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이화대학교회 장윤재 담임목사 설교]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2025년 8월 17일 주일예배

jangyoonjae
(Photo : ⓒ베리타스)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창세기 2:18-20a, 빌립보서 2:1-4, 마태복음 20:25-28

설교문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길 원합니다. 행복할 때 좋지요. 웃음이 나오고, 마음이 가볍고, 감사가 저절로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언제 정말 '깊은 행복'을 느끼셨나요? 물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여행을 갔을 때, 혹은 내가 목표한 것을 성취했을 때 느끼는 기쁨이 행복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행복한 것을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었을 때, 그래서 그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는 것을 보았을 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느끼는 행복은 '자기만족'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행복입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아서 엄마나 아빠가 끼니를 굶었다고 합시다. 하지만 자기 아이 앞에 밥 한 공기가 놓이고 그 밥이 아이 입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볼 때, 부모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충만한 행복'을 느낍니다. 배고픔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립니다. 이처럼 부모의 행복은 자기 배를 채우는 데 있지 않고, 아이의 웃음과 건강,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해지는 '사랑의 기쁨'에서 나옵니다.

가톨릭교회의 고(故) 프란치스코 교황은 화려한 권위보다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의 곁에 서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라 믿고, 끊임없이 개혁을 추구한 겸손한 목자였습니다. 그는 "가장 가난하고, 가장 힘없고,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부드러운 사랑으로 끌어안는 것이 교황이 해야 할 일입니다"라고 말하며, "우리는 찻잔을 앞에 놓고 신학이나 논하는 점잖고 위엄 떠는 신자가 [아니라]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방법을 찾는 용감한 신자가 돼야 합니다"라고 말했었습니다.

그가 남긴 여러 메시지 중에 오늘 공동 기도문으로 함께 읽은 것이 그의 <행복 메시지>입니다. "강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으며 / 태양은 스스로 비추지 않고 / 꽃은 자신을 위해 향기를 퍼뜨리지 않듯 /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연은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강물은 흐르고, 빛은 비추고, 나무는 열매를 맺고, 꽃은 향기를 흩뿌립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존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 흐름이 멈출 때 자연은 병들고 고통받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어서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를 돕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 아무리 어렵더라도 말입니다. / 인생은 당신이 행복할 때 좋습니다. /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이 메시지를 마무리합니다. "잠시 생각해 보세요 / 당신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었을 때를... / 그때가 당신이 가장 행복했을 겁니다." 이 역시 깊은 진실입니다. 우리가 자기만을 위해 살기 시작할 때 오히려 우리의 기쁨은 메말라갑니다. 우리의 행복은 공허해집니다. 신기하게도 인간은 서로 돕고 나눌 때 살아납니다. 내가 누군가의 기쁨이 되었을 때 내 안의 '인간다움'(humanity)이 살아납니다. 나의 존재가 뿌듯해집니다.

과학자들도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면, 인간의 뇌는 더 큰 행복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이타적 행동이 주는 기쁨은 단순한 도덕적 만족을 넘어 실제 생리적인 보상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타인을 도우려 행동할 때 '사랑의 호르몬'이라 불리는 옥시토신과 '행복의 호르몬'이라 불리는 도파민이 증가합니다. 사실 생명의 역사는 경쟁만이 아니라 공생의 역사입니다. 저명한 여성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는 우리의 몸을 이루는 진핵세포(眞核細胞)가 여러 미생물이 서로 협력한 결과로 탄생한 것임을 밝혀내면서, 생명의 큰 흐름은 경쟁이 아니라 '공생'(共生, symbiosis)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의 기본 구조는 '함께 살아감'입니다. 서로의 행복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생명의 깊은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의 질서는 함께 나누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때 느끼는 기쁨은 진심입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때 '가장 깊은 행복'을 느끼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타인을 위해 살아갈 때 가장 인간다움을 누리도록 설계된 존재입니다. 이것이 우리 존재의 진실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28, 마가복음 10:45)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킬 때 '신자'(神子, 하나님의 아들)라는 호칭보다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라는 이름을 더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이 단순히 초월적인 존재로만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사람들 속에 있는 참된 인간으로, 곧 우리의 연약함과 질고와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가장 높이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왕의 자리에 앉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무릎을 꿇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병든 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소외된 자들과 식탁에 마주 앉으셨으며, 치욕의 십자가에까지 나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느니라."(요한복음 13:15-17) 예수님은 행복은 받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 데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직접 그렇게 사셨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누는 건 어려운 일이야, 내가 먼저 풍족해야 하지.' 또 어떤 분은 말합니다. '섬김은 종교적 의무처럼 느껴져서 부담돼요.' 하지만 우리는 섬기고 나눌 때 가장 인간답고 가장 살아있는 존재가 됩니다. 섬김과 나눔은 의무가 아니라 인간의 깊은 본성입니다. 사도행전 20:35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이 말씀은 그저 아름다운 교훈이 아닙니다. 우리 존재의 진실입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때 가장 깊은 행복을 느끼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어느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촛불은 다른 촛불을 켜도 자신은 어두워지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한 촛불이 다른 촛불을 켠다고 해서 자신의 불빛이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빛이 세상에 퍼져 나갑니다. 예수님은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마태복음 5:16) 하셨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기쁨이 될 때 나의 기쁨도 함께 커집니다. 우리는 줄수록 더 빛나는 존재입니다. 나눌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존재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섬김은 짐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나눔은 억지로 감당해야 할 종교적 책무가 아닙니다. 나눔과 섬김은 진짜 인간으로 살아가는 길, 더 깊은 행복과 더 풍성한 자유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그 길을 보여주셨고 직접 그 길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걸을 수 있습니다.

저는 종종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Heal the World"(세상을 치유하자)라는 곡을 찾아 듣습니다. 여러분도 이 노래를 좋아하시는지요. 들을 때마다 사랑과 나눔과 섬김이라는 복음의 메시지와 깊이 공명해서 감동이 옵니다. 세계 평화와 아동 보호를 노래한 이 발라드곡은 1992년에 발표됐는데, 전 세계적으로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고, 마이클 잭슨은 인도주의적 글로벌 아티스트가 됐습니다. 잭슨은 5살부터 아버지에게 받은 체벌과 학대의 상처를 음악으로 승화시키며, 자신이 겪은 아픔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곡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당신 마음속에 한 장소가 있어요. 그건 사랑이에요."(There's a place in your heart / And I know that it is love.) 이 가사는 마치 우리 각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사랑의 공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그리고 또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느니라."(로마서 5:5)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사랑의 공간'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우리 안의 이 특별한 장소로 가 닿을 수 있을까요? 잭슨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곳에 닿을 길이 있지요 / 당신이 살아 있는 이를 진심으로 아낀다면 가능합니다 / 작은 공간을 내어주세요 /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봐요."(There are ways to get there / if you care enough for the living / Make a little space / Make a better place.)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내 안의 그 사랑의 공간에 다른 이들을 위한 작은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서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귀를 기울이고, 따뜻하게 품자는 말입니다.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밝아질 거라는 말입니다.

"Heal the world / Make it a better place / For you and for me / And the entire human race."(세상을 치유해요 /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요 / 당신과 나를 위해 / 그리고 인류 전체를 위해.) 반복되는 후렴구입니다. 우리 귀에 맴도는 멜로디입니다. 그런데 궁금해집니다. 내 안의 그 작은 공간에 무슨 힘이 있다고 그것을 조금만 넓혀도 세상이 나아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마이클 잭슨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랑이 왜 강한지 알고 싶나요? / 사랑은 오직 기쁘게 나누는 것만을 생각하니까요... / 사랑만으로도 우리는 성장할 수 있어요 /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봐요."(If you want to know why / Love is strong, it only cares / For joyful giving... / Love's enough for us growing / Make a better world.)

"사랑은 오직 기쁘게 나누는 것만을 생각한다"라는 가사를 저는 참 좋아합니다. 맞습니다. '기쁘게 나누는 것', 그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억지로 나누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결코 의무감이나 강요, 혹은 책임이라는 무게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의무로 하는 사랑은 언젠가 지치게 되고, 강박에서 하는 사랑은 반드시 상대를 옭아매게 됩니다. 진짜 사랑은 내가 원해서 흘러나오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사랑을 생명력 있게 하고, 기쁘게 하며, 선물처럼 전해지게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강요하지 않고, 성자는 성령을 억지로 붙잡지 않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사이를 억압적으로 연결하지 않습니다. 성부는 자유롭게 성자를 사랑하고, 성자는 기쁨으로 성부께 순종하며, 성령은 이 사랑을 물처럼 흘려보내 연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해야 한다'라는 의무나 강요에서가 아니라, '하고 싶다'라는 자유와 기쁨에서 서로 흘러가고 순환하는 사랑, 그 사랑을 원하십니다.

이런 사랑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요한은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 3:17-18)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함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오직 주는 행위 속에서 완전해진다"(헤르만 헤세)라고 했습니다. "나누어질 때 사랑은 그 진정성을 드러낸다"(윌리엄 블레이크)라고 했습니다. 어느 한국 시인의 말처럼, "사랑은 혼자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내어줄 때 꽃핀다"(이상)라는 말은 정말 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랑을 심고 꽃피울 작은 밭을 여러분의 마음 한 곳에 만드셨습니다. 그곳에 우리가 이를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처럼 '살아 있는 이를 진심으로 아끼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아끼는 것, 그것은 다른 말로 '돌보는 것'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네가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네가 그 장미에게 시간을 들였기 때문이야." 이 말은 '돌봄'(care)의 핵심을 꿰뚫고 있습니다. 돌봄이란 단지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쏟고,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를 키우고, 병든 이를 간호하고, 친구의 눈물을 닦아주는 모든 순간이 그렇습니다. 돌봄은 시간과 관심, 공감과 사랑이 모인 행위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숭고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돌봄의 신앙'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에게 "[너희는]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립보서 2:3-4) 당부했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이 목자처럼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생명을 살리시며,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함께 하신다고 고백합니다.(시편 23편) "그는 목자 같이 자기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신다]"(이사야 40:11) 말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돌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시며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다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0장) 목자가 양을 아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이름 하나하나 아시고 필요를 채우시며 지켜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돌볼 때, 그것은 '하나님의 목자 되심'을 따라 사는 것이 됩니다.

교우 여러분, 세상이 참 많이 변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과거에 소중하게 여겼던 '사랑'과 '섬김'과 '나눔'과 '돌봄'이라는 가치가 점점 낡은 것으로 취급받는 시대입니다. 이 가치는 기독교 대학인 이화의 기본 가치이고 존재의 이유입니다. 대신에 '성취'와 '속도'와 '성과'와 '경쟁'이 중심이 된 시대입니다. 다른 말로 '사람이 사람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누군가의 이름보다 그 사람의 스펙을 먼저 보는 세상, 얼마나 배웠는지와 얼마나 가졌는지와 얼마나 앞섰는지가 그 사람의 가치인 것처럼 말하는 세상, 친절은 약함으로 오해되고, 양보는 손해로 여겨지며, 섬김은 미련한 일로 여겨지는 세상, 언젠가부터 우리는 서로의 등에 기대는 법도, 함께 손잡고 우는 법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너무 멀리, 너무 빨리 달려오다 우리는 뭔가 소중한 것들을 놓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들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과 나눔과 섬김과 돌봄은 시대에 뒤처진 미덕이 아닙니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본래의 길입니다. 창조의 기본 질서입니다.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신 생명의 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치는 단지 종교적 규범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함께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새로운 게 아닙니다. '오래된 진실'입니다. 이 진실은 우리 모두가 이 땅에서 살아남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행복의 길입니다. 우리는 다시 이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기쁨을 회복하는 이 길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없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부드러운 사랑'으로 끌어안는 것이 자기 일이라고 말한 고(故)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사회가 얼마나 위대한가는 그 사회가 가장 궁핍한 이들을, 가난밖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 사회는 얼마나 위대한 사회일까요? 그러면서 그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교회가 거리로 나가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세속주의, 편안함, 성직주의 등 우리를 교회 안에 가둬 놓는 모든 것에 저항하길 바랍니다." 과연 우리의 교회는 얼마나 교회다운 교회일까요? 그러면서 그는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우리는 찻잔을 앞에 놓고 신학이나 논하는 점잖고 위엄 떠는 신자가 되면 안 됩니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방법을 찾는 용감한 신자가 돼야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용감한 신자'가 되십시오. '용기 있는 신자'가 되십시오. 사랑은 용기입니다. 나눔은 자기 부족을 감수하는 용기입니다. 섬김은 낮아짐을 기꺼이 선택하는 용기입니다. 돌봄은 상처받을 위험을 감당하는 용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용기를 가진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용감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 사랑을 행하는 거룩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세기 2:18) 서로 어우러져 함께 살라고 지어주신 이 세계가 우리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서로를 돕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 아무리 어렵더라도 말입니다. / 인생은 당신이 행복할 때 좋습니다. /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었을 때를. 그때가 가장 행복하지 않으셨던가요? 우리 함께 이 참 행복의 길로, 기쁜 사랑의 길로, 풍성한 생명의 길로 나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내 마음에 사랑의 공간을 다시 찾게 하소서. 그곳에서 다시 나눔과 섬김과 돌봄이 시작되게 하소서. 주님, 내가 누군가에게 행복의 이유가 되게 하소서. 내 손이, 내 입이, 내 마음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게 하소서. 그렇게 서로 사랑하고, 나누고, 섬기고, 돌보며 살아갈 때 나도 참된 기쁨으로, 하늘의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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