 최초의 의사는 박에스더입니다. 사람들은 박에스더가 이 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고 하니 영광으로 생각하지만, 당시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천하게 여기는 직업을 택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선의 전통적인 인습은 환자들의 피고름을 만지고, 여자이면서 남성의 몸을 만져야 하는 의녀들을 기녀와 동일시하면서 병원 일을 몹시 천하고 부끄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예수님 때문에" 이 모든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제게 어떠한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이 이 세상에 어떻게 오셨는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어떻게 치료하셨는지를 생각하며 제가 해야만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적었습니다.

박에스더가 보구녀관에서 처음으로 개복수술을 했을 때 '귀신의 재주를 가졌다'는 세간의 평판을 얻었지만, 그는 가마가 못 들어가는 척박한 지역에까지 소나 말을 타고 다니며 무료 진료를 다녔습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곳 어디나 찾아가 사람들을 치료했습니다. 하지만 박에스더는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1910년 33살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박에스더의 죽음은 태어나면서부터 함께 생활한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모'라 부르며 가깝게 따랐던 박에스더의 죽음을 계기로 셔우드 홀(Sherwood Hall)은 "수많은 한국인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결핵을 막아내는 데 내 온 힘을 다 바치리라 결심"하고 폐결핵 전문 의사가 되었습니다. 조선에 결핵 요양원을 세우고 1932년에는 크리스마스실(Christmas Seal)을 최초로 발행해 그 수익금을 결핵 퇴치를 위해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의학의 빛이 된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는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너를 사랑하기 위해 /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이 / 사랑인 것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말로 "사랑하다가 죽어버"렸습니다.

오늘의 교독문 이사야 58장을 다시 읽어봅니다. 며칠을 이야기해도 모자랄, 한 세기 전 이 땅에서 일어난 놀라운 일을 짚어주시는 말씀 같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이 말씀은 꼭 134년 전 보구녀관에서부터 시작한 이화 의료선교의 역사와 그 위에 복을 내리신 하나님의 섭리를 압축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선교사들의 사랑과 헌신으로, 오늘 구약성서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의 후손에게 복을 부어 주셔서 오늘 우리가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하고 "존귀히 여김을 받"습니다.(이사야 44:1-6)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10월 31일 다음 주일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교회)개혁 기념주일이자 보구녀관이 시작된 날입니다. 종교개혁의 원리는 라틴어 "Ad Fontes"였습니다. '원천으로 돌아가라'(Back to the Foundations)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처음인 '성서'로 돌아갔습니다. "오직 성서"(Sola Scriptura), 바로 거기에서 부패한 교회를 개혁할 힘과 원리를 찾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보구녀관의 역사로 돌아가야 합니다. 보구녀관의 선교사들이 살았던 사랑의 정신, 널리 모든 사람을 구하는 사랑의 정신, 가장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가려고 했던 그 '처음 사랑'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이 '처음 사랑'의 마음을 잃어버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늘 요한계시록의 말씀에서 에베소 교회를 책망한 것 같이 우리를 책망하실지도 모릅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요한계시록 2:2-5)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자넷 랜드의 말처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을 보상받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정호승 시인이 다시 말합니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기도합시다. 오늘 신약서신의 말씀, 즉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축복의 기도로 기도를 대신합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여...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립보서 1:3-11) 아멘.

※ 오늘의 설교는 다음의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강애란, 『숭고-헤테로토피아 공간 : 보구녀관을 복원하다』 (gallery Simon, 2019).

이방원, 『(한국 의학의 빛이 된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이화여자대학교 출 판문화원, 2018)

이화여자대학교 이화간호과학연구소 기획, 이덕주 · 하의정 지음, 『이화간호교 육의 처음을 연 사람들, 마가렛 에드먼즈와 이정애』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문화원, 2019)

이화역사관 기획전시실, 「이화의 선구자 의사 박에스더」 (Special Exhibition in 2020).

오피니언

연재

종교비판에서 신앙성찰로(6):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통찰을 중심으로

"식전이나 식후 혹은 이기주의의 기도가 아니더라도 고통으로 가득찬 기도, 위안을 찾는 기도조차 응답해 줄 의무가 신에게 있는 것이고 그런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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