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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개혁교회의 성만찬 이해

제목: 개혁교회의 성만찬 이해
발표 : 최영 박사(기장신학연구소 연구실장)(2009.4.9 기장신학연구소 목회와신학 세미나에서 발표)
출처 : 기장신학연구소


 


Ⅰ. 들어가는 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만찬을 통하여 유일회적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이 지금 현재 우리의 것이요, 장차 영원히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떡과 포도주가 이 성만찬의 상징이며, 주께서는 이 상징을 통하여 그의 몸과 피를 참으로, 그러나 영적으로 받게 하신다. 이 성만찬은 ‘떡을 뗌’(고전 10:16, 행 2:46), ‘주님의 만찬’(고전 11:20), ‘희생제물’(시프리안과 어거스틴), 거룩한 교제, 미사, 유카리스트(Eucharist)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왔다. 우리가 속한 개혁교회는 서방교회의 전통에 속해 있으나, 물려받은 위대한 신앙의 유산 가운데 많은 것을 동방교회로부터 받았다. 이것은 성만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우리가 성만찬에서 적포도주를 사용하는 것은 서방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동방교회의 전통에 속한다.
개혁교회는 합당하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해 온 자랑할 만한 신앙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성만찬 없는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비예전적 교회로 분류된다. 개혁교회는 루터와 칼빈 등 개혁자들이 말씀의 순수한 선포만이 아니라 성례전의 올바른 거행을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되게 하는 두 가지 표지로 삼았고(Inst. Ⅳ.1.9), 또한 성만찬이 매주 거행되기를 원했다(Inst. Ⅳ.17.43)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오늘의 개혁교회는 합당하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지 않고 단순히 성만찬 횟수의 증가를 통해 예배의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들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하지만, 온전한 예배는 성만찬을 포함해야 한다고 말하는 세계교회의 주장에 대해서는 경청할 필요가 있다.
개혁교회는 예전의 갱신을 위해 다른 교회들에게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점에서 개혁교회는 다른 교회들에 비해서 유리한 편이다. 왜냐하면 개혁교회는 복음이 명시하는 본질적 부분, 곧 교회의 보편적인 합의사항(예컨대, 그리스도가 주님이시고 구원자이시라는)에 대해서는 결코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규정하지 않는 특수한 형식에 대해서는, 저 본질적인 것을 인정하는 한, 교회에 유리한 쪽으로 언제든지 전통적인 관습을 변경 또는 폐지하고 새로운 것을 제정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BEM 문서」를 중심으로 성만찬의 신학원리를 살펴보고, 세계교회들의 성만찬 예전을 참조하여 실제적인 면에서 개혁교회 예전의 갱신을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Ⅱ. 성만찬의 신학원리

1. 성례전이란 무엇인가?

성서는 성례전의 정의를 내리지 않고 또 그 숫자를 구체화하지 않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문자적으로 ‘신비’를 뜻하고 이후 라틴어에서 ‘성례전’(sacramentum)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인 미스테리온(mysterion)은 특별히 세례와 성만찬, 혹은 다른 의식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밝혀진 하나님의 현존과 목적을 말한다(참고. 엡 1:9-10).   
중세 초기에는 성례전의 숫자가 대단히 다양했다. 13세기 이후로 성례전의 숫자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교회에서 일곱 개, 곧 세례,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서품식, 혼례, 그리고 병자(종유)성사로 고정되었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 등 개혁자들은 성례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해 분명히 제정된 것이고, 온 교회를 위한 보편적 성례전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유로 세례와 성만찬 이 두 가지 만을 성례로 인정했다.
칼빈은 성례전을 “우리의 연약한 신앙을 지탱하기 위해 주님께서 그의 선하신 호의를 우리에게 제시하며 증거하시는 외적인 표지”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는 성례전의 본질을 묘사하면서 “인장” 혹은 “날인”이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것은 왕이 그의 인장 속에 현존하고 문서의 내용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성례전은 그리스도가 말씀 가운데 현존하고 행동하는 징표로서 설교와 결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교회의 예배가 세례와 함께 시작하고, 그것을 뒤따라 설교가 있고, 성만찬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2. 왜 성례전이 필요한가?

그러나 왜 우리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성서 이외에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전달하기 위한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가? 그 대답은 우리의 하찮고 연약한 신앙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유하고 우리의 신앙을 확실하게 해주는 어떤 특별하고 구체적이며 눈에 보이는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물과 떡과 포도주 자체는 기록된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의 약한 신앙을 강화하고 확실하게 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의 눈이 너무 흐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청각 기능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다른 감각에도 말하는 눈에 보이는 도움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성만찬은 그 이름이 암시하는 대로 중생한 사람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식사이다. 떡과 포도주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서 받는 보이지 않는 양식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선하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들을 먹이시고 그들의 영혼에 유일한 양식이 되는 그리스도를 나누도록 초대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맺으시는 연합은 우리의 지각을 넘어서는 신비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성만찬으로써 그 연합의 표징을 주시며, 그 지상적 요소들을 먹고 마시게 하심으로써 그 요소들이 상징하는 실재를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확실히 깨닫게 하신다. 이것은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떡과 포도주가 몸을 유지시키듯이 영혼은 그리스도에게서 양식을 받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Inst. Ⅳ.17.1).

3. 성만찬 시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신비로운 연합을 맺게 되고, 이 때 그리스도의 것이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의 것이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놀라운 교환”이 이루어진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인자가 되심으로써 우리가 그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고, 자신이 땅에 내려오심으로써 우리가 하늘로 올라갈 길을 준비하셨으며, 우리의 죽을 생명을 가지심으로써 우리에게 그의 영생을 주셨고, 우리의 무력함을 받으시고 그의 힘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셨으며, 우리의 빈곤을 받으시고 그의 풍부하심을 우리에게 넘겨주셨고 또 우리를 억압하던 우리의 죄의 짐을 스스로 지시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주셨다”(Inst. Ⅳ.17.2).
성만찬은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처럼 이 모든 교훈들을 확실하게 증거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그가 우리의 것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바 되셨음을 천명한다(Inst. Ⅳ.17.3). 그러나 칼빈은 성만찬에서 가장 주된 사실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된 음료(요 6:55)이며, 그것을 먹는 우리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요 6:56) 선언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성만찬이 증거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신 몸이다. “성만찬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한다”(Inst. Ⅳ.17.4). 성만찬은 복음이 증거하는 그리스도 자신과 그가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일을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적용하여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를 먹을 때, 그의 생명이 우리 속에 옮겨져서 우리의 생명이 된다”(Inst. Ⅳ.17.5).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의 음식이 된다”(Inst. Ⅳ.17.24).

4. 성만찬에 그리스도는 어떻게 임재하시는가?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게 되는가? 이것은 그리스도가 성만찬에 어떻게 임재하시는가에 관한 물음이며, 16세기에 각 교파들은 이 임재방식에 관해 논쟁하면서 분열되었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수많은 해석 가운데 특히 네 가지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첫째는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리인 화체설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사제가 성만찬의 요소 곧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선언하는 순간 떡과 포도주라는 ‘실체’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게 된다. 우연적인 성질, 곧 요소들의 외적 형태는 그대로 남는다. 개혁자들은 화체설의 이러한 마술적이고 미신적인 표상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가톨릭 신학자들 가운데서 “본질변화”를 “의미변화” 혹은 “목표변화”로 새롭게 해석하는 시도가 나오기도 했다. 떡과 포도주가 변화된다는 것은 그 견해에 의하면 양자가 뭔가 새로운 것,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의미하고 목표한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비록 이 주장이 공식적인 가톨릭의 입장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요소들의 변화에 대한 교회 사이의 어떠한 불일치를 극복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다고 여겨진다. 
둘째는 루터의 교리인 공재설이다. 가톨릭 교회는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마 26:26, 28)라는 구절의 “이다”에 근거하여 화체를 주장하는 반면, 루터에 의하면 떡과 포도주는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로 존속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마치 불이 타고 있는 나무를 투과하고 감싸듯이, 떡과 포도주라는 요소들 “안에, 함께, 그리고 아래에” 임재한다. 루터는 그리스도가 영적으로가 아니라, 육적으로 임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성만찬을 아무 생각없이 먹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비판에까지도 현존하신다. 
셋째는 츠빙글리의 기념설이다. 츠빙글리는 루터에 반대하여 “이것은 나의 몸이다”를 “이것은 나의 몸을 뜻한다”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상징에 불과하며, 성만찬은 과거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기념의 의식이요 공동체의 고백의 행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넷째는 칼빈의 견해를 바탕으로 하는, 개혁교회 전통의 중심적인 줄기에서 발견되는 성령임재설이다.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참 임재를 확신한다는 점에서 가톨릭과 루터교도들과 일치하지만, 이것의 특별한 강조점은 그리스도가 성령의 연합시키는 능력을 통한 신앙에 의해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인간적 육신은 하늘로 올라갔으며 하나님의 오른편이라는 장소에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수많은 교회의 모든 제단 위에 놓여 있는 떡과 포도주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성만찬은 상징에 불과하다는 츠빙글리의 견해도 옳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서 내려와 수많은 제단에 편재하며 신자들의 입 속에 들어간다는 루터의 표상도 옳지 않다. 칼빈은 우리가 믿음으로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그리스도가 그의 영의 능력으로 우리를 그에게로 연합시킨다고 주장한다.  

5. 그리스도는 부활하고 승천하시어 하늘에 계시는데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한가?

그 대답은 성령이다. 칼빈은 「제네바신앙문답」에서 보다 명료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있고, 우리는 지상을 순례하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질에 참여하게 되는가를 말한다. 이 간격은 “장소의 간격에 의해 분리되어 있는 것들을 결합시키는 그의 영의 알 수 없는 힘”으로 넘을 수 있게 된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성령을 “연결의 줄”이라고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영은 수로와 같아서 그리스도 자신의 모든 성질과 소유는 그 수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Inst. Ⅳ.17.12). 
그런데 여기서 약간 복잡한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는 승천한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마음을 들어 올리고 거기서 어떻게든 그를 먹는다는 것인가? 아니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영에 의해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그 요소들에 참여를 통하여 우리를 영적으로 먹이신다는 의미인가? 둘 다 맞는 말이지만, 강조는 전자에 있다. 칼빈은 주로 “성례전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계시는 지극히 높은 하늘에 우리의 마음을 들어 올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그 요소들 안에 담겨 있거나 둘러 싸여 있다는 어떠한 개념에 대해서도 반대하며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끌어내리는 사람들을 조롱하였다(Inst. Ⅳ.17.31; 참고. Inst. Ⅳ.17.18).
그러나 칼빈은 또한 만찬에서 우리를 먹이시기 위해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비유적으로 말하기도 하였다.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하여 그는 그의 자리를 바꾸지 않지만, 그러나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의 육체의 효력이 우리 안에 현재하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살과 피의 본질로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려고 외형적인 상징과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신다고 말한다”(Inst. Ⅳ.17.24). 그러나 이 “내려오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문자적으로 내려오고 그 요소들 안에 둘러싸인다는 식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셔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들어 올리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Inst. Ⅳ.17.16).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임재 방식에 대한 칼빈의 이러한 설명은 어떤 독자들에게는 혼란스러울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얼마간 위로가 될 것이다. 그는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지성으로는 이 신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이 신비의 숭고함을 나의 유치한 척도로 헤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오히려 나는 독자들이 이 너무도 좁은 범위 내에 정신적 관심을 국한시키지 않고 내가 인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이 올라가도록 노력하기를 바란다. 나는 이 문제를 논할 때마다, 모든 것을 말하려고 애쓴 후에도 이 문제의 중요성에 비해서 말한 것이 아직도 적다는 것을 느낀다. 나의 지성은 나의 혀가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지성조차 문제의 위대성에 압도된다. 그러므로 이 신비 앞에서는 오직 경탄할 수밖에 없으며 지성도 생각을 할 수 없고 혀도 표현을 할 수가 없다(Inst. Ⅳ.17.7).

칼빈은 이 주제에 대한 논의를 “나는 그것(비밀)을 이해한다기보다 경험한다”(Inst. Ⅳ.17.32)는 말로 결론을 내린다.

6. 로마 가톨릭의 미사와 개신교의 성만찬은 어떻게 다른가?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은 주님의 만찬과 로마 가톨릭의 미사 사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 성만찬은 그리스도 자신이 이미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유일회적인 희생을 통하여 우리가 모든 죄를 완전히 용서받았다는 사실과 또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증하는 예식이다. 그러나 미사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하여, 지금도 날마다 미사를 집행하는 사제에 의해 그리스도가 제물로 바쳐지지 않으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한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과 또 그리스도는 육체적으로 떡과 잔의 형태 가운데 계신다는 것, 따라서 그 형태 가운데서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적인 희생과 고난을 부인하며, 따라서 배격되어야 할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성만찬에 대한 논의를 끝내면서 한 장(제18장)을 할애하여 미사를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자기를 골고다의 희생제물로 내어준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계시므로 그의 대리자 곧 미사를 집행하는 사제가 그의 자리에 대신 등장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2).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사제들이 희생제물을 반복하여 바치는 것은 골고다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유일회적인 희생의 죽음을 폐기시키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죽음을 다시 요구하는 불경이다(3, 5). 미사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시려면 매일 희생이 되어야 한다고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성만찬을 폐기한다(7). 이러한 견해들은 성경이나 교부적인 옹호를 받지 못하고(9), 다수의 부패들을 포함하고 있다(14). 기본적인 오류는 화목으로서의 제사와 찬양 혹은 감사로서의 제사를 구분하지 못하는데 있다.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이 화목의 제사를 드리셨다(13). 우리가 지금 예배에서 드리는 제사는 찬양과 감사의 제사이다(16).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도 미사의 ‘희생제사적 본질’을 계속 강조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제사적 특성을 강조하면서도 과거에 소홀히 하던 찬양과 감사의 요소를 미사의 구조 속에 도입하고 있기도 하다.

7. 성만찬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BEM 문서」(1982)는 성만찬의 의미를 사도신경 혹은 니케아신경의 내용 순서를 따라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성만찬은 교회가 모든 피조물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대제사이다. 땅의 소산이자 인간의 수고의 결실인 떡과 포도주는 신앙과 감사 속에서 하나님께 봉헌된다. 이렇게 온 세계가 떡과 포도주 안에서 하나님께 바쳐진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온 세계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수 있는 감사와 찬양의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는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로 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둘째, 성만찬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이다. 곧 성만찬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가 성취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게 한다는 것이다. 「BEM 문서」는 여기서 성만찬 예전과 말씀 예전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언급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이 성만찬의 내용 바로 그것인 것처럼, 또한 선포된 말씀의 내용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성만찬과 선포된 말씀은 서로를 보강한다. 즉 올바른 성만찬 거행은 말씀선포를 포함한다.”
셋째, 성령 초대로서의 성만찬이다. 곧 성령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말씀에 의해서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타내는 성례전적 상징이 된다. 교회는 이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현실적인 관계를 맺고 그로써 성화되고, 갱신되고, 정의와 진리와 일치에로 인도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능력을 부여받고,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며”, “새 창조의 생명과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 성령임재의 기원을 한다.”
넷째, 성만찬은 성도의 교제를 의미한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은 말씀과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관계, 나아가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대한 것이다. 「BEM 문서」는 여기서 성만찬에서 신자들의 수평적인 사귐의 관계가 일어난다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는 성만찬 예전은 교회 자신을 넘어서 역사와 사회 속에서의 그리스도교적 책임을 요구한다.

“성만찬 예전은 하나님의 한 가족 안에서 형제자매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들 간의 화해와 동참을 요구하며 사회, 경제, 정치적 삶 속에서 합당한 관계를 추구하도록 촉구하는 끊임없는 도전이 된다(마 5:23이하, 고전 10:16이하, 고전 11:20-22, 갈 3:28).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동참할 때 모든 종류의 부정의, 인종차별, 인종분리주의, 자유의 결핍이 근본적으로 도전받게 된다. 성만찬 예전을 통하여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인격과 존엄성을 회복시킨다. 성만찬 예전은 믿는 자들을 세계역사의 중심 사건에 개입시킨다.”

다섯째,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의 식사를 의미한다. 「BEM 문서」는 성만찬이 이미 역사 속에서 일어나고 있고, 종말적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는 예전이라고 말한다. 특히 본 문서는 성만찬 예전에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화해했고, 믿는 성도들 사이에 화해한 교회는 이 세계를 향해 화해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확언하며, 그리스도를 따라 소외되고, 억눌리고, 가난한 자들과 연대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Ⅲ. 성만찬의 실제

1. 성만찬은 얼마나 자주 거행되어야 하는가?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일반 신자는 1년에 한 번, 그것도 떡만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칼빈은 이 관습이 마귀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고(Inst. Ⅳ.17.46), 매주 거행하기를 바랐다(Inst. Ⅳ.17.43; Ⅳ.17.44). 그것은 떡과 포도주가 우리의 신체에 영양과 생명과 기쁨을 주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우리의 영혼에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Inst. Ⅳ.17.3; Ⅳ.17.10). 그러나 그의 견해는 로마 가톨릭 전통에 여전히 영향을 받고 있던 제네바 시의회에 의해 좌절되었고, 결국 일 년에 네 번 거행하는 베른의 관습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일본 개혁교회와 한국의 일부 교회들이 한 달에 한번 성만찬을 갖는 방식으로 성만찬의 횟수를 증가시킨 것은 다행스러운 타협으로 여겨지지만, 그러나 오래전에 바르트가 기포드 강좌(1937-38)에서 지적한 문제는 여전히 타당하다. 그는 오늘날 개혁교회의 문제를 성만찬이 없는 예배가 외견상으로도 불완전한 예배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그는 이 성만찬의 결여 때문에 오늘날 개혁교회의 예전을 개혁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점에서 개혁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성만찬을 통하여 심화되기 때문에 자주 거행되어야 하며, 특히 성만찬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것일 경우, 적어도 매주일 행해져야 한다는「BEM 문서」의 진술에 대하여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2. 성만찬의 떡은 어떤 것을 사용해야 하는가? 

원래 고대교회는 주식으로 먹는 떡을 사용하였다. 성만찬에서 무교병을 사용한 것은 동방교회의 전통이었는데, 그것이 9세기 이후 서방교회로 전해졌다. 11세기에 들어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지만, 교회는 분열의 원인을 이 차이에서 찾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교회는 1439년 플로랜스 회의에서 성만찬의 떡은 양쪽 다 사용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역시 개혁교회의 전통이기도 한데, 그렇지만 개혁교회는 서방교회의 전통을 보존한 루터교회와 성공회의 전통과는 달리 주식으로 먹는 떡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성만찬에서 사용할 떡은 성만찬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것, 곧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고운 밀가루로 따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3. 반드시 발효시킨 포도주를 사용해야 하는가?

발효시킨 포도주가 본질적인 것이라고 답할 수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진짜 포도주를 사용하셨다는 것과 그러한 포도주가 사도교회에서 사용된 것으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1:21).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떡과 포도주를 드심으로 이 세상의 것들을 그 쓰임새에 맞게 사용하셨고, 그로써 그가 무엇보다도 있는 그대로의 것들에 영향을 주고 변화시킬 수 있는 죄의 용서와 성화 그리고 영화의 능력을 지니셨다는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적포도주를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실 때 실제로 적포도주를 사용하셨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이 붉은 피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4. 성만찬 시에 떡과 포도주는 어떠한 순서로 분배되어야 하는가?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제정사에 따라서 떡과 포도주의 순서로 분배되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러나 교회들 가운데는 떡과 포도주를 동시에 분배하는 전통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동방교회는 신자들의 성만찬에서 그러하였다. 곧 잔에 떡을 띠우고, 사제나 부제가 숟가락으로 떡을 떠서 신자들에게 성만찬을 베푸는 것이다. 서방교회에도 비슷한 관습이 있었다. 곧 사제가 떡을 잔에 적시어 그것을 신자의 입속에 넣어준 것이다. 이러한 관습은 성공회에서 이어지고 있다.

5. 성만찬에는 어떠한 그릇들이 사용되어야 하는가?

츠빙글리는 나무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기를 원하였다. 그것은 주님의 만찬에 사용된 식기류들이 검소하였다는 것과 역시 주님의 만찬의 메뉴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 견해는 존중할만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아들의 어머니로 동정녀를 선택하셨듯이,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담기 위한 고상하고 귀한 재료로 만든 아름답고 품위 있는 그릇을 선택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초대교회의 집사 로렌티우스의 아름다운 말을 인용하자면, 교회의 참된 보화들은 가난한 자들이지 성만찬을 위한 그릇들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는 조건에서 그렇다.  
장자끄 폰 알멘은 여기서 가능한 한 많은 잔들보다는 하나의 잔을 추천한다. 그것은 우선 성만찬에 참여한 자들 사이의 일치를 나타내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많은 개신교회들에서 행해지는 것처럼 “성만찬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만큼 잔을 늘리는 것은 성만찬의 모임을 산산조각 내는 것이고 위생과 구원을 위험스럽게 혼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위생에 철저한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잔을 사용하도록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대안으로 집례자(혹은 배잔을 맡은 이들)가 미리 준비한 잔을 들고 나오는 신자들의 잔에 성별한 포도주를 따라주는 방식을 채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6. 누가 분병/배잔을 할 것인가?

가장 일반적인 전통에 의하면 장로는 물론 집사들도 배잔에 참여하였다. 떡은 성만찬의 예식을 집례하는 인도자에 의해 분병되었고, 잔은 장로나 집사들에 의해 배잔되었다. 이 방식은 신자들이 줄을 지어 성만찬에 참여할 때 권할 만하다.

7. 분병/배잔 시에 신자들은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동방교회에서 지속되고 또한 개혁교회가 받아들인 옛 전통은 성만찬을 서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세주를 영접하기 위해서 우리가 일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주일에, 이 서 있는 자세는 가장 올바른 그리스도교회의 예배의식적인 자세로 고대교회로부터 행해지던 관습이다. 무릎을 꿇고 영성체를 받는 것을 전통으로 여겼던 로마 가톨릭 교회도 최근에는 서서 영성체를 받는 것으로 관례를 규정하고 있다.

8. 떡은 성만찬에 참여한 사람의 손에 주어야 하는가, 입에 넣어주어야 하는가?   

사제가 떡을 직접 신자들의 입에 넣어주는 관습은 9세기 이후에 생겨났다(입영성체). 이것은, 13세기경에 신자들이 잔을 엎질러 주님의 피를 모독할까 두려워 신자들을 포도주의 성만찬에서 제외시켰듯이, 성별된 떡의 한 조각이라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만든 관습이었다. 16세기 사람들이 ‘미신적인’ 것이라고 일컬었던 이 관습은 부분적으로 루터교회와 성공회에서는 지속되었는데, 개혁교회는 손에 주는 방식을 택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도 이 방식은 일반화되고 있다(손영성체). 이것은 손으로 떡을 받을 때, 우선 두 손바닥을 위로 펴서 오른손으로 왼손을 바치고(십자가 모양), 왼손으로 떡을 받은 다음, 오른 손으로 떡을 집어 먹는 방식이다. 

9. 분병/배잔 시에 말씀을 덧붙여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때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널리 통용되는 예배의식 전통은 성만찬의 때에 어떤 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물음에는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다음과 같은 말들이 말해졌다.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것은 가장 오래전부터 사용된 관용적인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천상의 떡입니다”(히뽈리트의 사도전승).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당신을 지키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소서”(암브로시오 양식). “여기 하늘에서 내려온 그리스도의 몸인 생명의 떡이 있습니다”(에티오피아 전승). “여러분을 위해 죽으신 예수의 몸을 들고 먹으십시오”(칼빈의 제네바교회 예배의식).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1563년의 팔라티나트 개혁교회예배의식). “당신을 위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당신의 몸과 영혼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지켜주십니다”(옛 성공회 예배의식). “여러분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그분께 감사를 드리십시오”(1713년의 J. F. 오스터발드의 예배의식). 잔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들이 말해진다. 이때 성만찬을 받는 사람들은 ‘아멘’으로 응답한다. 이것은 아멘이 “예, 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피라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10. 성만찬의 남은 요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혁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에 사용하고 남은 것은 성례전적인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확고한 원칙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례전적인 일치 속에 들어간 피조물은 존중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이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인가? 루터는 다음과 같은 방식을 추천한다. 우선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기 전에 필요한 양의 떡과 포도주를 정확히 예측하여 가장 적은 양이 남도록 하고, 남은 요소들을 가지고 병으로 인해 출석하지 못한 교우를 방문하여 성만찬을 거행하거나, 그래도 여전히 떡과 포도주가 남는다면 목사와 장로, 집사들이 나누어 경건하게 먹는 것이다. 
혹 성만찬을 거행하다가 성별한 떡과 포도주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자연스럽게 필요한 만큼의 떡과 포도주를 성별한 떡과 포도주에 더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우리가 회개하여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11. 세례 받지 않는 사람들도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가?

개혁교회는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만을 성만찬의 자리에 초청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입장은 존중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물음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답하는 좀 다른 관점을 소개하려고 한다. 「BEM 문서」에서 확인되는 대로 오늘날 세계교회는 성만찬을 현재의 고통 한 가운데서 정의와 자유와 평화라는 다가올 메시아적인 통치에 대한 기쁨의 선취로서 이해한다. 성만찬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새롭고 해방되고 화해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구체적인 표징과 날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는 이 성만찬 예식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이들에 의하면, 교회 안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이 식탁에 초대되지만, 그러나 가장 특별하게는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이다(눅 14:15-24). 

Ⅳ. 나가는 말

일반적으로 츠빙글리를 제외한 모든 개혁자들은 성례전에 대한 탁월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또한 개혁교회는 항상 잘 정의된 완전한 예배모범을 소유해 왔다. 칼빈이 직간접으로 참여했던 『스트라스부르 예배의식』(1540-45)과 『제네바 예배의식』(1542)으로부터「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1563)의 편람인 『팔라티나트 개혁교회 예배의식』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이 그것이며, 우리는 『희년 예배서』(2003)를 갖고 있다. 이 예배의식서들은 하나같이 성만찬을 교회의 예배의 본질적 요소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개혁교회가 세간의 오해와 달리 비예전적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칼빈의 의사와는 다르게 일 년에 단 4회의 성만찬을 거행하는 것을 관례로 여겨왔다. 이것은 분명히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완전한 예배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개혁교회는 성만찬을 포함하는 예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만이 개혁교회의 예배갱신을 위한 노력이 유익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개혁교회는 루터교회와 성만찬 신학에서 합의점을 찾아낸바 있다. 이것은 성만찬 신학에서 루터교회와 많은 점에서 유사점을 갖고 있는 로마 가톨릭과도 멀지 않은 장래에 합의점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가톨릭과 유사한 성만찬 신학을 지닌 동방교회와의 합의도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개혁교회는 성만찬의 실제적 측면에서 이 다양한 교회들로부터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는 말은 성만찬의 문제에서도 역시 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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