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귀향(Heimkunft)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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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잠언 30:5-9, 요한1서 2:15-18, 요한복음 8:58

지난 주일에 제가 아팠습니다. 대학교회 목회담당 5년 만에 처음으로 교회를 비웠습니다. 내가 아프니 세상 사람 다 아파 보였습니다. 어느 시인도 그랬나 봅니다. "감기 몸살기가 / 전신을 휘감아 / 뜨거운 물주머니 안고 / 누워 있는 오늘 / 새 한 마리 찾아와 / 나를 빤히 바라보는데 / '너도 아프니?' / 내가 말했다 // 내가 아프니 / 세상도 사람도 / 다 아파 보이네 / 그리 예쁘기만 한 / 꽃과 나무에게도 / 내가 묻는다 / '너도 아프니?'" (이해인, <너도 아프니?>) 사람은 아파봐야 존재의 아픔을 이해하는가 봅니다.

누워있는 동안 서울에 물난리가 났습니다. 정말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습니다. "너 괜찮지? 무슨 일 없지?" 아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연락을 받았습니다. 무슨 일은 없었습니다. 천만다행이었지만, 왠지 나만 안전한 배 안에 타고 있는 것 같은 처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노아의 심정도 그랬을까요?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배에 올라탔는데 홍수가 들이치자 사람들이 방주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합니다. 배 안의 노아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이번 비로 누군가의 삶이 무너졌습니다. 누군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더 자주, 더 심각한 모습으로 벌어질 겁니다. 저는 이번에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다음은 내 차례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노아와 같은 "의인"(창세기 6:9)이어서 재난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재난 앞에서 사람은 존재의 한계를 깨닫는가 봅니다.

이 와중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권력을 잡아 이익을 누리려 서로 싸우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개인의 시뻘건 욕망을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견강부회(牽强附會)하고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도무지 '염퇴'(恬退)의 미덕이라고는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염퇴란 명리(名利), 곧 '명예나 이익에 뜻이 없어 벼슬을 내어놓고 물러남'이라는 뜻입니다. (지봉 이수광 선생의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인물부(人物部)」에 나오는 말입니다.) 한 시골학교 선생님을 노래한 어느 시가 생각났습니다. "북한강가 작은 마을 말골분교 김성구 교사는 / 종일 남에게서 배우는 것이 업이다 / 오십명이 좀 넘는 아이들한테서 배우고 / 밭매는 그애들 어머니들한테서 배운다 / 뱃사공한테 배우고 고기잡이한테 배운다 / 산한테 들한테 물한테 배운다 / 제 아내한테도 배우고 자식한테도 배운다 / 남들이 그를 선생이라 부르는 것은 / 그가 그렇게 배운 것들을 / 아무한테도 되돌려준다고 말하지 않는대서다 / 그는 늘 배우기만 한다고 말한다 / 아이들의 질문에서 배우고 또 / 아이들의 장난과 다툼에서 배운다고 말한다 / 하지만 사람들이 왜 모르랴 / 배우기만 한다는 그 한테서 아이들과 어머니들이 / 똑같이 배우고 있다는 것을 / 더불어 살면서 서로 배우고 가르친다는 / 평범한 진실마저 모르는 잘난 사람들이 / 자기들만이 가르치고 이끌겠다고 설쳐대어 / 세상이 온통 시끄러운 서울에서 / 백리도 안 떨어진 북한강가 작은 마을 말골에서." (신경림, <말골분교 김성구 교사>) 세상과 격리되어 누워있는 동안 인간은 물러남의 경험을 통해서만 눈에 보이는 명예와 이익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오늘의 신약서신(요한1서 2:15-18) 말씀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리라." 여기서 말하는 '세상'(kosmos)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감탄하신 그 세계가 아니라, 비열한 욕망과 그릇된 가치관과 이기주의로 점철된 인간 사회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 영원한 걸 보지 못한다 했습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세상의 안락함과 그것을 지키려는 욕망입니다. 안목의 정욕은 눈에 보이는 겉모습에 유혹되기 쉬운 성향입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이생의 공허한 자랑이란 뜻인데, 제 것이 아닌 것을 제 것인 양 자랑하며 자신을 높이는 행위입니다. 한마디로 허풍선입니다. 성서는 이런 것들이 모두 '지나가는 것'이며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얼마 전 미국의 한 여론조사 기관이 미국의 개신교회 목사들을 상대로 "이 시대 최고의 우상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설문에 응답한 미국 개신교 목회자의 약 70%가 '안락함'(comfort)이라고 답했습니다. 뒤를 이어 '통제'(control) 혹은 '안전'(security)을 꼽았습니다. 3위부터는 '돈'(money), '인정'(approval), '성공'(success), '사회적 영향력'(social influence), 그리고 '정치 권력'(political power) 등의 순서로 나왔지만, 이 조사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날 교회 안팎의 미국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시대적 우상은 '세상의 안락함'이고 이미 얻은 그 안락함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한국이라고 크게 다를 바 있겠습니까.

사실 세상을 살면서 안락함을 추구하고 그것을 잘 통제하고 지키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왜 그토록 이것을 경계합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8) 말했습니다. 왜 바울은 이토록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라고 힘주어 말하는 걸까요?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잠언 30:5-9)에서 잠언(箴言 - '바늘로 찌르는 말씀', Proverbs)의 기자는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라고 청원하면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라고 첫 번째 일을 주께 구한 다음,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왜 잠언의 기자는 자기를 가난하게도 말고 부하게도 말며 오직 일용할 양식만 달라고 기도하는 걸까요?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그토록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라고 경고하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다 지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까닭은 우리가 눈에 보이는 '잠깐'에 빠져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으로부터 떠나 스스로 몰락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두려워한다는 잠언 기자의 고백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찰리 채플린이 남긴 명언 중 하나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라고 말한 것이 그 뜻입니다. 고난 중에 있던 욥은 "인생이 살아갈 날 수는 미리 정해져 있고... 주님께서는 사람이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한계를 정하셨습니다"(욥기 14:5, 새번역)라고 성찰했습니다. 시편 90편 기자는 인생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는]"(시편 90:5) 풀과 같다고 성찰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27)라고 잘라 말합니다. 그 심판의 날, 곧 '하나님의 날'이 임하면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질 것]"(베드로후서 3:12)이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생도 예외가 아닙니다. 나 역시 마지막에 이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편한 진실은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근심하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묻습니다. 죽은 후의 삶에 관해 묻습니다. 종말 이후의 세계에 관해 묻습니다. 종교에 귀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우리는 시작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까. 왜 우리의 시작 이전에 관해서는 묻지 않습니까.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해서는 물으면서 왜 출생 이전 우리의 존재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물었지요. "우리에게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 우리가 '더 이상 없음'(no more)이라는 어둠으로부터 와서 '아직 없음'(not yet)이라는 어둠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에게 마지막이 있다면 시작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작을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의 마지막을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복음서 기자가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오늘의 복음서(요한복음 8:58) 말씀은 소위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는 폭도들 앞에서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 8:7) 하시며 그 여인을 구출한 직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바리새인들과의 극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예수께서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기대하며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 기뻐하였다"(요한 8:56, 새번역)라고 말하자 유대인들이 크게 반발하며 "당신은 아직 나이가 쉰도 안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요한 8:57, 새번역)라고 반문했는데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한 8:58) 그분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I was)"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I am)"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의 기자는 지금 그분이 영원으로 돌아가시는 것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분이 영원으로부터 오신 것에 대해서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간의 과거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영원으로부터의 자신의 출발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인 영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다 그로 말미암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로새서 1:15-17)라고 바울이 이 영원에 대해 증거합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브리서 13:)라고 증언합니다. 인생이 티끌과 같이 한순간이고 아침에 돋았다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는 풀과 같다고 말한 시편 90편 기자는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편 90:1)라고 찬송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이사야 40:6-8)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요한계시록 21:6)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이 '영원'(the Eternal)입니다. 영원은 '무시간'(timelessness)도, '끝이 없는 시간'(timeless time)도 아닙니다. 시간은 영원으로부터 나와 영원으로 돌아갑니다. 영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입니다. 고향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 3:11)라고 말합니다.

지난 20세기에 그리스도교 신학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예술작품의 본질은 시작이고 시인의 사명은 귀향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가 말하는 시인에는 철학자, 사상가, 그리고 성직자를 포함합니다.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 문제는 '존재 물음'(die Seinsfrage)입니다. 그는 '존재'(Sein)와 '존재자'(Seiende)와 '현존재'(Dasein)를 구분했습니다. '존재'는 이렇게 혹은 저렇게 있는 것들이 아니라 '있음 그 자체, 존재 그 자체'입니다. 진리, 하나, 혹은 하나님 등과 같은 말입니다. '존재자'란 물질이나 이념의 형태로 '있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적 사유체계에서는 모든 유한한 피조물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존재'는 인간 실존을 뜻합니다. 인간 실존은 인간이라는 존재자 '거기'(Da)에 신비한 존재(Sein/하나님)가 현전(現前), 곧 앞에 나타나 있기에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을 현존재(Da-sein)라 부릅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본래적 있음의 고유성과 깨어있음을 지탱하지 못하고 일상성에 매몰된 존재입니다. 세상 속에서 도구적 대상자로, 정치적 · 경제적 동물로, 과학적 세계의 지배자로, 그리고 철학적 · 종교적 우상 제작자로 전락하고 타락하여 본래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 곧 '고향'을 상실한 자입니다. 겉모습은 살진 돼지처럼 풍요로우나 속은 춥고, 허전하고, 외로워 항상 무언가를 소유하고 먹기를 탐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시인의 임무가 '귀향'(歸鄕, Heimkunft / Homecoming)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 현존재을 일깨워 자기 본래의 삶의 자리로, 곧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사명을 지닌 자가 시인이고 철학가이며 사상가이고 성직자라 했습니다. 여기서 고향은 어느 지리적 공간이 아닙니다. 본래 있음의 고유성을 지탱하지 못하고 일상성에 매몰된 현존재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을 또 몸에 모시고 사는 '충만하고 황홀한 지금 여기'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귀향 비유'(누가 15:1032)도 단지 집안 가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과 같은 패륜아가 회개하여 교회로 돌아오게 된다는 '도덕적 설교'가 아닙니다. 이 비유는 모든 현존재가 본래의 아버지 집, 곧 '존재의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귀향의 부르심으로 다시 읽어야 합니다.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는"(찬송가 491장), 풍요롭고 따뜻하고 정이 많고 웃음이 있는 곳입니다. (김경재, "시심(詩心) 잃은 설교는 종교 독이 될 수 있다" 중에서.) 우리는 우리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존재의 고향으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19) 제가 아파 누워있을 때 가장 많이 묵상했던 성경 구절입니다. 역시 사람은 아파봐야 존재의 근원적 한계를 깨닫는 존재인가 봅니다. 그렇게 나의 끝을 생각하다 나의 시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기에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끝이 있다면 시작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돌아갈 곳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분의 품속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은 우리가 온 근원(根源, 만물이 생겨나는 본바탕)이자 우리가 돌아갈 시원(始原, 사물이나 현상이 시작되는 처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나타나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예레미야 31:3) 하셨습니다. 이 영원한 사랑이 내가 온 본바탕이자 내가 돌아갈 처음입니다. 하이데거는 이 "근원 가까이에 이르는 길은 우리들 인간에게는 언제나 가장 머나먼 길이고, 따라서 가장 힘든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는 '깊은 사유'가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그가 말하는 사유(思惟)란 일부러 지어낸 생각이 아닙니다. 억지로 짜낸 생각이 아닙니다. 사유란 영원하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우리 자신의 근원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설교 시간은 바로 이런 사유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사유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자 영원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고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향을 찾아 되돌아오는 '귀향'입니다. '근원으로 되돌아감'입니다. 혹은 '근원으로 다가감'입니다. 우리는 존재의 근원으로 끝없이 귀향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잠깐 지나가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현혹되지 않고 우리를 부르시는 그 영원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 부르심의 말씀이 오늘의 교독문(이사야 55장)입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납]하시리라."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 어느새 감기 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이해인, <가을 노래>)입니다. 벌써 입추(立秋)도 지났고 모레는 모기 입도 비뚤어진다는 처서(處暑, limit of heat)입니다. 기후변화로 8월 말까지 여전히 덥겠지만 아침저녁 공기가 조금이나마 선선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삶을 열두 달로 나눈다면 8월은 언제쯤일까요. 인생의 8월은 자아 탐색의 치열한 여름을 보내고 세상을, 그리고 타인을 조금씩 이해하는 성숙의 가을이 시작되는 때"(장영희, 『다시, 봄』 중에서.)일 것입니다. 하늘은 높아가고 가을은 깊어갑니다. 영원을 향한 그리움 속에 우리의 영혼도 맑아지고 깊어지고 높아지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I am)" 하신 영원하신 그분이, 우리가 온 근원(根源)이자 우리가 돌아갈 시원(始原)인 그분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방황하지 말고 오라고 간절히 부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영원한 집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그 집을 찾아 귀향할 때 두 팔을 벌려 우리를 반갑게 영접해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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