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종교개혁주일설교] 오징어 게임과 기독교 개혁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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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역대지상 9장 22-27절, 시편 112편 1-10절, 마가복음서 10장 41-46절

[일상의 회복을 준비하며]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역대기서는 역사서 중 하나입니다. 여호수아서부터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에 이르는 신명기 역사서가 남왕국 유다의 멸망이라는 큰 재난을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지은 죄를 회개하고 과거의 잘못을 극복할 수 있을지를 제시하려고 했다면, 역대기 역사서는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이 당면한 과제들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는 책입니다.

고향 땅으로 돌아온 소수의 유다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 예루살렘을 재건축해야했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새로운 국가를 다시 세워야 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오래전 앗시리아에게 점령을 당한 이후로 야훼 신앙이 매우 혼탁한 상태였고, 이스라엘 주변 세상은 바벨론 대신 세계의 패권을 쥐게 된 페르시아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역대기의 본문은 성전 문지기로 뽑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과거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맡았던 임무를 이어서 동서남북 사방에 배치되어 하나님의 성전을 빈틈없이 지키고, 아침이 되면 성전문을 여는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나라를 잃고 남의 땅에서 종살이를 했던 사람들이 다시 고향땅에 들어와 국가를 재건할 때, 이들이 가장 중요시 여겼던 것은 성전의 예배였습니다. 이것은 국가의 외형적 제도와 조직을 정비하는 것보다 먼저 야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신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할 수 있는 성전을 재건축하고 그것을 지키는 임무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지난 2년의 코로나 상황을 잘 극복하는 과정에 있고, 일상의 회복을 준비하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코로나 19는 이전에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변화를 가져왔고, 예전에 익숙하던 것을 전부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말로만 듣던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이 눈앞에 들이닥친 데다가, 함께 모여 대면하지 않고 가상 공간인 온라인상에서 만나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으로의 급격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고, 반면 새로운 기회를 얻어 뉴노멀의 시대에 주인공이 된 이들도 생겨났습니다. 이런 변화의 물결은 되돌릴 수 없고, 코로나 종식 이후에도 이미 바뀐 세상에 적응해야 하는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한편 한국개신교는 온라인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는가를 두고 한창 논란을 벌이며 좌충우돌하다가, 때때로 집단 감염의 진원지가 되기도 하면서 한층 더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내부에 있습니다. 주일성수하며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는 기존의 방식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자, 교인들의 신앙이 뿌리로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을 때 유대인들의 신앙이 근본에서부터 흔들렸던 것처럼, 기존의 예배 형식과 공간의 모임 없이 과연 개신교인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위에 올라오게 된 것입니다.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져 내렸을 때에도 여전히 신앙을 간직한 두 부류의 무리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바리새파 중심의 유대인들이었고, 또 하나는 새롭게 생겨나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성전이라는 공간에서의 제사 의식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일상의 삶에서 적용하는 것을 더 신앙의 본질로 여겼기에 자신들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하여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쳐가면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함께 모인 사람들끼리 한 마음이 되어 상부상조하며 성전의 빈자리를 메꿀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이 코로나 19 이전으로 회복되리라는 기대 속에서 많은 교회들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문제는 예전으로 돌아가든 돌아가지 않든 우리 모두가 정말로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밤낮으로 성전을 굳게 지키고 있는 문지기처럼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우리들의 삶의 자리를 예배의 자리로 만들 수 있느냐, 우리들의 신앙을 스스로 더 깊고 넓게 할 수 있느냐가 본질적인 과제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오늘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4주년이 되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본연의 임무를 잊은 채, 세속 권력에 눈이 멀고 온갖 탐욕에 물들었던 당시 교황과 주교, 사제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유럽 사회 전체를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그리스도교가 국가 사회 질서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전체 사회도 다양한 변화의 한 복판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전 세계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가치사슬이 변화하였고, 그래서 우리나라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우리 국민들은 지난 70년의 세월을 성실하게 인내하고 노력했습니다. 우리보다 앞선 나라들의 모든 장점을 흡수하려고 몸부림쳤고, 그런 가운데 우리 자신도 모르게 지금과 같은 성취를 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 왔던 것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의 눈에서 볼 때는 매우 존경할 만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되어 있습니다. 사회와 문화, 정치와 경제, 과학기술과 미래 산업에 있어서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시대 보건 강국, 디지털 강국으로 나서면서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하나의 모델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어떨까요? 지금의 한국 불교가 어떤지는 제가 잘 모르지만, 신라와 고려 시대에 우리 불교는 이미 세계적 지평을 달성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사회에서 유학자들은 중국 사람들보다도 주자의 성리학을 훨씬 깊게 이해하고 있었고, 유교의 상식들은 사회 전반에 걸쳐 사람들의 삶의 원리로 작동하였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이 땅에 들어온 지 136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놀라운 외적 성장을 하였지만 세계에 내 놓을 정신적 가치를 보여주느냐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예'라고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는 우리나라의 정신문화를 선도하는 개신교가 되기 위해 오늘 우리들은 어떤 것에 더 집중해야 할지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한국의 근현대를 이끈 개신교가 했던 역할들을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여러분도 함께 고민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과제들을 풀기 위해 종교개혁 당시의 상황을 되돌아보려고 합니다.

[종교개혁의 주요 원인과 오늘의 상황]

종교개혁이 발생하고 이것이 세계사적 변혁으로 진화될 수 있었던 것에는 교회 내적 원인과 외부 세계의 변화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먼저 외부적 변화를 보겠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계속되는 십자군 전쟁으로 지쳐 있었고, 흑사병의 창궐로 죽음이 만연하면서 내세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되어 있었습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기존의 신앙에 의지하면서 교회로 모여 들었지만, 전염병은 모인 사람들도 인해 더 큰 확산되고, 더 많은 피해가 생겨났습니다. 오늘날 급격한 사회 변화와 코로나 19로 인해 현대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을 겪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두고 불안을 겪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한편 과학의 발전과 신대륙의 발견으로 그동안 모든 삶의 기준과 의미를 제공했던 교회의 권위가 추락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설명되던 세상이 이제는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실험과 관찰, 논리적 설명에 의해서 더 잘 이해되는 세상이 되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앞에서 당장 보이는 실험의 결과들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즉 우리들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더 나은 삶의 의미를 주는 것에 신앙과 신학이 자연과학적 지식과 비전에 밀려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발전에 교회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과도 매우 유사합니다.

한편 중세 교회는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내세에 대한 불안감을 자극하면서 면벌부를 판매하고, 헌금을 유도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하며, 흑사병으로 인해 많은 사제들이 죽자, 신학적으로 무지하고, 목회를 하는 데는 형편없는 수준의 사람들이 마구 사제 직분을 얻게 되었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어떠한 성경적 근거 없이, 성직자들의 특권을 내세웠지만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과 질 낮은 신학적 수준은 교회에 대한 신뢰를 갈수록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중세 교회의 형편을 보면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과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개명한 시기에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주술적인 것에 묶어 두고, 하나님 믿는 것을 주식투자 하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악용하여 신도들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중세 못지않은 교회의 교권주의와 성직 매매와 교회 세습이 버젓이 일어납니다. 상식에 맞지 않는 재판이나 범죄가 은혜라는 이름으로 쉬쉬하고 덮어지며, 많은 목사들이 교회를 개인적 소유로 여기면서, 교회 재정이 불투명하게 그리고 함부로 사용됩니다. 목회자들의 도덕적 성적 타락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교회가 하나의 사업이나 회사 경영처럼 여겨지면서 하나님의 참된 뜻을 추구하고 찾아가는 신학은 갈수록 외면당하여, 목회자나 평신도의 신학적 수준은 낮아지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과 먼 것들이 교회활동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이 때문에 제2, 제3의 기독교 개혁이 필요하다는 소리가 계속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은 당시 중세 교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고, 그것이 어떻게 사회의 변혁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흔히 말하는 종교개혁의 3대 정신과 5대 강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삼대 정신은 루터가 외쳤던 것으로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입니다. 여기에 요한 깔뱅에 의해 '오직 그리스도'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덧붙여져서 5대 강령이 됩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성경'입니다.

그런데 오직 성경에 있어서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에 그 길을 열어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가톨릭의 성직자이자 인문주의자들의 왕자라고 불렸던 에라스무스입니다. 에라스무스는 서로마 가톨릭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한《우신예찬》(Moriae Encomium)이라는 책을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서사본들을 참고하여 로마 언어인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이 아니라 원래 성서의 문자였던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서를 출판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잘못된 성서 해석을 막고 모든 성서가 전 세계 여러 말로 제대로 번역되고, 시골 농부와 베 짜는 아낙네 그리고 여행객이 모두 성서를 잘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서 원본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정신은 고스란히 루터에게로 전승되었고, 루터는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합니다.

이제 자신들에게 익숙한 모국어로 성경을 읽게 된 사람들은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서구의 중세 시대에 평신도들은 교회가 전하는 말만 듣고 죽어서 저 세상에서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했습니다. 심지어 황제도 그러했습니다.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죽으면서 유언을 하나 남겼는데, 그의 시체를 몽둥이로 때리고 그의 이빨을 부수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만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교회가 면벌부를 팔아 돈을 거둘 수 있었던 까닭도 민중들이 내세의 심판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면벌부는 가난한 사람도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이 비싸지는 않았지만, 많이 구입할수록 효력이 크다는 선전 때문에 민중들은 안심할 수 없었고 이런 교회의 잘못된 선전선동에 놀아났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권능과 기적은 보이는 물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말씀을 통해 작동된다고 설교했습니다. 이제 중세 시대 사람들은 루터가 번역한 모국어 성경을 읽고 루터의 설교를 들으면서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스스로 성경을 읽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개인들은 교회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습니다. 주술적인 신앙을 떨쳐 버립니다. 진리 인식과 실천의 주체가 됩니다.

루터가 가톨릭의 심장부를 겨냥하면서 비판의 날선 검을 높이 들었을 때, 가톨릭은 그를 죽이지 않고 토론과 논쟁의 장으로 불러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공의회를 통한 신학 논쟁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학문의 자유를 인정한 당시 대학문화도 한 몫 했는데, 1517년에 95개조 반박문을 교회 정문에 붙이고 긴 투쟁에 들어간 루터를 위해 비텐베르크 대학은 학문적인 논쟁으로 교수가 불이익을 당할 수 없다는 공식 견해를 확인합니다. 종교개혁은 서구의 토론 문화에도 중요한 기여를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토론 문화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하며 자기를 발전시켜 나가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일방으로 들어야 하는 권위주의를 제거하고 한 사회의 관용의 능력을 키웁니다. 또한 상대를 설득하려면 정교하게 생각을 다듬어야하기 때문에, 토론 문화는 이론 발전에 기여하게 하고, 한 사회를 훨씬 더 성숙한 사회로 만들어 갑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해서 사유하고 실천하는 근대적 인간을 양성하고 이들에 의해 근대 사회가 열렸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근대적 인간을 더 깊은 영성의 사람으로 키워 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근대 사회가 또 다른 파국에 다다랐기 때문입니다. 현대에 접어들면서 자본에 근거한 물질문명의 폐해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이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을 넘어서 속 깊고 품 넓은 영성을 지닌 인간상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을 보면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주님을 믿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확고하고 두려움이 없다고 나옵니다. 믿음의 힘으로 불안을 극복했던 신앙인들은 합리적 이성을 가지고 더욱 단단하고 담대한 삶들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급격한 사회 변화는 이보다 더 깊은 진리 인식과 실천을 요구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섬기는 사람'의 탄생입니다. 대체적으로 대다수의 사람은 섬기는 것보다 섬김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남의 시중을 들기보다 남을 지배하면서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기를 좋아합니다. 자신의 손발로 일하기보다는 남이 해주는 것을 훨씬 더 편하게 여기고 그래서 기계도 만들고 로봇도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모두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것만이 세상을 구원하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도 이 땅에 온 목적이 바로 섬기기 위함이고 심지어 모든 사람의 행복과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주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따르는 우리들에게 매우 심각한 도전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를 따르면서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려면 깊은 영성과 넓은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스스로 씨름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남이 해 주는 말만 듣고 받아먹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제 스스로 질문을 하고, 몸을 던져 실천해 보아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과 제3의 종교개혁을 위한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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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넷플릭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넷플릭스에 오른 한국 드라마로 전 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오징어 게임에 대해서 여러분 모두 들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했던 다양한 놀이들이 등장하는 하나의 드라마가 한국 문화를 잘 모르는 전 세계의 인류들에게 공통적으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감성에 호소하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오징어 게임은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요?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제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면 스포일러가 되겠기에 제가 생각하는 몇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징어 게임을 저는 어렸을 때 오징어 가이센이라고 불렀습니다. 가이센(かいせん, 會戰)은 대규모 병력이 맞붙어 하는 "싸움"을 가리키는 일본어입니다. 오징어 포 모양의 그림을 땅바닥에 그려놓고 편을 나누어 공격과 방어를 하면서 하는 놀이입니다. 전쟁의 성격을 띤 이 놀이는 상대를 땅바닥에 넘어지게 해서 상대방의 숫자를 줄여야 유리하기 때문에 거친 몸싸움을 해야 합니다. 어릴 때 몸집이 작고 약했던 저는 별로 즐겨하지 않았습니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제목 자체가 거친 싸움을 통해 승패를 가리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자본주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서 실패하고 거의 삶의 희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상금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게임에 자발적으로 참여합니다. 여섯 개의 게임을 모두 통과하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금액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탈락자는 곧 죽음을 맞이합니다. 진행 요원들은 일말의 주저함이나 연민 없이 게임에서 진 사람들을 죽여 버립니다. 이런 장면들이 청중으로 하여금 충격을 느끼게 하는데, 이런 과도한 장면을 통해 지금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세상의 참혹함이 더욱 여실하게 드러납니다. 놀랍게도 상금은 죽은 자의 목숨 값이 합산 된 것입니다. 100명이 탈락하면 100억의 상금이 모이게 됩니다.

여섯가지 게임은 종류를 달리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경쟁의 양상들을 다 보여 줍니다. 힘이 세다고 해서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도 없고, 때로 믿었던 사람도 배신해야 합니다. 상금을 얻기 위해 게임이 시작되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쳐서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고 벌어집니다. 이 모두가 맘몬이 신이 된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의 구경거리라는 것입니다. 삶의 고통과 경쟁, 거기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모든 행태들은 누군가의 재미와 부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 또한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실제 상황들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에서도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신앙을 이용해 자기만 살겠다는 사람들로 그려지고, 거룩한 체 하면서 행했던 온갖 추악한 일들이 폭로됩니다. 그런데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경쟁, 오징어 게임의 우승자는 놀랍게도 경쟁의 순간에 일말의 양심을 지키려고 했고, 그 양심 때문에 흔들리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물론 이 사람이 경쟁에 이긴 후 거액의 상금을 타고도 상당한 시간 동안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만, 저는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한 감독이 이런 장면들을 통해 한편으로는 어딘가 남아 있을 우리들의 양심에 호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자본주의의 세상이 얼마나 참혹한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징어 게임은 우리들의 삶의 현실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러나 드라마틱하게 구성해 냄으로써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라면 누가 이런 현실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훈련이 필요하고 깊은 신앙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사람을 지금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외친 이후에, 아니 '우리가 신을 죽였다'라고 말한 이후에 신 없이 살아간 인류가 자본주의의 망령 속에서 당하고 있는 이 참혹한 현실을 구원할 사람은 바로 모두의 종이 되어 섬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섬김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며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섬김의 사람이 될 때, 루터의 종교개혁 못지않은 세상의 변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이중의 과제를 지닙니다. 주술과 마술에서 벗어나 합리적 이성을 갖추는 것, 그리고 합리적 이성마저 초월하는 영성을 지니는 것! 섬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영성을 갖춘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섬기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하나님 나라를 누리려는 사람들이고, 그렇게 하려면 저와 여러분 모두가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예수를 따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세상은 구원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의 길을 발견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섬기는 자가 되고 자발적으로 모든 이들을 섬길 수 있는 종의 능력을 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깊은 신앙의 차원까지 나아가게 하여 주소서. 경쟁 속에서 성취한 사람만 행복을 누리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행복을 누리는 세상을 꿈꾸며 늘 전진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 나라의 이상이 우리의 삶에서 실현되도록 오늘도 내일도 우리가 가야할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시고 좋으신 하나님! 말씀으로 생명의 세상을 창조하시고, 부활로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날에 우리를 한 자리에 불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 만나고자 나온 생명사랑 믿음의 식구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허락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 삶에 일렁이는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님의 평화와 위로가 우리를 감싸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 지금 이 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옵니다. 우리들의 삶과 생각과 진실한 마음을 드리려고 나옵니다. 우리가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그 사랑의 징표로 드리는 이 예물을 온전히 받아 주시옵소서. 가난으로 하루가 고단한 이들을 위로하시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함께 하여 주소서. 그 때 우리가 드린 예물을 사용하여 주소서. 우리가 온전히 주님만을 섬기고 맘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여 주소서. 생명이 온전히 주님께 달려 있음을 믿으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참된 신앙의 길을 갑시다. 우리 모두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쉼 없이 나아갑시다. 주님 만날 그날까지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맙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당신의 구원을 이뤄가실 것입니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친교가 새 시대에 새로운 신앙으로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려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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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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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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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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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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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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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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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