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생명의 떡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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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1:14-17, 로마서 6:17-23, 요한복음 6:35

설교문

한국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어떤 사람을 '중산층'으로 볼 수 있느냐는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그 답변입니다. 첫째 부채 없는 30평 이상의 아파트를 소유할 것, 둘째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받을 것, 셋째 자동차는 2천cc급 중형차를 소유할 것, 넷째 은행 예금 잔고 1억 원 이상 보유할 것, 그리고 다섯째 1년에 한 차례 이상 해외여행을 다닐 것이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중산층으로 볼까 궁금했습니다. 이번에는 프랑스가 말하는 중산층의 기준입니다. 퐁피두 대통령이 정한 '삶의 질'(Qualite de vie)에 나오는 기준입니다. 첫째 외국어를 하나 정도 할 것, 둘째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을 것, 셋째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을 것, 넷째 남다른 맛의 요리를 만들 수 있을 것, 다섯째 사회적 공분(公憤)에 의연히 참여할 것, 그리고 여섯째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입니다. 영국은 어떨까요? 옥스퍼드대학에서 제시한 중산층 기준입니다. 첫째 페어플레이를 할 것, 둘째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셋째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넷째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그리고 다섯째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산층의 기준입니다. 첫째 자신의 주장에 떳떳할 것, 둘째 사회적 약자를 도울 것, 셋째 부정과 불법에 저항할 것, 넷째 테이블 위에는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있을 것.

차이를 발견하셨습니까? 한국인들에게 중산층의 기준은 오로지 물질이고 경제입니다. 하지만 다른 선진국에서 그 기준은 '시민의식'입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작년 7월 2일 대한민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공식 변경했습니다. 1964년에 UNCTAD가 탄생한 이래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가 바뀌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이 나라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신적, 영적으로도 선진국입니까? 경제는 빠른 속도로 발전했는데 정신적, 문화적 분야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지체현상'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중산층 기준에는 '약자'라는 개념이 아예 없고, 기독교 문명권인 프랑스와 영국과 미국의 중산층 기준에는 '사회적 약자'를 돕고, 두둔하는 것이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오늘날 프랑스나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서구의 선진국들이 아무리 세속화되었어도 그들의 문화 속에는 성서로부터 받은 정신적 세례가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성서를 보면 하나님은 "강자를 물리치시고 약자의 편을 들어주시는 신"(역대기하 14:10, 공동번역)입니다. 그분은 "하소연하는 빈민을 건져주[시]고 도움받을 데 없는 약자를 구해 주[시는]"(시편 72:12, 공동번역) 분입니다. 시편 72편 기자는 이런 하나님께서 이 땅의 왕들에게 올바른 판단력을 주셔서 그들이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며]...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게]"(시편 72:1-4)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고린도전서 1:27-28)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와 약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호적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 신앙이 오늘날과 같이 세속화된 서구 선진국의 정신세계에 여전히 살아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독일속담에, "금이 아름다운 것을 알게 되면 별이 아름답다는 것을 잊어버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몇 해 전, KBS '전국노래자랑' 함평군 편을 시청하고 있을 때입니다. 작고하신 고(故) 송해 선생님이 사회를 맡았습니다. 어느 병원 원무과에 근무하는 서른아홉 살 노총각이 무대에 나왔습니다. 사회자가 약간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왜 나왔느냐"라고 묻자 그는 대뜸 "장가가고 싶어서 나왔다"라고 했습니다. 사회자가 "그래, 그동안 장가가기 위해 재산은 좀 모아놓았느냐?"라고 묻자 그는 "재산이 아주 많다"라고 답했습니다. 다시 사회자가 "재산이 어느 정도 되느냐"라고 묻자 그는 "밭 서른 평, 소 한 마리, 돼지 두 마리, 개 두 마리"라고 답했습니다. 청중석에서 폭소가 터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오히려 "이만하면 괜찮지 않습니까?" 하고 청중을 향해 반문했습니다. 이번엔 청중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저도 웃으면서 그를 향해 힘껏 박수를 쳤습니다. 그는 현재 지닌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행복한 부자'였습니다. (정호승 산문집,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중에서.)

사람은 현재 불필요해도 미래에 필요할까 싶어서 지금 불필요한 것을 더 소유하려 합니다. 하지만 삶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금이 아름다운 것을 알게 되면 별이 아름답다는 것을 잊어버린다"라는 독일속담이 그 뜻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미래에 불필요한 금을 위해 현재에 아름다운 별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노아 벤샤가 쓴 『빵장수 야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빵장수 야곱은 친구의 손자인 요나에게 부자가 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소년 요나가 "저는 나이가 들면 부자가 될 거예요" 하고 말하자 야곱은 "조금만 덜 원하면 넌 이미 부자란다"라고 말합니다. 요나가 "야곱 아저씨, 지금 가진 것보다 더 많이 갖고 싶지 않으세요?" 하고 묻자 야곱은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원하는 것을 갖게 되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필요치 않다는 걸 알게 되어서 더 부자가 되는 거란다"라고 답합니다. 그런가 봅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위해 지금 더 많이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가 더 불안하고 더 가난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가난은 부족에서 오는 가난이 아니라 더 많이 갖기를 원하는 데서 오는 가난입니다. 정신적 가난입니다. 영적 허기(虛氣)입니다.

기업합병으로 미국 월 스트리트에서 신화적 존재가 되었던 이반 보에스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젠가 그는 '세계 400대 부자' 명단에 자기의 이름이 올랐을 때 기쁘기는커녕 자기 이름이 명단 너무 아래쪽에 있어 몹시 우울했다고 말했습니다. 전문 기업사냥꾼이었던 그는 결국 부정행위로 징역 20년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미국 버몬트 숲에서 자급자족하는 자연주의적 삶을 산 스콧 니어링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덜 소유하고 더 존재하라. 삶에서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소유하고 있는 것은 장애물이나 짐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소유가 풍성하면 존재도 풍성하게 된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우리는 욕망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정한 부자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부자는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입니다.

언젠가 홍수가 났을 때 물에 빠져 거의 죽을 뻔한 농부 박씨의 이야기입니다. 시내를 건너다가 넘어지면서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기절했는데 의식을 차리고 보니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물은 불어 점점 가슴 위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날은 어두워 오고, 머리에서는 계속 피가 흐르고, 정신은 아득하고, '아, 이게 바로 죽는 거구나'라고 그는 죽음의 공포를 실감했습니다. 다행히 인적도 없는 그곳을 누군가 우연히 지나다가 119에 신고한 것은 다음날 새벽, 농부 박씨의 호흡이 거의 멈추고 가사 상태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죽다가 다시 살아나 건강을 되찾고 일상으로 돌아간 그가 한 TV의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새 인생을 살게 된 각오를 말해달라는 기자의 말에 그는 수줍게 웃으면서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젠 잘 살아야죠." (장영희, 『내 생애 단 한 번』 중에서.)

'잘 살다'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농부 박씨는 조금 뜻밖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죽다 살아나서 다시 사는 인생이니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 더 많이 벌고 더 윤택하게 살고 싶다고 말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젠 잘 살려고요. 다른 사람에게 해 안 끼치고 말이에요." 그에게 '잘 산다'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 안 끼치는 것'이었습니다. 올바르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말의 '잘'이라는 부사는 '제대로', '올바르게', 혹은 '탁월하게'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말에서 그 말이 '산다'와 합쳐져 '잘 산다'가 되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물질적인 것과 연관해 생각합니다. "그 사람 잘 사는 사람이니?"라고 물으면 '그 사람 제대로,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니?'라는 뜻이 아니라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신세계입니다. 오래전 소크라테스는 "잘 사는 것과 아름답게 사는 것과 정의롭게 사는 것은 모두 매한가지다"(Living well and beautifully and justly are all one thing)라고 했는데, 선진국에 들어선 우리는 여전히 정신적이고 영적인 빈곤에 시달립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어떤 것에 대한 성찰이 빠져 있습니다.

복효근 시인의 <목련에게 미안하다>를 읽어봅니다. 왜 목련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걸까요? "황사먼지 뒤집어쓰고 / 목련이 핀다 // 안질이 두렵지 않은지 / 기관지염이 두렵지도 않은지 / 목련이 피어서 봄이 왔다 // 어디엔가 늘 대신 매 맞아 아픈 이가 있다 / 목련에게 미안하다." 시인은 목련에게 '미안하다' 했습니다. 우리 '대신 매 맞아 아픈 이'이기 때문에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쏟아낸 "황사먼지 뒤집어쓰고"도 목련은 "안질이 두렵지 않은지 / 기관지염이 두렵지도 않은지" 기어이 꽃을 피워 봄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왜 목련에게 미안하다고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으면 나태주 시인의 단 세 마디 시 <생명>을 읽어보면 됩니다. "누군가 죽어서 / 밥 이 다 // 더 많이 죽어서 / 반 찬 이 다 // 잘 살아야겠다." 시인은 밥상머리에 앉아 자리 앞에 놓인 밥과 반찬을 보면서 뜬금없이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잘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삽니다. 생명은 생명을 먹어야 삽니다. 동물뿐만이 아닙니다. 풀도 생명(거름, 곧 생명이 변화된 것)을 먹고 삽니다. 인간은 동물을 잡아먹고, 식물을 뽑아 먹습니다. 채식주의자라 해도 생명이 생명을 먹고 사는 이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채식주의자는 도망가지 못하는 것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 식품학자가 인간이 한평생 먹는 음식의 양을 계산해보았습니다. 사람의 일생을 100년으로만 잡을 때 하루 3끼, 한 해 365일을 먹어야 하니 100년이면 모두 109,500끼를 먹습니다. 1끼니에 1kg을 먹는다면 한 사람은 한평생 109.5t의 생명을 자기 뱃속에 채웁니다. 발사 직전의 노리호는 추진제와 구조물의 무게를 모두 합쳐 약 200t인데, 그 절반쯤 되는 엄청난 양입니다. 109.5t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나를 위해 희생한 엄청난 생명의 무게입니다. 어쩌면 오늘 구약성서 본문에서 이사야가 선지자가 말하는 것처럼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이사야 1:15)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 죽어서 밥"이고, "더 많이 죽어서 반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살아야" 합니다. 제대로, 올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남에게, 다른 생명에게 최대한 해 끼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생명은 자기 자신만으로 완성될 수 없도록 지으셨습니다. 생명은 그 안에 결핍을 지니고 있어서 반드시 그것을 다른 존재로부터 채워 받아야 삽니다. 무슨 말입니까? '나'라는 존재는 누군가의 은혜로, 누군가의 희생으로, 누군가의 덕택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나의 수고와 노력보다 더 큰 무엇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나'는 없다는 말입니다. '당신'이 있음으로써 '나'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나'가 없고 '나'가 없으면 '당신'이 없습니다. 우리는 '나'이면서도 동시에 '너'입니다. 이 세계에는 함께 얽혀진 관계 속에 빚진 나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이 생명의 관계망에서 벗어나 저 혼자 '잘 살겠다'라고, 소유를 존재로 착각하면서, 다른 존재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하나 없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내달리는 게 오늘 우리의 정신적 고통과 영적 빈곤의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한 영국인 기자가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모아 줄을 세워놓고 반대편에 맛있는 사탕 한 광주리를 놓았습니다. "제일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먹는 거야"라고 말한 후 달리기 시합을 시켰습니다. 당연히 몸집이 크거나 나이가 많은 아이가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사탕엔 손도 대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가장 어리고 약한 아이가 도착하자 아이들은 함께 사탕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너무 신기해서 기자가 먼저 도착한 아이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환히 웃으며 이렇게 합창하듯 외쳤습니다. '우분투!' 남아프리카의 우분투(Ubuntu) 전통은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믿음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혼자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너'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 되고 '나'의 행복은 '너'의 행복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생명은 다른 생명과 이어져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생명의 희생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수많은 그림자 노동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한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미안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생명에 대한 미안함, 존재에 대한 고마움, 그것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타락하고 문명은 부패합니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이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이 없어서 부부간에, 부모 자식 사이에, 이웃 간에 다툼과 분쟁이 있습니다. 당신이 나의 남편이고 아내인 것은 참 미안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내가 저 아이의 부모인 것은 정말로 미안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집 가운데 어쩌다 저 아이는 나와 같이 가난한 엄마 아빠의 아이로 태어났을까요. 이 세상의 수많은 아이들 가운데 어쩌면 나같이 까탈하고 성격 나쁜 아이의 부모가 되어주신 것은 정말로 미안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게 사랑입니다. 부족한 사랑을 받아주는 것을 고마워하는 게 사랑입니다. "더 이상 덜어낼 수 없을 때까지 덜어내고 남은 마음이 진실이며 /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때까지 낮아진 마음이 겸손이며 / 더 이상 줄 수 없는 데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상태가 사랑입니다."(이주연, 『성령을 따라 걷습니다』 중에서.) 우리는 이 진실을, 이 겸손을, 이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았습니다.

오늘의 신약서신 말씀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입니까? 생명은 생명을 먹어야 살지만 그 끝은 죽음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이 생명을 취하는 일인데 거기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희생하셔서 우리에게 영생에 이르는 '생명의 떡'이 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기의 몸을 찢어 모든 원수 된 것을 허무셔서 우리의 영원한 평화가 되셨습니다.(에베소서 2:1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5) 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한복음 7:37-38) 하셨습니다. 생명의 떡을 먹고, 생명의 물을 마시고, 하늘의 산소로 호흡하는 자가 천국을 소유합니다. 영생에 이릅니다. 풀들도 다음 해의 부활을 위해 생명의 씨앗을 만들어 내듯이, 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부활의 생명을 만들어 냅니다.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삽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먹고 삽니다. 다시는 주리지 아니할 '생명의 떡'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의 강'을 먹고 삽니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먹고 마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걸 다 내어주시고도 더 주시려는 하나님의 이 은혜와 사랑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나는 오늘 다른 모든 생명에게 해 안 끼치고 아름답고 정의롭게 잘 살려고 노력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죄 중의 죄는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초대교회 교부(敎父) 코리소스톰은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했습니다. 무엇을 이룬 다음에 그 결과를 보고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오늘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내일 기쁜 일이 있을까, 모레 감사할 일이 있을까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평생 행복의 기회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기쁜 일을 찾고 오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금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뺏겨 별의 아름다움을 잊고 살진 마십시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인간은 "감사함을 통하여 부유해질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풍성한 생명을 여는 열쇠입니다... 한 끼 식사를 풍족한 잔치로, 평범한 집을 오순도순 정이 흐르는 가정으로, 나그네를 친구로 바[꾸어 줍니다]."(멜로디 비티, <감사로 채워라>)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선진국이 된 오늘 우리의 가난은 부족에서 오는 가난이 아니라 더 많이 갖기를 원하는 데서 오는 가난입니다. 정신적 가난입니다. 영적 허기입니다. 우리는 정신적, 문화적으로도 선진국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과 '생수의 강'을 먹고 마시십시오. 오늘 나를 존재하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모든 고마운 것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잘 사십시오. 올바르고, 정의롭고, 아름답게 사십시오.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이 땅과 신음하는 모든 생명을 치유하는 일에 아낌없이 헌신하십시오. 그런 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로마서 6:23)의 은사가 차고 넘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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