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화해의 직책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입력 Aug 29, 2022 10:45 A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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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55:8-11, 고린도후서 5:14,18-20, 요한복음 9:39-41

요한복음 17장 21절은 예수께서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과 이별을 고하시며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고별기도' 혹은 '유언 기도'라고도 합니다. 어떤 기도였을까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제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마지막으로 자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기력을 다한 아버지는 단 한마디, 가장 중요하다 여기는 단 한마디를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지상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일치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는, 불행히도, 분열의 역사입니다. 오늘의 교독문처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에베소서 4:5-6)이지만, 이것을 믿는 교회는 수많은 교단으로 분열했습니다. 그리고 2천 년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분열의 역사는 아마도 한국 장로교회 분열의 역사일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로 나뉜 것도 부끄럽고, 그중 개신교가 또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 등 수많은 교파로 갈린 것도 부끄럽지만, 1912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로 출발한 한국 장로교회가 100여 년 만에 약 250개로 갈라진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럽고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하나였던 한국의 장로교회가 맨 처음 갈라진 것은 '고신'파였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출옥(出獄) 성도들을 중심으로 일제하 신사참배에 굴복한 장로교회에서 떠나 고려신학교(고신)를 세우고 갈라져 나왔습니다. 그다음엔 '기장'이 쫓겨나갔습니다. 6.25 전쟁 중에 '한국 보수신학의 아버지'라는 박형룡 목사는 성서비평을 소개한 김재준 목사를 파문했고, 김재준 목사를 따라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세워졌습니다. 세 번째 분열은 1959년에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가입 문제를 놓고 장로교회가 '통합'과 '합동'으로 갈라졌을 때입니다.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한 '통합' 측은 WCC 가입에 찬성했고, 박형룡 목사를 중심으로 한 '합동' 측은 반대했습니다. 이후 '기장'과 '통합'은 분열하지 않은 것과 달리 '합동'은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분열에 분열을 거듭해 이후 200개 이상의 장로교회로 핵분열했습니다.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진 다양한 교회들의 친교와 일치를 위해 세워진 WCC에 반대한 것처럼, 교리적 순결을 강조하고 차이를 관용하지 않으며 자신의 교리에 동의하지 않은 모든 이들로부터 분리를 추구하는 근본주의 신학 때문입니다.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존 그레샴 메이첸(J.G. Machen)이라는 학자가 있었습니다. '미국 근본주의의 신학의 아버지'라 불립니다. 그에게 참 교회는 "그리스도에 관한 어떤 특정한 메시지에 동의하고... 그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해 모인 무리"입니다. 그에게 교회란 '특정한 신학적 입장에 동의하는 신자들'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교회는 "언제나 극단적으로 교리적이고... 언제나 극단적으로 불관용적"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이후 그는 자기의 생각과 다른 모든 사람과 끊임없이 '싸움과 분리'의 길을 걸었습니다. 미국장로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보혈 이외의 다른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려는 이들을 위해서는 정성을 다해 기도할 수 있으나 절대로 그들과 함께 기도할 수는 없다." 근본주의란 이렇게 자기와 교리, 신학,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는 절대로 '함께'하지 않겠다는 분리주의 운동입니다.

이런 분리주의 운동이 1950년대 한국에서 고스란히 재현되었습니다. '한국이 낳은 메이첸' 혹은 '미국 근본주의의 대변자'라고 알려진 박형룡 목사는 "근본주의야말로 기독교 자체이다"라고 말하며 메이첸과 똑같은 분리주의의 길을 걸었습니다. 신학이 다르다고 김재준 목사를 파면했고, 전 세계 교회의 일치를 위해 만들어진 WCC 가입을 반대했습니다. 진정한 교회의 일치는 '교리적 일치'라는 방법 외에는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교리와 다른 교리를 가진 사람들과 끊임없이 '싸움과 분리'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배타적 분리주의 운동의 결과가 바로 오늘날 무려 250개에 달하는, 2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한국 장로교회 분열의 모습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배타적 분리주의 운동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지난 4월에 국민일보가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해 진행한 '기독교에 대한 대국민 이미지 조사'가 있었습니다. 결과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종교 호감도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 중 25.3%만이 기독교(개신교)에 호감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 4명 중 1명입니다. 나머지 3명은 반감을 가진 것으로 나왔습니다. 반면 천주교(가톨릭)와 불교에 대해서는 각각 65.4%와 66.3%의 응답자가 호감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국민 4명 중 3명이 가톨릭과 불교에 호감을 표명한 것입니다. 더욱 충격적인 조사는, '기독교'(개신교) 하면 떠오르는 핵심 단어로 '배타적'이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주변 단어로는 '물질적' '위선적' '이기적' 그리고 '세속적'이 나왔습니다. 종교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단어들입니다. 이와 달리 '천주교'(가톨릭)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단어들은 '도덕적' '헌신적' 그리고 '희생적'이었습니다. 주변 단어로는 '거룩'과 '진보적'이 나왔습니다. '불교'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단어는 '포용'과 '상생'이었습니다. 주변 단어로는 '친근'과 '보수'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천주교와 불교 사이에 떠오르는 대표적 단어들은 '엄숙' '배려' '경건' 그리고 '공감'이었습니다. 이번 조사에서 더욱 충격적인 것은 19~29세의 젊은 세대에서 기독교(개신교)에 대한 호감도가 겨우 19.0%로 전체 세대 중 가장 낮게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지난 20년 가까이 이화여대 교목으로 섬기면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 특히 젊은 여성들 사이에 얼마나 개신교가 비호감 종교로 전락했는지를 마음 아프게 지켜보았습니다. 왜 이리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가 나쁜지 물으면, "교회는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기와 다른 사고방식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라며, "말로는 세상과 소통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집단"이 기독교(개신교)라고 답했습니다. 아, 그랬습니다. 한국의 개신교회가 개교회주의, 성장제일주의, 분리주의, 그리고 배타주의의 길을 걷다가 결국은 선교의 길까지 스스로 가로막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서 말씀(요한복음 9장)은 자기의 생각과 관점이 유일한 진리라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을 질타하는 말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유대 사회에도 자기와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차별하고 배제하고 정죄하고 그들과 스스로 분리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의 착각과 허상을 단호히 꾸짖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침을 뱉어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른 다음 실로암 연못에서 씻게 하니 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도무지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 예수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눈멀었던 사람을 두 번이나 불러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에 그 사람은 죄인이다"라고 압박합니다. 그가 거절하자 그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너는 그 사람의 제자지만 우리의 모세의 제자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마 대단히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39절) 당연히 바리새인들이 발끈했습니다.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40절) 그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41절) 무슨 말씀일까요?

지금 예수께서는 세상을 '확실히' 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논쟁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을 '똑바로' 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모세가 준 율법에 따라 무엇이 '정결'(淨潔)하고 무엇이 '부정'(不淨)한지 자기들은 구별할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교리적 순결에 집착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이전부터 끈질기게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증하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실성'을 눈으로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을 경계하라."(마태 6:12, 마가 8:15, 누가 12:1)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누룩은 좋은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으나(마태 13장과 누가 13장에 나오는 누룩의 비유 때문에), 사실 예수께서는 누룩을 '인간의 좋지 못한 성향'(특히 위선[僞善] - 누가복음 12:1)을 비판할 때 사용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확증하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확실히 보여주면 믿겠다는 요구였습니다. 이들의 요구는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다든지, 천사가 눈앞에 나타난다든지 하는 식의 표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들에게 익숙한 말로 설명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전통에 친숙한 이미지로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기들이 이미 알고 있는 '기존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을 설명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누룩, 곧 좋지 못한 성향이었습니다. 낯선 것은 자기들에게 익숙한 것으로 번역되어야만 받아들이겠다는 태도, 그것이 바로 그들의 누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확실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무슨 말씀입니까? 너희가 너희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려 하니 너희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확실성',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불투명한 세상을 환히 비추어주는 어떤 안경이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오늘처럼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세상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매력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확실성',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리를 가로막는 '배타성'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독일의 과학자들이 땅속 50m를 파고 들어가 작은 구리 조각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독일 정부는 이렇게 확신에 찬 발표를 합니다. '고대 독일인들은 2만 5천 년 전에 이미 전국적인 전화망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영국 정부가 발끈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과학자들에게 더 깊이 땅을 파볼 것을 종용했습니다. 100m 깊이에서 영국의 과학자들은 조그만 유리 조각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기쁨에 찬 영국 정부는 다음과 같이 발표합니다. '고대 영국인들은 3만 5천 년 전에 이미 전국적인 광통신망을 갖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일랜드 과학자들이 격노했습니다. 그들은 땅속 200m까지 파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다음과 같이 확신에 찬 발표를 합니다. '고대 아일랜드 사람들은 5만 5천 년 전에 이미 휴대전화를 갖고 있었다.'

'확실성',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사람을 믿어라. 그러나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의심하라."(Believe those who are seeking the truth; doubt those who find it.) 바울이 말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고린도전서 8:2)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이사야 55:8-9)

지구 위 78억 인류 가운데 기독교 인구는 약 25억입니다. 인류의 3분의 1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중 절반이 가톨릭입니다. 그다음은 오순절 교회로 그 규모는 3억의 정교회를 넘어섰습니다. 즉 세계 기독교는 가톨릭-오순절-동방 정교회 순입니다. 장로교인은 9위로 전 세계 기독교인의 3% 정도입니다. 한국의 신구교 기독교인을 다 합해도 세계 기독교인의 1%가 안 됩니다. 0.6% 정도뿐입니다. 한국은 '선교대국'이라고 자부합니다. 2019년 말 기준을 한국에서 파송한 선교사는 전 세계 171개국에 총 2만 8천여 명으로 미국 다음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교대상국이라고 여기는 인도네시아엔 한국보다 기독교인이 더 많습니다. 중국은 10배입니다. 필리핀은 7배나 많습니다. 아프리카엔 10개 나라 이상이 한국보다 많습니다. 케냐만 해도 인구는 남한보다 적은데 교인 수는 두 배입니다. 과연 어디가 선교국입니까?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다른 교회 전통에서 배워야 합니다. 독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독점하고 있는 양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교리와 전통이 다른 형제자매 교회들과 대화하고 친교하고 협력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전 세계 140개국 345개 개신교회와 정교회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세계 최대의 기독교 연합기구입니다. 여기에 속한 그리스도인 수는 약 6억 명에 달합니다. 전 세계 개신교인의 80%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WCC의 정식회원은 아니지만, WCC의 주요한 흐름인 '신앙과 직제'(Faith & Order) 위원회에 정식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어 WCC는 사실상 세계 기독교를 망라하는 '기독교의 유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WCC는 국제사회에 가장 먼저 이를 북한의 남침으로 규정하고 성명서를 발표해 UN의 참전을 촉구했습니다. 이 요구로 UN 연합군의 참전뿐만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전쟁 구호와 전후 복구를 위한 지원이 이어졌습니다. 전쟁이 길어져 인명 피해가 커지자 WCC는 평화를 호소하며 휴전을 촉구했고 이로써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멈출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런 WCC는 매 7~8년마다 총회를 엽니다. 총회는 WCC의 최고 의사결정 구조로서, 다양한 전통과 교리를 가진 전 세계 교회들이 한자리에 모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시대적 소명을 확인하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축제라 할 수 있습니다. WCC 총회는 여성, 청년, 평신도, 장애인, 그리고 원(선)주민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고 이러한 노력은 가부장제 문화가 강한 한국교회 안에서 여성의 안수와 지위 향상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화에서는 김활란 박사가 1961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열린 WCC 제3차 총회에 한국교회 대표로 참여했습니다. 1973년 태국의 방콕에서 열린 WCC 선교대회에는 김옥길 총장과 서광선 박사가 참여했습니다. 1980년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WCC 선교대회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파키스탄 선교사인 기독교학과의 전재옥 교수가 참여했습니다. 9년 전인 2013년에 한국의 부산에서 열린 10차 총회에서는 장상 박사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WCC의 회장으로 피선되기도 했습니다. 2022년 올해엔 글피인 8월 31일부터 9월 8일까지 독일의 남부 도시 칼스루에(Karlsruhe)에서 제11차 총회가 열립니다. 여기에 제가 한국교회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제11차 총회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을 일치와 화해로 이끄신다"(Christ's Love moves the World to Unity and Reconciliation)입니다. 총회 역사상 처음으로 주제에 '사랑'(love)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화해'(reconciliation)라는 단어 역시 처음 쓰였습니다. 코로나의 세계적 대유행, 전쟁과 폭력, 그리고 가난과 기아에 지친 세계와 인류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화해와 일치에 이르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주제입니다. 이 주제의 기초가 된 성경구절은 오늘 우리가 신약서신의 본문으로 읽은 고린도후서 5:14-20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입니다. '그리도의 사랑'이 우리를 '화목(화해)하게 하는 직분'으로 부르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 즉 '그리스도의 화해의 대사(大使, ambassador for Christ)가 되도록 부르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이 직분으로 '강권'(urge/compel)한다 했습니다.

이번 총회 주제 선정에서 또 중요하게 작용한 복음서의 말씀은 마태복음 9:35-36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우리는 이 구절에서 "애끓는 마음으로"(from his guts)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는 무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을 봅니다. 기후위기와 코로나, 끊이지 않는 전쟁과 폭력, 극심해지는 가뭄과 기아 속에서 세계교회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한 무리'와 같은 인류가 그리스도의 따뜻한 사랑으로 회복되도록 교회가 화해와 일치의 직책을 잘 감당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은 지상 마지막 고별기도에서 일치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그분 안에 계시듯이 우리가 다 하나 되어 사랑의 하나님 안에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일치를 위한 주님의 기도가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니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로마서 12:4-5)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싸움과 분리'의 길이 아니라 '일치와 화해'의 길을 가야 합니다. 배타주의와 분리주의가 아니라 대화와 평화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는 자기 교회만 중시하지 않고 형제자매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를 중심에 두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하나의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립보서 2:1-4) 했습니다. 교우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이 교회와 사회, 그리고 이 나라와 온 세계 안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국가와 세계 안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하나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우리 중에 오셔서 모든 싸움 다 그치고 하나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자매 교회들이 한 몸같이 친밀하고 마음으로 하나 되게 하옵소서. 같은 주를 섬기며 한 맘으로 봉사하여 우리에게 하나 되라 분부하신 당신 뜻이 이 땅 위에서 이뤄지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 세계가 화해와 일치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참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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