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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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신명기 33:13-16, 에베소서 4:1-6, 요한복음 15:5-7

미국의 대중음악 가수이자 인권, 평화운동의 기수인 밥 딜런(Bob Dylan)의 노래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g in the wind)이 구약성서의 예언자 에스겔의 노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에스겔 12:2) 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는 이 말씀에서 깊은 영감을 얻은 밥 딜런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길 걸어야 사람은 사람으로 불릴 수 있나? 얼마나 많은 바다를 날아야 흰 비둘기는 바닷가 모래밭에 편히 잠들 수 있나? 얼마나 많은 포탄이 하늘을 날아야 세상엔 영원한 평화가 올까? 얼마나 긴 세월을 살아야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나? 그 대답은, 내 친구여, 바람 속에 있다. 바람 속에 불고 있다." 1962년에 작곡된 이 곡은 2002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을 때 다시 전 세계에서 평화의 노래로 부활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때 다시 불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평소 밥 딜런의 노래를 좋아하던 로마가톨릭교회의 교종(敎宗, Pope) 요한 바오로 2세는 1997년에 그를 볼로냐로 초대해 30만 명의 이탈리아 청년 신자들 앞에서 이 노래를 청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직접 이 노래의 가사를 소개하면서 맨 끝 가사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뒤에 "of the Spirit"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그 대답은 바람 속에 불고 있다"를 "그 대답은 성령의 바람 속에 불고 있다"(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of the Spirit)로 재해석했습니다.

무리한 해석이 아니었습니다. 성서적 근거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바람은 성서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의 메타포입니다. 오늘의 교독문인 시편 104편만 보아도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을 자기 사신(使臣, messenger)으로 삼으[신다]"(2-4절)라고 했습니다. 시편 77편 기자는 "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다]"(18절)고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람 속에 말씀하십니다. 바람 속에서 조용히 속삭이시기도 하고 때론 천둥소리와 같이 크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밥 딜런에게 영감을 준 에스겔의 노래처럼 "그들은[우리는]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하지 않고 보지 '않는다' 했습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하지 않고 듣지 '않는다' 했습니다.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는 건 왜일까요? 왜 우리는 바람 속에 불고 있는 대답을 듣지 못할까요? 내 안에 다른 이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없어서일 겁니다. 내 안에 모든 걸 사랑하는 깊은 마음이 없어서일 겁니다. 사랑하면 듣게 됩니다. 사랑하면 보게 됩니다. 사랑하면 알게 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Fyodor M. Dostoevskii)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잎사귀를 사랑하라. / 모든 동물과 풀을 사랑하라. / 그 모든 것을 사랑하라. / 그대 앞에 떨어지는 / 한 가닥 빛줄기조차도. / 그대가 모든 것을 사랑하면 / 모든 것 속에 담긴 신비도 보리라. / 그대가 모든 것 속에 담긴 신비를 본다면 / 날마다 모든 것을 더 잘 이해하리라. / 마침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 그대 자신과 세상 전체를 사랑하리라."

오늘의 신약서신 말씀처럼,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십니다]."(에베소서 4:6)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15:28)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로새서 3:1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안'에도 계시며 만물을 위와 아래로 '통일'(하나 되게)하십니다. 그래서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 /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다"(<순수를 꿈꾸며 Auguries of Innocence>)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송이 피어난 꽃은 하나님의 현현(顯現)입니다. 한 포기 작은 풀은 만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現存)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5:5) "내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사랑 안에 거하[라]"(요한 15: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물 위에 또한 안에 계시는 그가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만물 안에 또한 위에 계시며 만물을 통일하시는 그 안에 거하면 만물이 나이고 만물이 너입니다.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 즉 만물이 하나요,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 즉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이 한 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만물과 삼라만상(參羅萬像)이 사랑 안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찍이 그리스도교의 교부(敎父, Church Father)들에게 자연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두 번째의 책'이었습니다. 물론 첫 번째의 책은 성서입니다. 성서는 '듣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했습니다. 인구 대부분이 문맹(文盲)이었던 고대 사회에서 성서는 읽기 위한 책이 아니라 듣기 위해 쓰인 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한 권의 책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자연(우주만물)이라는 책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로마서 1;20)라고 말했습니다. 만물(자연)은 그것을 창조하신 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거룩한 성품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것은 눈으로 '보는 말씀'입니다. 시편 19편 기자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穹蒼)이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노래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늘과 궁창만이 아닙니다. 한 송이 들꽃도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의 놀라운 창조의 사역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권의 책만 읽었습니다. 우리는 '듣는 말씀'(성서)에만 집중한 나머지 '보는 말씀'(자연)을 간과했습니다. 두 번째 책을 보고도 보지 않았습니다. 듣고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고 살았습니다. 기독교적 순명(順命)의 정신으로 산 천상병 시인이 어느 날 <서울의 소년소녀들에게> 들려주는 말입니다.

"얘들아 들어라 / 이 할아버지의 말을 들어라. / 지금은 12월 겨울이지만 / 이윽고 내일 / 봄이 온다. // 자연은 커다란 문을 열고 / 자연의 은혜를 / 활짝 열어줄 것이다. // 산이나 들에 / 꽃이 만발하고 / 싱싱한 나무가 너희들을 맞이할 것이다. // 자연의 은혜는 / 너무도 깊고 기쁘다. / 시골에 가서 / 그 자연의 은혜를 / 맛보아라."(<자연의 은혜 - 서울의 소년소녀들에게>) 오늘 우리 교회학교의 아이들은 바로 이 이 은혜를 맛보려고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사박물관인 이화의 자연사박물관의 전문가와 함께 지금 아름다운 이화동산에서 봄맞이 야외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나무의사' 우종영 선생이 들려주는, 유리나가빈이라는 사람이 쓴 『겨울 떡갈나무』라는 소설 이야기입니다. 어느 마을에 안나라는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학교에 부임한 지 2년밖에 안 되었으나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에겐 골칫덩이 학생이 한 명 있었습니다. 단골 지각생 서브시킨이라는 아이였습니다. 참다못한 선생님은 어느 날 아이를 서브스킨을 불러 지각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잘 모르겠어요. 저는 매일 한 시간 전에 집에서 나오거든요.' 그녀는 서브시킨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아이의 하굣길을 따라나섰습니다. 아이는 학교 뒷문에서 시작되는 오솔길로 선생님을 안내했습니다. 그 길은 주위가 온통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는 숲속이었습니다. 사람들 손길이 닿지 않는 그곳엔 새들이 재잘거리면서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고, 들판엔 토끼와 사슴 발자국이 찍혀 있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그 모든 것을 바라보던 안나 선생님은 숲의 고요함 속에 이루어지는 이 모든 일이 놀라워 숨도 쉴 수 없었습니다. 오솔길은 산사나무 주위를 휘돌며 이어져 있었고, 숲은 거기서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떡갈나무가 새하얀 옷을 입고 우뚝 서 있었습니다. 떡갈나무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작은 거울들로 반짝였는데, 그 맑은 거울 하나하나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걸 보고 안나 선생님은 나무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 선생님에게 아이는 나무 밑동을 파 살짝 고슴도치를 보여주기도 하고, 또 작은 굴속에 잠자고 있는 개구리, 투구벌레, 도마뱀, 무당벌레들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학교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그제서야 안나 선생님은 서브시킨에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멋진 산책을 시켜 줘서 정말 고맙구나. 앞으로 계속 이 길을 통해 학교를 다녀도 좋아요.'

생각해보면, 사람들 입에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 담긴 애틋한 이야기를 나누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지천에 피는 작고 하찮은 풀 한 포기까지 어느 하나 사연 없는 게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시어머니 심술에 굶어 죽은 며느리가 밥풀을 물고 있는 모양새로 다시 태어났다는 '며느리밥풀',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낸 뒤 바닷가만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서 죽은 붉은 꽃으로 피어났다는 '백일홍,' 추운 겨울 큰스님을 기다리다 얼어 죽은 동자승이 다시 태어났다는 '동자꽃'까지, 그 이야기는 참 다양했습니다. 누가 지어냈는지 모르나 그 하나하나엔 맑고 소박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관심이 없다면 아주 작고 볼품없는 꽃에 이르기까지 이런 이야기들이 생겨 날 리 없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한가롭게 그런 이야기를 할 시간이 어디 있냐고 따집니다. 아마도 그것은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뜻일 것입니다. 조금씩 나무와 풀과 꽃에서 멀어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런 모습 속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갈수록 각박하고 황량해지는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요. 인간의 영혼이 갈수록 메말라 가는 이유가 자연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답답하고 비좁은 신학 때문이라고 말하면 과도한 것일까요.

전 세계 3억 정교회(正敎會, Orthodox Church) 신자의 지도자인 바르톨로메오스(Bartholomew) 세계총대주교가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녹색 대주교'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자연 사랑 정신이 투철한 바르톨로메오스 주교는 지금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환경위기의 본질은 영적 위기임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구를 창조주 하느님의 선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지구를 무신론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예배하는 그리스도인 중에도 자연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사실상 무신론자라는 비판이었습니다. 산천초목 땅과 하늘을 개인의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소중한 보물 혹은 거룩한 선물로 볼 줄 알아야 진정한 신앙인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선물은 참 좋은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물', '그리스도의 선물', 그리고 '성령의 선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전도사 3:13)과 또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사람]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전도서 5:19)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자녀를 주신 것(창세기 30:20)도, 제사장의 직분(민수기 18:7)도 하나님의 선물이고, "안수로 성령 받는 것"(사도행전 8:18)과 "생명을 얻는 회개"(사도행전 11:18) 역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에베소서 2:8)도 하나님의 선물이며,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는 것]"(사도행전 2:38)을 성령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에베소서 4:7)라고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로마서 5:15)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물을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지구라는 선물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하는데, 요셉에 대하여는 이런 축복을 내립니다.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달]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신명기 33:13-16) "땅에서 나는 지극히 좋은 온갖 [선물]이 떨기나무 속에 사시는 이의 은총"(16절, 공동번역)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은총을 왜 우리가 왜 놓치고 살아야 합니까.

시편 92편 기자는, "아침에 주의 사랑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알리는 일이 좋습니다"(시편 92:2, 새번역)라고 노래했습니다. 아침이면 "여명의 빛과 새소리가 / 창문 너머로 들려오고, / 빛과 새소리에 잠든 몸 깨어나 / 뜰로 나가니, / 초록 생명마다 영롱한 이슬을 담고 / 저마다 빛[납니다]. / 자연을 밤새 / 이런 아침을 정성껏 지었고, / 나는 그들을 온몸에 모[십니다]. / 그리하여 그들은, / 내 영혼의 밥이 되고, / 내 육신의 피가 [됩니다]."(김민수, 「2021 창조절 묵상집」) 내 수고와 땀방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침마다 내 앞에 펼쳐진 신비한 자연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자연이라는 이 은총의 선물은 매일 아침 우리에게 감사하며 살아가라고 말을 건넵니다. 아침에 부는 신선한 바람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헤세드)과 은혜(하난) 그리고 자비(라함)를 알리는 하나님의 사신(使臣, messenger)입니다. "얼마나 많이 올려다보아야 사람들은 하늘을 볼 수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사람들은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요?" 교우 여러분, 그 대답은 저 아침 바람 속에 불고 있습니다.

인간이 살면서 행복하지 않고 불행한 이유는 자기가 세상에 준 것을 치사하게 조목조목 값을 따지면서도 자기가 공짜로 얻은 것은 당연히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값싼 은혜'(cheap grace)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보혈(寶血), 날마다 새 아침을 지어 선사하시는 하나님의 수고는 모두 '값비싼 은총'(costly grace)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공동기도문과 같은 행복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 숨을 쉬고 살면서도 / 숨 쉬는 고마움을 / 잊고 살았습니다 // 내가 사랑하고 / 사랑받는 일 또한 / 당연히 마시는 공기처럼 / 늘 잊고 살았습니다 / 잊지 말라 / 잊지 말라 / 다짐을 하면서 // 다시 숨을 쉬고 / 다시 사랑하고 // 눈에 보이지 않는 / 모든 것 / 새롭게 사랑하니 / 행복 또한 새롭습니다."(이해인, <행복을 찾아서>).

부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날부터 시작되어 성령강림절(오순절)까지 50일 동안 지속됩니다. 그리스도교는 무덤 문 박차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저 피안(彼岸)의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세상 '안'에서 일어난 영원한 생명의 현현(顯現)입니다. 간혹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는 이 세상을 그저 눈물과 한숨의 골짜기로만 바라보면서 현실을 비껴가고 도피하며 저세상의 천국만 사모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예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분법적이고 현실도피적인 경건에서 벗어나 세상 한가운데서 부활의 생명을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은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십니다]."(골로새서 3:11)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십니다]."(에베소서 4:6)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요한복음 15:5) 거합니다. 거한다는 말의 성서 원어는 '영구적인 주소를 정하다'라는 뜻입니다. 안착(安着)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주소지를 정한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세상과 '구별'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세상을 떠나지 않고, 세상 안에 살면서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요 나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에스겔 12:2)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얼마나 많은 길 걸어야 사람은 사람으로 불릴 수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바다를 날아야 흰 비둘기는 바닷가 모래밭에 편히 잠들 수 있습니까? 얼마나 더 많은 포탄이 하늘을 오가야 세상엔 영원한 평화가 올까요? 얼마나 긴 세월을 더 살아야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교우 여러분, 바람 속에 불고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 속에 불고 있습니다. 바람을 기억하십시오. 바람의 목소리를 기억하십시오. 바람 속에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으십시오.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습니다]."(로마서 1;20) 오늘도 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穹蒼)이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냅니다]."(시편 19:1) 이 봄에 피어난 한 송이 들꽃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창조의 권능을 선포합니다. 우리의 눈을 크게 뜨고 우리의 귀를 크게 열면 하나님의 사신(使臣, messenger)인 자연은 우리에게 창조주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척 로퍼의 <자연이 들려주는 말>입니다.

"나무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 우뚝 서서 세상에 몸을 내맡겨라. / 관용하고 굽힐 줄 알아라. // 하늘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 마음을 열어라. 경계와 담장을 헐어라. / 그리고 날아올라라. // 태양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 다른 이들을 돌보아라. 너의 따뜻함을 다른 사람이 느끼도록 하라. // 냇물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 느긋하게 흐름을 따르라. / 쉬지 말고 움직여라. 머뭇거리거나 두려워 말라. // 작은 풀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 겸손하라. 단순하라. /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존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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