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버리기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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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41:8-10, 에베소서 5:1-4, 누가복음 14:33

설교문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아침저녁에 찬바람이 불고, 사람들은 모두 긴팔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즈음에 한국인들에게 가장 애송되는 시는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입니다.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 가을에는 /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 굽이치는 바다와 /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에 많은 영향을 준 시는, 오늘 우리가 공동기도문으로 읽은, 릴케의 <가을날>입니다. 20세기 독일어권 최고의 시인이라 추앙받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이 시는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을 노래일 것 같습니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 놓아주소서. // 막바지 열매들을 영글게 하시고, / 하루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비추시어, / 영근 포도송이가 더 온전하게 무르익게 하소서, / 짙은 포도주 속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해주소서..." 1902년 파리에서 지었습니다. 인생의 가을에 빗대어 계절의 가을을 노래한 이 시는 모든 것을 온전히 내려놓고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시입니다.

이 시의 묘미(妙味)는 지나간 여름을 '과거'로 표현하고 있고, 그 여름이 '참으로 위대했다'라고 서술하는 첫 문장에 있습니다. 인생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비유한다면 여름은 가장 왕성하고 에너지 넘치는 시간에 해당합니다. 바로 그 여름을 너무도 뜨겁게 보냈기에 '위대했노라'라고 스스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신 앞에 겸허하게 드릴 수 있는 기도가 바로 이 시인 것 같습니다. 단테는 <신곡 Divine Comedy>에서 이렇게 말했다지요. "미지근하게 사는 사람은 지옥에도 못 간다."

시인은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까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하루 이틀만 더" 등의 표현도 남은 시간이 짧은 가을날처럼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상기시킵니다. 이런 시간에 "영근 포도송이가 더 온전하게 무르익게" 하시고, "짙은 포도주 속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전능하신 신 앞에 드리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릴케의 <가을날>은 신의 자비를 구하는 청원(請援)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냉혹한 겨울을 앞에 둔 인생 가을날의 진실을 냉정하게 성찰하고 있습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 / 지금 고독한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남아, / 잠자지 않고,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 그리고 낙엽이 떨어져 뒹굴면, 불안스러이 /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왜 고독한 시인은 낙엽이 떨어져 뒹굴면 불안 속에 가로수 길을 헤맬까요.

'나무의사' 우종영 선생에 따르면, 나무는 봄부터 여름까지 정성 들여 새순을 올리고 애쓰며 만들어 낸 잎들을 겨울이 오기 전에 '모질게' 끊어 버립니다. 가을이 깊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영양분을 거둬들인 다음 떨켜층을 만들어 후두둑 이파리들을 떨궈 버립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사람도 견디기 힘들지만, 나무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가을에는 햇볕이 여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고, 뿌리를 통해 공급받는 수분의 양도 절반 이하로 줄어듭니다. 그러므로 다음 해를 기약하기 위해선 그동안 모아 놓은 에너지를 아주 조금씩만 쓰면서 추운 계절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분을 증산시키는 잎들을 '모질게' 떨어뜨리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습니다. 나무가 잎을 떨구는 것을 추운 겨울을 이겨 내고 다시 새봄을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늦가을에 우리 앞에 펼쳐지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낙엽들입니다. 연인들은 낙엽이 쌓인 길 위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어린아이들은 그 위를 뒹굴며 까르르 웃지만 나무에게 낙엽은 안타까운 포기 후에 흘리는 눈물과 같습니다. 그렇게 온몸의 잎들을 떨군 뒤 나무는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을 가지만 있는 앙상한 알몸으로 견딥니다. 하지만 제 살을 깎아내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나무는 잎들에 대해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봄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에 나무는 과감하게, 모질게, 냉정하게, 미련 없이, 집착 없이, 깨끗이 버립니다. (우종영,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중에서.)

나무와 견주어 볼 때 인간이란 존재는 버리는 것을 참 못합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인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한번 손에 쥔 것은 절대로 놓을 줄을 모릅니다. 무엇을 '바라기'만 하고 '버리기'는 못합니다. 어느 분이 "바라기와 버리기"라는 제목으로 쓴 글입니다. 꼭 제 이야기 같아 인용해봅니다. "신발장에 신발이 늘어 갑니다. 옷장에도 옷이 많아집니다. 부엌에 그릇이 쌓입니다. / 사기만 하고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 마음에 근심이 늘어 갑니다. 머리에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몸이 자꾸만 무거워집니다. / 바라기만 하고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 신발장에 먼지만 털어낼 것이 아니라 신지 않는 신발은 버려야 하겠습니다. / 옷장의 옷도 차곡차곡 쌓아 둘 것이 아니라 자주 입는 옷만 두고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 부엌에 그릇도 사용하는 것만 두고 모두 치워야겠습니다. / 삶이란 이렇게 바라기와 버리기의 치열한 싸움입니다. / 내 마음의 많은 생각들 가운데 내 생활의 많은 일들 가운데 정말 내 삶을 아름답게 하고 의미 있게 하는 것들만 남겨두고 모두 다 버려야겠습니다. / 버리면 얻게 됩니다. 쓰레기도 헌 옷도 버리세요. 슬픔도 미련도 후회도 버리세요. / 명예도 욕심도 버리면 얻게 됩니다. / 설사 얻지 못한다 해도 버린 만큼 시원합니다."(행복하고픈혜숙, <바라기와 버리기>)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분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3) 예수 그리스도는 또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은 분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하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나]"(마태복음 26:31-35) 우리는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과 다른 모든 제자도 주님을 버리고 도망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은 분입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의 일입니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가 15:34, 마태 27:46) 십자가에 달려 온몸으로 파고드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예수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편 22:1)라는 시편 22편 기자의 절규를 기억하셨습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버리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나무가 낙엽을 떨구듯이 모질게, 냉정하게 버리셨습니다. 나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봄이 오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 없기에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아니, 성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아는 아들이 자기 자신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말합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에베소서 5:2) 이처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게 되었다]"(요한1서 3:16)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리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도 버리고 비우라고 명하십니다. 어느 날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올 때 주님은 그들을 향해 돌이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 14:26-27) 여기서 '미워하다'라는 말은 감정을 가리키는 단어라기보다는 '버리다'라는 포기의 의미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가 되는 조건으로 자기 포기를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은 또, 오늘 읽은 복음서 본문처럼,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 14:33) 하셨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지 않으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그를 따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버리고, 비우지 않으면 생명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가 9:43-47) 버리고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은퇴 후 경상북도 한 깊은 산골에서 농가민박학교를 시작한 곽은득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평생 돌과 나무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는 서각(書刻), 전각(篆刻) 작품의 예술가입니다. 어느 날 어린아이 하나가 농가민박학교를 찾아왔습니다. 와서는 거실 뒤 책꽂이 책을 구경하며 뒤척이길래, 목사님은 "그래 읽고 싶은 책이 있나? 어떻게 여기 왔어?"라고 물었습니다. 아이가 답했습니다. "저는요 여기 뭘 하러 온 게 아니에요. 여기오면 그것 없이 사는 꿈이 생기네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그래서 오는 거에요..." 목사님은 "아하! 그렇구나 바로 이거구나"라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꿈이 생긴 것입니다. (『곽은득 목사의 서각, 전각 작품 : 돌과 나무에 말씀을 새기다』 중에서.)

이 농가민박학교의 표어는 "그것 없이 사는 법"입니다. 무슨 뜻으로 지은 걸까요? 이 표어는 고대 수도원의 수도사들 방에서 발견된 글입니다. 순례객들이 찾아와서 묵을 때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찾지요. 그때 수도사들이 순례객들에게 주는 말이라고 합니다. "머무시는 동안 필요한 것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그것 없이 사는 법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자기 집이 아니니 순례자에게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수도사들은 그 이것저것 없이 사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자립하고 자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수도사들의 기도이고 삶의 정신이며 영성입니다.

전도서 1:2절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곽은득 목사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헛됨'은 삶의 단순성을 말하지요. 종말, 부활 신앙이 있으면 우리는 삶이 단순해질 수 있지요. 죽으면 하나님 앞에 간다 그러면 삶이 단순해지더라. 소유, 사회적 위치, 영향력, 여기에 매달리는 삶은 결국 헛됨이지요. 우리는 계속 살 것만 생각하지 죽을 걸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복 받기를 원하고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성서는 복의 출발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시편 1:1)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흘려보내면 됩니다. 비우면 됩니다. 내려놓으면 됩니다. 집착 없이, 미련 없이 비우고, 내려놓고, 흘려보내야 합니다. 가을 들녘의 저 나무들처럼 말입니다.

김소엽 시인의 <가을 들녘 - 가을>입니다. "가을이 되면 / 가지 위에서 대지의 품으로 / 미련 없이 떠나가는 / 낙엽의 순리를 배우리 // 이별을 위해 / 여름날 뜨거운 태양의 쓰라림도 / 긴 외로움의 어둠도 / 아픈 배리의 된서리도 / 아픔다운 채색으로 물들인 / 단풍처럼, / 떠나갈 날을 위하여 / 아름다운 순간으로 채우리 // 낙엽은 떨어짐조차 / 아름답지 아니한가 // 가을의 조락 앞에 / 모든 것 다 바치고 / 빈 들녘처럼 누워 있나니 / 신이여 / 당신의 겸허로 채워주소서 / 당신의 경건으로 / 종소리 울리소서." 가을은 조락(凋落), 곧 시들어 떨어지는 계절입니다. 그 가을의 빈 들녘에 모든 것 다 비우고 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겸손과 경건의 은총으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 가을에 우리가 가질 것은 무엇이고, 버릴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기준입니까? 십자가가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나무가 새봄을 위해 눈물로 낙엽을 떨어뜨리듯,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모질고 냉정하게 십자가 위에서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나무에게 낙엽은 안타까운 포기 후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하나님에게 십자가는 신의 피눈물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 했습니다. 십자가가 기준입니다. 십자가는 모질고 냉정한 하나님 사랑의 표시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미련없이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표지입니다. 십자가는 포기하는 삶이, 과감히 버릴 줄 아는 삶이 숭고하고 아름다움을 깨우치는 성령의 영감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신다]"(신명기 4:31)라고 성서가 증언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시편 94:14),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시편 9:10),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실 것]"(시편 37:28)이라고 시편 기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구약성서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8-10) 이 구절이 세브란스 병원 수술실 입구 천정에 쓰여 있다고 하지요. 누워서 수실로 실려 들어가는 환자가 보며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비우십시오. 버리십시오. 채우려면 비어 있어야 합니다. 기적은 비움에서 옵니다. 미움을 내려놓고 사랑의 공간을 만드십시오. 다툼을 포기하고 평화가 자리할 공간을 여십시오. 욕심을 버리고 나눔의 공간을 내십시오. 강박적인 자기 의로움에서 벗어나야 타인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자비의 공간이 생깁니다. 아이들을 다그치지 마십시오. 꿈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오는 겁니다. 비우니까 채워지는 겁니다. 우리는 세계 역사상 가장 안전한 시대를 사는 가장 번영한 인류입니다. 그런데 그 어느 때보다 더 절망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운명의 주인이고, 꿈꾸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진보된 세상을 살고 있다는 현대인들은 가장 심한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립니다. 진실은 우리가 말하는 희망이 자기 파괴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아이들과 젊은이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이 '지속가능한 희망'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무한 긍정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중요한 건 포기하고 내려놓는 법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버킷 리스트'(Bucket list, 죽지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적은 목록)가 아니라 '포기하는 리스트'입니다.(마크 맨슨, 『희망 버리기 기술』 중에서.) 여러분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흘러온 복을 흘려보내십시오. 종말 신앙, 부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죽으면 하나님 앞으로 간다는 단순한 신앙이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된 세상에서 헛된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진리 안에 자유롭게 합니다. 단순하게 사십시오.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이것저것 필요하다고 생각할 "그것 없이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수도사들의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가을은 기도하는 계절입니다.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는]" 계절입니다. 가을은 사랑하는 계절입니다. "오직 한 사람을 택하[고] /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 시간을 가꾸[는]" 계절입니다. 가을은 호올로 있는 계절입니다. 저 먼 "굽이치는 바다와 /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호올로 있는 계절입니다. "...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막바지 열매들[이] 영글게... / 하루 이틀만 더 [따뜻한] 햇빛을 비추시어, / 영근 포도송이가 더 온전하게 무르익게" 해달라고 겸허히 기도해야 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기도에 영감을 받았을까요 한국의 임성숙 시인도 그의 <가을의 기도>에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겸허히 청원합니다. 이 기도로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지난 봄 여름 / 당신이 굽어보는 눈동자 안에서 / 얼마나 푸르게 얼마나 크게 / 자라났는지 // 당신이 무상으로 주시는 / 단비와 햇빛 속에 / 얼마나 향기롭게 얼마나 달콤하게 / 맛들었는지 // 지금은 당신께서 거두는 / 수확의 계절 / 여문 열매는 여문 열매대로 / 쭉정이는 쭉정이대로 / 공의(公義)로운 손길로 거두시는 날 / 잠시 잠시만 / 그늘 속에 묻혔던 끝물 열매가 / 어여삐 무르익기까지만 / 사랑의 손길로 기다려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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