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57)

영국의 종교개혁(1)




제4장 영국 종교개혁


옥스포드 대학 교수 위클리프(Wyclif)의 개혁운동의 영향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에 미쳐 갔다. 그리고 대륙의 인문주의의 새 학문운동과 루터와 칼빈의 사상이 영국의 옥스포드와 캐임브리지 대학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위클리프가 번역한 영어 성서가 널리 읽히고 있었고 영국 교회의 개혁과 혁신을 열망한 인문주의 학자들이 날로 많아져 갔다.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서와 그 밖의 당시 교회를 비판한 그의 저서들이 보급되었었다. 특히 캐임브리지 대학의 교수들이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들의 지도자였던 토마스 빌니(Thomas Bilney)가 1531년에 이단자로 화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 대학의 졸업생들과 젊은 신부들에게 준 그의 영향은 대단히 컸었다.

영국 국내에 종교개혁 사상이 점점 퍼져 감에 따라 정부 당국은 종교개혁 사상가들을 색출하고 박해하기 시작하여 대륙으로 피난 간 학자들이 있었다. 옥스포드 대학과 캐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윌리암 틴달(William Tyndal, 1494~1536)은 영국에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할 수 없어서 독일로 가서 루터의 도움을 받으면서 신약성서의 영어 번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서와 루터의 독일어 신약성서를 참고하였고 구약의 모세오경도 번역하였다. 1525년에 그의 영어 신약성서가 독일 보름스(Worms)에서 인쇄되어 출판되었다. 성서 번역을 엄금하고 있던 이때 틴달이 번역한 신약성서를 무역회사의 한 수입상품으로 가장하여 들여왔다. 그는 자기가 번역한 그 신약성서를 여러 번 수정하여 재판하였고, 성서를 번역한 것이 발각되어서 화형을 받아 죽었다. 영국의 인문주의 학자들은 영국의 종교개혁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1. 헨리 8세의 정치적 종교개혁

영국의 왕 헨리 8세(1491~1547)는 18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의 왕후는 스페인 왕실의 공주였는데 헨리 8세의 형 아더(Arthur)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과부가 된 여자, 곧 그의 형수였다. 형수와 결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의 부친 헨리 7세가 과부가 된 카데린(Catherin)이 결혼할 때 가져온 지참금이 탐났다기 보다는 그 돈이 필요해서 카데린이 시동생 헨리 8세와 약혼하게 만들었다. 당시 결혼은 가톨릭교회의 일곱 가지 성례전 가운데 하나가 되는 신성한 성사(聖事)였다.

헨리 7세는 헨리 8세와 카데린의 결혼 허가를 로마교황청에 신청했는데 교황은 정치적으로 배려하여 결혼을 허가했다.

이때 헨리 8세는 겨우 13세였고 카데린은 19세였다. 두 사람은 결혼 초기 서로 사랑하였고 아이를 몇 명 낳았는데 다 죽고 여식 매리(Mary)만 살아남았다. 헨리를 자기의 왕위를 이을 아들을 갖기를 원했으나 카데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카데린과의 결혼이 잘못된 것이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줄로 생각하고 앤 볼린(Ann Boleyn)이라는 매력적인 여인을 사랑하기 시작하여 카데린과의 이혼을 결심하고 그의 신도들의 양해를 얻어 카데린에게 이혼을 청하였다.

카데린이 이혼을 거부하여 문제가 오랫동안 복잡해졌고 교황은 헨리의 이혼 청원을 허가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결혼은 성사의 하나인데 이혼은 그 성사를 모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특히 카데린의 친정인 스페인 왕이며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칼 5세는 카데린의 조카였고, 그의 권세는 영국의 왕을 위협하고도 남을 만한 것이어서 교황은 칼 5세를 무시할 수 없었다.

헨리 8세는 칸타베리의 대주교 월시(Wolsey)를 앞세우고 교황청의 허가를 재촉하였으나 월시는 성공하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그의 후임으로 영국 교회의 대주교가 될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0~1556)는 캐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였고 1523년경에 신부로 안수 받았다. 후에 그가 칸타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는데 루터가 95개조 항의문을 발표한 몇 해 후였다. 이제 그가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를 다뤄야만 했다. 그는 학식과 경건을 겸비하였고 생래 보수적이었으나 존경을 받던 지도자였다. 그는 국내 대학들의 교수진에게 헨리의 이혼 문제를 논의하게 하여 이혼을 합법적인 것으로 여론을 유도할 생각이었다. 교수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토론한 후 헨리와 카데린의 결혼이 본래 잘못된 것으로 단정하고 이혼이 합법적이라는 의견을 제출했다. 헨리 8세는 그동안 자기의 이혼에 대하여 대륙의 종교개혁자들의 동의를 얻으려고 크랜머를 통해 루터와도 접촉했으나 루터는 이혼은 어떠한 이유로도 불가하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헨리는 이제 국내 대학 교수들의 동의에 힘입어 영국의 종교개혁을 정치적으로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당시 로마교황청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간 후로 교황청을 지지할 생각이 줄어들었고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가 항상 불화상태였으며, 아비뇽 교황청의 로마 복귀 문제로 분열이 생겨 교황이 두 명 또는 세 명이 생겨 대립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헨리 8세는 교황이 자기의 이혼을 반대한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영국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로마교황청과의 재래의 모든 관계를 끊는 분열을 선언하였다. 그가 이것을 1530년에 선언하고 「수장령」(Praemunire)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고 영국에서 영국의 왕인 자기가 “유일한 보호자이며 유일한 최고의 군주(lord)이며, 또 그리스도의 법이 허락하는 한에서 최고의 머리(head)이다”고 규정하였다.

이 칙령은 헨리 8세가 영국의 정치적 수장이며 동시에 영국교회도 자기의 지배 아래 있게 된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 즉 영국교회의 행정, 재정, 제도 등 모든 문제를 자기가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칙령은 헨리 8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어서 그의 후계자들이 자기들의 권한을 위하여 새롭게 선포할 수 있는 것이었다.

1533년에 헨리는 앤(Ann)이 임신한 것을 알고 비밀히 결혼식을 올리고 그녀와의 결혼을 합법화시켰다. 여기서 태어난 딸이 엘리자베스였다. 카데린은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 무렵 칸타베리 대주교였던 와함(Warham)이 죽고 토마스 크랜머가 로마교황청의 승인은 받고 대주교가 되었고, 이 해 3월에 영국 국회는 로마교황청의 개입 없이 영국 교회는 영국 교회의 문제를 자주적으로 결정할 것을 선포하고 영국 교회의 모든 감독을 영국 교회가 임명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헨리 8세의 카데린과의 이혼을 합법화했다. 로마교황청은 여전히 그들의 결혼히 합법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혼을 반대하였다. 1534년에 영국 국회는 로마교황청에 납부하던 소위 ‘베드로의 동전’이라는 헌금을 보내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1534년 말에 영국 국회는 헨리의 수장령에 첨가하여 “영국의 왕은 교회의 수장이다”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 새 칙령은 많은 반대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수 명의 수도사들과 전 캐임브리지 대학 학장 죤 피셔(John Fisher) 추기경과 「유토피아」를 쓴 인문주의 학자 토마스 모어도 사형되었다. 모어는 한때 헨리 8세와 친근한 사람으로 높은 관직까지 가졌던 사람이었다. 피셔와 모어의 처형은 서부 유럽의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이제 헨리는 영국에서 국가와 교회를 장악한 강력한 독재군주가 되었다.

헨리는 이제 대담하게 영국 교회를 다스리기 시작했고 먼저 국토의 6분의 1을 소유하고 있던 영국의 수도원들을 통폐합하였다. 수도원 소유의 땅들에 대하여 국가가 면제해주었던 막대한 세금이 이제 영국 국고에 들어오게 하였다. 헨리는 그 돈을 가지고 새 교구와 학교와 대학교수 수를 늘렸고, 소유가 없는 수도사와 수녀들에게 연금을 지불하여 주었다. 영국 교회의 고위 감독들과 수도원장들에 대한 인사권을 헨리가 쥐게 되었다. 그는 여전히 가톨릭교회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는데, 미사 때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부인하거나 신부독신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여섯 가지 신조」(Six Articles)를 1539년에 발표하였다. 이 신조의 한 가지라도 어기는 사람은 처형되었다. 그리고 성서의 영어 번역도 반대하여 틴달이 처형되었고 그 전의 성서번역자 위클리프의 무덤에서 해골을 파내어 화형하였다. 그러나 미사는 영어를 사용하여 집행하게 하였다.

헨리 8세의 영국 교회는 보수적인 가톨릭 신앙을 보존하였고, 라틴어 성서와 큰 영어 성서 두 가지를 교회당에 배치하여 평신도들이 읽게 하였다. 그리고 캐임브리지 대학의 교수들로 하여금 틴달이 번역한 성서를 검토하고 라틴어와 희랍어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게 하였는데, 쯔빙글리와 루터가 번역한 성서도 참고하였다. 헨리는 왕비 앤에게서 득남하지 못하여 세 번째 결혼한 제인 세이머(Jane Seymour)에게서 아들 에드워드(Edward)를 얻고 1547년에 죽었다. 그의 임종을 지켜본 대주교 크랜머는 헨리의 행위에 반대하고 간섭한 적이 많았지만 헨리는 그를 신임하고 그의 적수들을 물리치고 그를 보호하여 주었다.

2. 에드워드의 종교개혁

16세의 어린 왕자 에드워드(1537~1553)가 왕위에 올랐다. 그를 보좌한 크랜머 대주교와 귀족들이 프로테스탄트의 노선을 택하였다. 하트포드(Hartford)와 소머셋(Somerset) 공작이 왕을 보좌하게 되었고 에드워드 치하의 제 1회 국회에서 헨리 8세가 종교개혁사상가들을 처벌했던 「여섯 가지 신조」를 폐기하였다. 그리하여 성서 번역과 출판을 제한했던 법을 없애고 자유롭게 하였고 종교개혁 서적의 간행도 자유롭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당에서 성상(聖像)들이 철거되었고 어떤 곳에서는 성상타파의 과격한 운동으로 교회당의 모든 성상이 없어졌다. 

크랜머는 「제일예배지침서」(The First Book of Homilies)를 발행하여 예배의식을 개혁하였고, 예배 때 영어 성서에서 복음서와 서신을 반드시 읽게 하였고, 성전에 있던 성상들 가운데 역사적이고 가치 있는 것은 보존하였다. 신부에게 사적으로 고백하던 고백행위는 금지하고 공중 앞에서 하는 고백을 허용하였고 라틴말로 드리는 미사는 존속시켰다. 이때 독일 스트라스버그에서 한때 칼빈과 동역하던 부쳐가 영국에 와 있었는데 그에게 교회 개혁의 한 직책을 맡겼다. 성만찬 의식에 관한 뜨거운 논쟁이 일어나서 미사를 폐지하는 문제로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신부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1549년에 「통일법령」(Act of Uniformity)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크랜머와 그의 동료들이 만든 「공동기도서」(The Common Book of Prayer)에 따라 신부들이 교회 예배를 인도하도록 하여 혼란을 막았다. 그는 쯔빙글리의 신학을 따라 성만찬 때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임재한다는 주장을 배격하였다. 국회에는 보수주의자들이 있어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예배의 전통을 고집하였으나 크랜머가 작성한 예배지침서는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성만찬 의식과 예배의 좋은 점들을 살리려고 한 것이었다. 1552년에 발표한 「제 2 기도서」에서는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와 십자가 그리기와 신부의 제복과 성상에 관한 기도와 교회법을 폐지하였다.

1553년에 「42 신조」(The Forty-two Articles)가 제정되어 영국 교회의 신조가 되었는데 이것도 크랜머가 만든 것이었다. 이렇게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이 추진되어 갔지만 영국 국내에는 옛날 가톨릭교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았다. 런던과 동남부 지방에 살던 상업 종사자들은 유럽 대륙에 가까워서 개혁운동에 더 많이 동조하였다. 에드워드는 본래 병약한 체질이어서 단명으로 사망하여 그가 이룩했던 6년 간의 개혁운동이 중단되었다.

3. 매리 여왕의 가톨릭 정책

매리는 충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가톨릭교회가 박해를 받은 것과 자기 모친의 비운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헨리 8세의 장녀의 자격으로 영국의 여왕이 되었다. 그녀는 1553년, 37세 때 등극하여 불과 5년 동안 통치하고 사망하였으나 그 짧은 기간에 에드워드 6세가 이룩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완전히 전복시켰고 그녀가 이단자로 정죄한 300명이 피를 흘려 ‘유혈 여왕’(Bloody queen)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매리 여왕은 「수장령」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자신이 영국의 정치적 및 종교적 수장임을 선포하고 영국 내 가톨릭의 재건과 회복을 꾀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칸타베리의 대주교 레지날드 폴(Reginald Pole)이 로마교황청의 대사가 되어 영국에 주재했고 에드워드 6세 때 임명되었던 교회 감독들이 다 파면됐다. 그리고 헨리 8세 말기에 사용하였던 예배지침서가 회복되었고 가톨릭 미사 예식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리고 헨리 8세가 단절했던 교황청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매리는 영국인과 결혼하라는 국회의 권고를 무시하고 스페인의 자기 사촌 필립(Philip)과 결혼하였다. 필립은 장차 칼 5세를 이어서 스페인의 왕이 될 사람이었다. 매리는 토마스 크랜머에게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하였으나 그가 완강히 거부하여 여섯 번이나 투옥했다가 나중에 처형하였다. 크랜머는 영국에서 신•구교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옥에서 나오면서 성모 마리아의 형상을 보고 기도하지 않고 주기도를 드리고 숨졌다. 매리와 필립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4. 엘리자베스 여왕의 성공회 확립

엘리자베스 여왕(재위 1558~1603)은 매리의 이복동생이다. 매리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영국 국민은 매리와 필립 사이에 무자식이었던 것을 큰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엘리자베스는 45년간의 장기통치를 통하여 영국의 정치를 안정시키고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고 더 나아가서는 식민지를 많이 확보하여 경제부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성공회(Anglicanism)를 영국 국교로 확립했는데 이 모든 과정에서 그녀가 발휘한 통치력은 실로 위대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바랐던 것은 영국을 복지국가로 만들고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양분되어 있던 나라의 분열을 치유하고 통일을 이룩해내는 것이었다. 로마교황청은 엘리자베스가 헨리 8세의 불륜에서 태어났으므로 합법적인 여왕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관계 회복을 바랐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자기 부친 헨리 8세의 생각처럼 영국을 독립된 강력한 왕권국가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과의 관계 회복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영국 국민들 중에 가톨릭 신앙을 원하는 부류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원하는 부류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양자를 다 만족시킬 만한 종교를 원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두 종교 사이에 설 수 있는 종교를 세우기 위하여 때로는 양 편의 두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였고 가톨릭 신자들과 프로테스탄트 급진파의 마음에 들게 할 수 없었다.

이때 영국에는 대륙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사상의 여러가지 조류와 운동이 들어와 있었다. 이때 유럽 대륙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는 로마가톨릭 세력의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루터교회와 개혁파교회의 교세는 부진 상태였다. 그리고 영국은 프랑스와 전쟁 상태에 있었는데 스페인과 프랑스는 영국을 타도하기 위하여 비밀협정을 추진하고 있었고 스페인의 왕이자 죽은 여왕 매리의 남편 필립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때 영국 인구의 3분의 2가 가톨릭이었다.

이러한 국내외의 상황은 영국의 정치의 추이를 주시하고 있었고,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종교적 정책이 유럽 대륙의 프로테스탄트 종교의 성쇠에 크게 기여할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1559년에 국회를 통하여 「수장령」을 통과시키고 헨리 8세의 대(對) 로마교황청 정책을 회복해서 교황청과의 관계 단절을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완전한 자주 왕국임을 재천명하고 영국의 종교정책을 “et cetra” 정책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이렇고 또 저렇고’라는 뜻이어서 어떤 정책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에드워드 6세가 1552년에 제정한 「제 2 기도서」를 개정하여 채용하기로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기도서를 성직자회의에서 통과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대한 성직자 200명이 파면되었다.

이 개정된 기도서에 따르면, 미사와 모든 예배에서 영어를 사용하고, 성만찬 예식에서 평신도들에게 떡과 잔 두 가지를 다 돌리기로 했다. 또 성찬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예식이며,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의미하는 말을 금지하며, 연옥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하며,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를 하지 말 것이며, 성직자의 의상을 간소화 할 것이며, 신부(priest)라는 말 대신 목사(minister)라는 말을 사용할 것이며, 성찬대를 제단(altar)이라 부르지 말고 식탁(table)이라 부를 것이며, 성만찬 의식을 ‘eucharist’(감사예전)이라고 부르지 말고 ‘commenmoration’ 즉 기념예전이라고 부를 것 등을 명시했다. 성만찬에 대한 이러한 신학은 쯔빙글리의 신학을 본뜬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종교적인 성상과 성물(聖物)을 제작하지 못하게 하였고, 승천절 축제 때를 제외한 축제행렬을 금지했고, 성만찬 예전 때의 큰 행렬도 금지했고, 무릎 꿇고 기도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에드워드 6세 때 크랜머가 만든 42개 신조를 수정하여 39개 신조를 만들어서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것이 영국성공회의 신조가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성공회 제도의 확립을 강력하게 반대한 세력은 가톨릭 신도들이었다. 로마 교황 비오 5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퇴위를 촉구하는 교서를 1570년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영국 내 가톨릭 신도들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여 그들이 불이익을 받게 하였고, 그들은 잠재적인 반역자들로 인식되었다. 그들이 국법을 준수하면서 주일날 교회에 갔는데 이제는 그것도 반국가 음모로 의심을 받았다. 실제로 로마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 대부분이 반국가와 반여왕 음모에 가담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에 들어오는 로마교황청의 사절을 냉대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 재임 동안 가톨릭 신자 200명 이상이 사형당했다. 특히 예수회 수도승들이 반국가 음모를 계략하였었다.

스페인과 프랑스가 비밀협정을 맺고 영국을 정복할 계획으로 스페인의 무적함대로 알려진 강력한 아르마다(Armada) 함대가 영국 해협을 침략하여 들어왔다. 영국이 약세였으나 이때 강한 폭풍이 불어와서 영국 함대가 유리한 상황에서 적함을 대패시켰다(1588년). 이때부터 스페인 함대는 무력하게 되었고 대서양과 인도양에서 영국 해군이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그 힘으로 영국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및 아시아 대륙으로 식민지 개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지를 빼앗기도 했다.

영국이 신•구교의 중도적인 성공회 제도를 국교로 확립하여 영국 내 가톨릭 세력이 무력화되었고 밖으로는 스페인과 프랑스 두 가톨릭 국가의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가톨릭교회 세력이 약화되어 유럽 대륙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의 확장과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영국의 식민정책으로 영국 교회가 식민지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세계선교의 길을 텄다.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16세기 칼뱅은 충분히 진화론적 사유를 하고 있었다"

이오갑 강서대 명예교수(조직신학)가 「신학논단」 제117집(2024 가을호)에 '칼뱅의 창조론과 진화론'이란 제목의 연구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정태기 영성치유집단이 가진 독특한 구조와 치유 의미 밝혀

정태기 영성치유집단을 중심으로 집단리더가 구조화된 집단상담 프로그램에서 무엇을 경험하는지를 통해 영성치유집단이 가진 독특한 구조와 치유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김학철 교수, "기독교 신앙인들이 진화론 부정하는 이유는..."

연새대 김학철 교수(신학과)가 상당수 기독교 신앙인들이 진화론을 부정하고 소위 '창조과학'을 따르는 이유로 "(진화론이)자기 신앙의 이념 혹은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원효의 체상용의 삼위일체론

아우구스티누스 사상과 원효의 체상용의 불교철학 사상을 비교 연구한 글이 발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손호현 교수(연세대 신과대학)는 얼마 전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해 창조 신앙 무력화돼"

창조 신앙을 고백하는 한국교회가 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신앙이 사사화 되면서 연대 책임을 물어오는 기후 위기라는 시대적 현실 앞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마가복음 묵상(2): 기독교를 능력 종교로 만들려는 번영복음

"기독교는 도덕 종교, 윤리 종교도 아니지만 능력 종교도 아님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실존적 현실이 때때로 젖과 꿀이 흐르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특별기고] 니체의 시각에서 본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무신론자", "반기독자"(Antichrist)로 알려진 니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유대인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인? 무종교인들의 증가는 기성 종교에 또 다른 도전"

최근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종교인의 성격을 규명하는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정재영 박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교와 사회」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신의 섭리 숨어있는 『반지의 제왕』, 현대의 종교적 현실과 닮아"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의 섭리와 『반지의 제왕』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성서학)는 「신학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