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거룩한 백성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입력 Sep 26, 2022 01:09 P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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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출애굽기 19:3-6, 베드로전서 2:6-9, 요한복음 17:14-19

설교문

오늘은 대학교회가 창립된 지 8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화의 대학교회는 처음에 연합교회로 출발했습니다. 이화여전과 연희전문의 대표들이 모여 두 학교가 하나 되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합의에 따라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대학교회의 본래 이름은 '힘을 모아 일을 이루다'라는 뜻의 협성교회(協成敎會, Union Church)입니다. 1935년 9월 29일, 새로 건축된 이대 에머슨 홀(지금의 중강당)에서 양 대학의 교장, 교수, 직원, 학생, 가족, 그리고 기타 인사들 수백 명이 모여 대학 연합교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윤동주 시인이 대학교회의 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아픔을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로 형상화한 윤동주 시인은 그의 사촌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에 입학한 해인 1938년부터 협성교회를 다녔습니다. 두 사람은 식민지가 된 민족의 삶을 외면하고 내세의 구원만 강조하는 다른 교회들을 보면서 기독교인으로서, 특히 '조선의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회에서 치열하게 고민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협성교회가 만들어지고 대학교회로서 자리를 잡아갈 때 조선에서는 신사참배가 강요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일제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총독부는 광란에 가까운 탄압 정책을 펼쳤습니다. 학생들은 후방 전투대나 근로대로 동원되었기 때문에 학교는 정상적인 수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제는 심지어 모든 종교교육과 예배도 금지했습니다. 결국, 협성교회는 1942년 12월 마지막 예배를 끝으로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탄생한 지 7년 만입니다.

당시 일제의 기독교 탄압은 매우 잔인했습니다. 학교 건물에 부조(浮彫)된 십자가가 눈에 거슬린다고 새벽에 일본군을 동원해 본관 건물 지붕 머리에 새겨진 십자가를 쪼아 파괴했습니다. 교정에 심은 무궁화 나무가 민족의식을 고취한다고 뿌리째 뽑아버렸습니다. 기숙사를 수색하여 찬송가와 성경책을 압수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이화'라는 이름이 너무 민족적이라면서 교명을 '경성여자전문학교'로 변경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이화의 학생들은 신앙의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공식적인 교회의 모임은 폐지되었으나 기숙사생들을 중심으로 정기적인 예배와 비밀 기도 모임을 꾸려갔습니다. 결국, 학생들의 이런 신앙의 열정 덕분에 해방이 된 이후 1946년 10월 22일에 협성교회가 다시 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회 재건의 기쁨도 잠시, 6.25 전쟁의 발발로 대학교회는 다시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1950년 6월 27일, 전쟁이 일어난 지 이틀 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이화는 즉시 휴교 조치하고 기숙사생 전원을 고향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1.4 후퇴 때 기나긴 피난민의 행렬에 끼어 대구와 부산으로 남하했습니다. 당시 문교부는 피난지 수도 부산에서 '전시하 교육 특별조치 요강'이라는 것을 발표했습니다. 서울에 있던 학교들이 피난지에서 단독으로 개교하는 것이 어려우니 전시연합대학을 열도록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화는 본교생의 교육을 직접 담당하려는 마음으로 단독개교를 했습니다. 이에 따라 대학교회도 1951년 11월에 부산에서 다시 문을 열게 됐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지 1년 반만입니다.

피난 시절의 대학교회는 '천막교회'였습니다. 전기와 수도 그리고 난방이 잘되지 않는 허름한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화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예배드리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특별예배와 같은 절기예배를 더욱 정성껏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일학교는 절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대학교회는 부산 피난 시절, 이화 신앙생활의 중심축이었습니다. 이 시절에 주목할 일은 대학교회가 처음으로 「주보」를 편찬한 것입니다. 대학교회의 첫 주보는 1952년 3월 16일에 발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보」를 보면 대학교회 명칭이 더는 '협성교회'가 아니라 '대학교회'로 사용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피난지에서 이화가 단독개교를 한 것과 달리 연세는 '전시연합대학'에 참여함으로써 양교의 협력으로 운영되던 '협성교회' 체제가 더는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1951년 11월 이래 대학교회는 이화만의 대학교회로 운영되었습니다.

1953년 7월, 휴전과 함께 이화도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많은 건물이 파괴되어 교실 건물의 재건이 시급했습니다. 당장 필요한 것은 채플을 드릴 수 있는 건물과 체육관, 그리고 학생식당과 기숙사 등이었습니다. 온 힘을 모아 학교를 재건한 끝에 단 3년 만인 1956년에 이화의 랜드마크인 대강당이 완공되었습니다. 그 해는 이화창립 7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였습니다. 전쟁 후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했던 시절, 이화의 지도자들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대강당을 한국 최대가 아니라 동양 최대 규모로 지었습니다. 이화의 신앙심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대강당의 봉헌식에는 대통령도 참석해 축사했습니다. 이후 대학교회는 기념예배나 졸업예배 등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대강당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후 대학교회는 틀을 정비하고 착실히 성장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아동부를 중심으로 주일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합니다. 또 찬양대를 집중적으로 육성했습니다. 당시 대학교회가 얼마나 찬양대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는가 하면 찬양대원들을 위해 주일날 학교버스를 따로 운행할 정도였습니다. 1953년의 한 주보를 보니 당시 학교버스는 주일 아침 9시 10분에 동대문에서 출발하여 신설동-혜화동-종로2가-남대문-시청앞-광화문-서대문-굴레방다리를 거쳐 학교로 찬양대원을 실어 날랐습니다. 주일학교와 찬양대에 이어 가장 눈에 띄는 일은 1957년에 장년부 성경공부반을 조직하여 교회의 새로운 동력을 만든 것입니다. 장년부 성경공부반의 강사는 김활란 장로를 비롯하여 기독교학과 현영학 교수 등이 수고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에서는 '남성은 말씀을 전하고 여성은 봉사한다'라는 고정된 성 역할분담이 관행처럼 지배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여성이 직접 설교하고 성경공부를 지도하고 또 성경을 봉독하는 일은, 오직 이화의 대학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1960년대는 대학교회가 매우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던 시기입니다. 장년부 성경공부반은 그 햇수를 거듭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더욱 불탔습니다. 그 열정을 실천하기 위해 먼저 이대 근처에서 가가호호 방문하는 축호(逐戶)전도를 실시했습니다. 장년부 성경공부반은 보다 체계적인 전도를 위해 '금란전도협회'를 결성했고, 이것이 후에 지금의 '다락방전도협회'가 되어 이화 선교의 새 역사를 만들어 갔습니다. 1960년대의 대학교회 선교에서 또 하나 특징적인 일은은 파키스탄에 선교사를 파송한 일이었습니다. 이는 한국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해외선교사 파견입니다. 서구교회로부터 복음을 받은 지 겨우 80년 만에 그 사랑의 빚을 갚은, 놀라운 역사가 우리 교회를 통해 일어난 것입니다. 이때 이화가 파송한 선교사가 전재옥, 조성자, 김은자 님입니다. 1960년대에는 대학교회의 자랑인 부활절 새벽예배도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부활절 새벽예배는 기독교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대강당 앞 계단에 모여 대학교회 찬양대와 함께 찬양하며 예배를 드렸는데, 새벽안개가 낀 날이면 그 모습이 마치 천사들 같았다고 합니다. 이 부활절 새벽예배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970년대는 대학교회 역사에서 또 다른 시련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공포하고, 절대 권력을 영구화하려던 때였습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침묵했으나 대학교회는 깊은 고뇌 속에서 시대의 위기에 어떻게 신앙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지 모색했습니다. 그 어려웠던 시기에 김흥호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김 목사님은 한 달에 한 번만 성서 강해설교를 하고 나머지는 외부 목사님을 모시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산이 없어 강사에게 강사료를 지급할 수가 없었기에 아무나 초청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고심 끝에 돈을 받지 않을 사람을 초청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친구인 안병무 박사에게 돈을 받지 않고 한 달에 한 번씩 반년 동안을 부탁하였더니 쾌히 승낙하였습니다. 김흥호 목사는 김동길 교수와 현영학 교수에게도 같은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자 대학교회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들이 대학교회의 강사가 됐다는 것입니다. 특히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은 그들이 정말 싫어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마다 정보부, 보안부, 경찰국, 서대문경찰서, 이화 주재 파출소에서 7~8명씩 나와 맨 앞자리를 차지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리 나오지 말라고 해도 그들은 계속 나왔습니다. 그런데 정권의 감시가 심해질수록 교인들이 새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김흥호 목사님이 교회를 처음 맡을 때 175명이던 교인 수가 반년 만에 3~4백 명이 넘어서고 일 년 후엔 4~5백 명을 넘어서더니 목사님이 그만둘 때는 1,450명 정도로 늘어나게 됐습니다. 교회가 오히려 부흥한 것입니다. 대학의 문이 닫히고 지성의 소리가 끊길 때 이화를 지키고 있던 것은 바로 대학교회였습니다.

1990년대 들어 교회건축을 위한 계획이 수립되고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중강당과 대강당에서 예배드리던 시절에 아동부와 중고등부는 학교 이곳저곳 강의실에 흩어져 예배드려야 했고 이들을 돌보던 선생님들의 고충은 매우 컸습니다. 대학교회의 독자적인 건물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었습니다. 드디어 많은 분의 기도와 헌신 덕택에 새 천 년이 시작되는 2000년의 5월 31일, 이화창립 114주년을 기념하는 날에 이 대학교회 건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봉헌예배가 거행됐습니다. 대학교회가 생긴 지 65년 만의 일입니다.

대학교회 건물은 신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 특별합니다. 교회건축에는 그것을 지은 사람들의 신앙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건축은 '돌로 지은 신학' 혹은 '벽돌로 쓴 설교'라고도 말합니다. 이화 대학교회 건축의 핵심적 이미지는 '세상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배당 건물이 지층으로부터 상부로 떠있는 형상으로 구현했습니다. 저층부 기단은 세상에 속해 있으나 상부의 구조는 속세에 속하지 않으려고 부유(浮游)하는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 이미지는 오늘 읽은 복음서의 말씀과 상통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7장의 그 유명한 '고별기도'에서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한 17:15-17) 예수께서는 제자들은 "세상에서 데려가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에 빠지지 않에 보전하시기"을 원하셨습니다.(요한 17:15) 이 말씀에 영감을 받아 예배당 건물이 지층으로부터 상부로 떠있는 형상으로 지어졌습니다. 가만히 보면, 땅 위에 서 있는 이 건물을 하늘로 끌어 올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건물을 매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철골 십자가입니다. 건물 위 상부에 아주 불규칙하게 얽혀 있는 철골 구조물을 보셨을 줄 압니다.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가시 면류관입니다. 대학교회 건물은 가시면류관 십자가가 하늘로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 힘으로 우리를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모습이 형상화된 것입니다. 밤이 되면 여기에 밝은 빛을 비추어 가시면류관 십자가는 부활의 상징이 됩니다. 이렇게 신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대학교회는 이화동산 안에서 대강당과 더불어 이화의 기독교 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이 되었습니다. 대학교회는 이화 안의 지성소(至聖所)와 같은 곳입니다. 이 특별한 건물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화여대 미술대학의 김길홍 교수가 자신의 신앙과 예술혼을 쏟아부은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성서에서 분명하게 밝힌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에베소서 5:23)가 되시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린도후서 5:23) 했습니다. 그러므로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다]"(고린도후서 12:25)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상토룸 코뮤니오'(Sanctorum Communio), 즉 '거룩한 이들의 공동체, 친교, 사귐'입니다. 이는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사도신경에서 우리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고백할 때의 그 교회론입니다. 교회는 서로 '교통'(交通)하는 곳, 즉 교제하고 왕래하는 곳입니다. 또 서로 '소통'(疏通)하는 곳, 즉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고 일치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세상의 모든 증오를 이기시고 당신의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민족, 계급, 인종을 가로질러 인류 평화를 위해 전쟁의 반대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디트리히 본회퍼)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제도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회중'(會衆, congregation)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3:16-17)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교회 건물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도 건축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가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기성 교회 밖으로, 제도 교회 밖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을 우상처럼 섬기는 교회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입니다. 자기가 다니던 교회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니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몰상식한 일들을 견딜 수 없어서, 즉 '숨이 막혀서' 떠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이들을 '가나안 성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밝히는 사람 가운데 약 10% 정도가 이 '가나안 성도', 거꾸로 읽어서 '안나가 성도'입니다. 그 숫자는 무려 100만 명에 육박합니다. '가나안 성도' 현상은 일시적이거나 우발적인 개인의 돌출행동이 아닙니다. 이 현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무엇이며 또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평신도들의 광범위한 저항행위입니다.

500여 년 전 루터 종교개혁의 핵심이 무엇이었습니까?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만인사제설(萬人司祭設), 즉 교회에서 계급을 없애는 운동이었습니다. 루터는 사도신경의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중세교회에서 '성도'는 하늘에 있는 성인만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땅에 있는 모든 신자를 성도라 해석했습니다. 이는 오늘의 신약서신의 말씀과 상통합니다. 베드로전서 2:9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날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베드로전서 2:5)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만인사제설의 성서적 근거입니다. 이 구절이 바로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의 핵심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루터는 교황과 성직자 계급에 집중되어 있던 모든 권한을 평신도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강단을 낮추고 평신도들도 강단에 오를 수 있게 했습니다. 모든 신자는 참된 사제이고, 신자 사이에는 직무의 차이만 있을 뿐 신분의 차이는 없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우가 주님의 성직자들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제사장들입니다. 오늘 구약성서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굽과 같은 속박과 어둠에서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신"(출애굽기 19:4)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게]"(출애굽기 19:6) 하려 함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골로새서 3:12)입니다. 세상을 살리기 위해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아 나온'(ekklesia, 에클레시아), 즉 교회입니다.

한국 최초의 해외선교사로 파키스탄에 파송되었던 고(故) 전재옥 교우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대학교회는 교단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교인들의 교파 의식이 없고, 어떠한 신학 노선을 이야기해도 편견 없이 다 소화해낼 수 있으며, 여성들이 강단에 서서 설교할 수 있고, 목사가 아닌 평신도도 설교할 수 있는 열린 교회이며, 집사나 장로와 같은 조직 체계가 없이 위원회만 있는 것도 특이한 점인데, [그럼에도] 대학교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달라지지 않는 것은 삶을 정화시키는 가르침과 배움이 행해지는 곳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화의 대학교회는 초교파적인 독립교회입니다. 1953년 부산 피난 시절에 감리교회 소속 교회가 된 적이 있으나 1975년에 거기서 탈퇴하여 오늘까지 독립교회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많은 한국교회와 달리 대학교회는 교육과 선교 그리고 사회봉사에 전체 재정의 60% 이상을 쓰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무엇보다도 대학교회는 여성이 평등한 교회입니다. 1935년 그 시작부터 대학교회에서는 여성이 말씀을 전했고 성경공부를 인도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성서에 따라 여성도 남성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고귀한 존재임을 믿으며 이러한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여성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이화여자대학교의 울타리 안에 대학교회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나아가 대학교회는 탈권위주의적인 평신도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직분이 없고 평신도들이 일정한 임기로 봉사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담임목사도 임기가 있어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고 목회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 나라의 그 많은 교회 가운데 대학교회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합니다.

그러므로 대학교회는 한국교회의 소망이고 미래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대학교회가 일반교회와 달리 예배를 중심으로 하는 제한된 기능의 특수교회라 말합니다. 마치 무언가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이렇게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대학교회는 이 땅의 교회들이 가야 할 미래를 미리 보여준 교회의 모범이고 전형(典型, archtype)이라고 말입니다. 대학교회는 한국교회의 미래이고 소망입니다. 성장주의와 기복신앙, 배타주의와 분열주의 그리고 성차별주의로 스스로 무너지며 개혁할 힘을 잃어버린 오늘의 한국교회가 새로 가야 할 길을 우리 대학교회는 지난 87년 동안 묵묵히 걸었습니다. 대학교회의 역사는 그래서 한국교회의 '오래된 미래'입니다. 우리 이화의 대학교회의 교우님들은 그런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대학교회가 창립 87주년을 맞았습니다. 이제 90주년, 그리고 100주년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이]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내 주의 교회는 천성과 같아서 눈동자같이 아끼사 늘 보호하십니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와 교회의 위로와 구주와 맺은 언약을 늘 기뻐[하면서] 이 교회 위하여 눈물과 기도로... 늘 봉사합니다. 하늘의 영광과 베푸신 은혜가 진리와 함께 영원히 [오늘 여러분 위에] 넘치[시길]"(찬송가 208장)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여러분 위에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이사야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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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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