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여왕의 성공회 국교제도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의 비판과 반대가 많았는데 그들을 통칭하여 청교도(Puritans)라고 불렀다. 청교도들 중에는 크게 국교를 지지하는 부류와 반대하는 부류가 있었다. 전자는 온건한 비판을 했고 후자는 더 철저한 종교개혁을 주장하였다. 청교도라는 말은 교회를 초대교회처럼 단순한 제도로 만들려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로마가톨릭교도들의 반항에 못지않게 프로테스탄트들의 저항 때문에 곤욕을 많이 겪었다.
청교도들은 일반적으로 성공회를 좀더 개혁하자는 뜻을 가진 사람들인데 목사의 복장을 더 간소화하자는 생각으로 목사의 예복에서 어깨를 둘러 걸치는 베스트(vest)를 없애자는 의견이 논쟁의 시작이었다. 청교도들은 모든 것을 성서로 기준으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성서에는 그러한 의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성서주의는 곧 초대교회를 이상화(理想化)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계속해서 고칠 것을 들어 논쟁해 갔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초기 청교도들 중에서 장로교 청교도 지도자는 캐임브리지 대학 신학부의 교수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uright)였다. 그는 1569년에 이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가 그의 청교도 운동이 이유가 되어 1570년에 교수직에서 파면되었고 트리니티(Trinity) 대학으로부터도 배척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유럽 대륙으로 건너와 방랑생활 했다.
청교도들은 성공회 국교제도 안에서 몇 지방에 노회를 조직하여 1572년에 국회에 두 가지 청원을 카트라이트의 지지를 얻어 제출하였다. 그것은 교회의 감독정치제도를 폐지하고 장로들의 지도 체제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카트라이트를 교수직에서 파면했던 캐임브리지 대학 총장 죤 휘트기프트(Whitgift)는 후에 칸타베리 대주교가 되어서 장로교의 그 진정서를 기각하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국교제도의 강화에 진력하였다. 그리고 그는 교회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룰 「최고위원회」(The High Commission)을 조직하여 청교도들을 억압하기 시작하였고, 그를 규탄하는 소책자들이 인쇄되어 나돌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1593년 국회를 통하여 청교도들을 “반란종파이며 불충한 사람들”이라고 규탄하였다. 그리고 청교도 운동을 저지하기 위한 여러 법령을 만들었다. 청교도들 가운데는 대륙으로 도피한 사람들도 있었고 국내에서 비국교 청교도로서 정치와 종교의 완전 분리를 실현하고자 투쟁한 사람들도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이어 스코트랜드의 왕 제임스 6세(스코트랜드의 제임스 6세이자 영국의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매리 여왕의 아들이었는데, 매리 여왕은 스코트랜드에서 영국으로 피신해 왔다가 죽었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제임스가 스코트랜드의 장로교 제도를 지지했던 왕이었으므로 자기들을 도와 영국을 장로교 국가로 만들기를 바랐다. 그러나 제임스는 그들을 권고하여 영국의 국교제도를 따르게 하였으므로 청교도들과의 불화와 충돌이 시작되었다.
청교도들은 제임스 1세가 영국의 왕으로 부임하자마자 1603년에 1,000명이 서명한 진정서를 제출하고 영국 교회의 보다 진전된 개혁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공중예배 때의 의식들 중에 개혁할 것을 여러 가지 제시하고 성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것은 성찬식에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그곳에 임재하여 계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례식 때 십자가를 그리는 것과 목사가 목사의상(가운)을 입는 것과 견신례를 없애고 결혼식 때 가락지를 끼우는 것 등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임스 1세는 1604년에 종교회의를 열고 청교도들의 진정서 내용을 검토하게 하였다. 이 회의 때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의 39개 신조와 요리문답을 폐기할 것과 장로가 감독과 함께 교회의 치리자가 되게 할 것과 성서의 새 번역을 요청했다.
이 종교회의에서 통과된 것은 기도서의 부분적 수정과 성서의 새 번역 정도였다. 이 결과에 대하여 불만을 표한 목사들이 많이 파면되었는데 그들이 왕이 서명하여 제정한 기도서를 배척하여 왕의 수장권을 거부하였다는 이유였다. 이때 파면된 목사 수가 한때는 300명이라고 추산되었지만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50~60명이었다고 밝혔다.
제임스 1세는 성서의 영어 번역을 명령하였다. 1607년에 그는 54명의 학자를 동원하였고 그들은 과거의 모든 번역성서를 참고하여 「제임스 왕 역본」(King James Version)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 성서는 그 후 영국 교회의 최고의 권위 있는 번역 영어성서가 되었고, 영국 시문학의 온실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제임스 1세 치하에서 청교도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그들은 주일을 성스럽게 지켰고 예배 때 시편을 찬송으로 만들어 부르기 좋아하였다.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일은 하지 않았는데 스포츠도 피하였다. 주일날 설교가 끝나면 성서와 신앙, 교양 강좌를 열어 열심히 참석했고, 가정에서도 성서를 열심히 읽었다. 성서를 교회제도와 신앙생활과 행위의 교본으로 삼고 특히 엄격한 도덕적 행위를 강조하였다. 그들은 성서 밖에도 고전을 애독하였고 칼빈주의 정신을 살려서 근면과 절제와 경건을 실천하였다. 그들은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구원을 받는다는 개혁교회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인간이 협력하는 신앙행위를 또한 강조하였다. 이것을 계약신학(covenant theology) 또는 협동신학(federal theology)이라고 불렀다.
청교도들은 성공회 제도를 비판하면서도 국교제도를 수용하여 날로 세력을 키워서 영국 국회 안에서 유력한 정치적 세력이 되어 제임스의 정책에 대항할 만한 힘이 생겼다. 제임스 1세가 스포츠를 장려하여 일요일에 운동을 즐기고 댄스도 즐기도록 하였는데 그는 1618년에 각종 운동경기와 게임을 장려하는 공문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청교도들은 일요일 성일에 운동하라는 그의 정책과 주일예배 형식을 문제 삼아 제임스와의 대립을 심화시켜 갔다. 1622년에 교회 설교자가 논쟁적인 제목으로 설교하지 못하게 하고, 예정교리와 국가에 관한 문제를 다루지 못하게 하고, 교황주의자들과 청교도들을 욕하는 설교도 못하게 하였다.
국교제도 반대자들이 화약을 사용하여 정부를 타도하려는 음모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가톨릭 신도들이 심한 박해를 받게 되어, 이후로 가톨릭 신도는 영국에서 변호사직과 모든 종류의 수위병직과 재산관리직을 가질 수 없도록 법이 개정됐다. 또 이 사건으로 6,000명이 정죄되었고 수 명이 화형 당했다. 청교도들 중에는 국외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개혁교회가 정착해가던 네덜란드로 1608년에 이민 간 청교도들이 많았고, 1620년에는 101명의 청교도가 배를 타고 미국 동부 보스톤 지역에 상륙하여 정착하였다.
청교도들 중에 비국교도 청교도들인 침례파(Baptist)와 회중파(Congregationalists)와 메노나이트(Mennonites)는 소교파들이었다. 영국의 최초의 침례파 지도자는 캐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죤 스미스(John Smith)였고 그의 신학은 칼빈주의의 합리파 아르미니우스주의였다. 그는 런던 외곽에서 침례교회를 세웠다. 회중교회는 목사와 교회 직분자를 교인들이 선출하며 교인들이 교회를 다스리는 가장 민주주의적인 교회로서 여러 교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생긴 아주 자유로운 교회였다. 침례교회와 회중교회는 예정교리를 배제하였다. 이러한 소교파 비국교도 청교도들도 장로교 청교도들과 함께 제임스 1세의 반대 정치세력으로 자라갔다. 침례교파는 유아세례를 반대한 것으로 장로교파와 회중교파와는 달랐다.
영국의 침례교파가 일찍이 대륙에 생겼던 재세례파(유아세례를 반대)에서 파생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다. 영국의 침례교파가 본래 네덜란드에서 건너왔다.
6. 촬스 Ⅰ세와 청교도 혁명
제임스 1세의 아들 촬스 1세가 1625년에 영국의 왕이 되었다. 촬스 1세는 깊은 종교적 신심을 가졌고 생활이 청렴했고 위엄이 있는 왕이었지만 개인적 확신이 강해서 정책을 추진할 때는 신하들의 의견을 청취하지 않아서 불만을 샀다. 이때 영국의 왕과 귀족들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전통을 회복하기를 염원했던 반면, 영국 국회를 장악한 사람들 - 많은 청교도들과 급성장해 가던 도시중산층을 대변한 사람들 및 비국교도 지도자들 - 은 성공회의 국교제도의 폐지와 보다 개혁된 프로테스탄트를 세웠으면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다. 촬스 1세는 국회를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국회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1629년에서 1640년 사이에 그는 국회 없이 통치하였다. 또한 그는 스코트랜드 교회도 감독제도로 개편하고 성공회가 사용하는 예배형식을 따르도록 압력을 넣기 시작하였다.
촬스 1세는 통치 초기에 영국성공회를 국교로서 충성스럽게 신봉하였으나 가톨릭적인 요소를 선호하였다. 그의 아내는 프랑스의 왕 헨리 4세의 딸이어서 가톨릭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고 촬스는 그녀의 영향을 조금은 받고 있었다. 촬스를 보좌한 옥스포드 대학의 학장 윌리암 라우드(William Laud)는 청교도들을 싫어한 성공회 교인이었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을 성공회의 강력한 보루러서 지적 및 도덕적 훈련 장소로 만들었다. 그는 칸타베리의 대주교가 되어서 영국성공회가 가장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을 계승한 교회라고 말하고 로마가톨릭교회는 청교도들이 비난하듯이 배반자가 아니고 진짜 교회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장차 영국성공회 안에서 성공회를 가톨릭적으로 혁신하려고 운동한 헨리 뉴만(Henry Newman)의 ‘Anglo-Catholicism’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라우드는 그동안 성공회에서 사용하던 용어들을 가톨릭적으로 고쳤다. 성찬식탁(table)이라고 부르던 것을 ‘제단’(altar)으로 고치고 그 식탁의 위치도 교회 동쪽 끝으로 옮겼다. 그는 칼빈주의 신학을 반대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을 천거하여 선택과 예정교리를 반대했다. 그리고 그는 촬스로 하여금 제임스 1세처럼 일요일 스포츠와 오락을 다시 장려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교회 안에 있던 악과 불의를 뿌리뽑기 위하여 힘을 쏟았고 부패와 불경스러운 것과 투쟁하였고 런던의 성 바울 교회에서 장사치와 변호사들을 축출하여 교회를 정화하였다. 그리고 로마가톨릭교회와 청교도들과 싸워서 영국의 모든 예배의식을 성공회의 제도로 통일하려고 힘썼다. 그는 반대자를 화형하지는 않았으나 엄벌하였다.
청교도들에게 라우드는 가장 큰 증오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1641년 장기국회 기간에 국회는 그를 탄핵하고 런던탑 감옥에 투옥하였다. 얼마 후 그는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로 판결되었다가 나중에 참수형을 받아 죽었다. 이 장기국회 기간에 라우드가 강요했던 제단이란 말을 취소하고 성상과 촛불 사용도 금하였다. 이 밖에 논쟁거리가 되어 결정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다. 국회는 1643년에 감독제도 폐기 법안을 통과시키고 국군과 싸울 국회 군대를 조직했다. 국회는 스코트랜드 교회의 도움을 얻어서 왕과 대결해 나갔다. 영국 국회는 스코트랜드 교회가 실시한 ‘엄숙한 동맹과 계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을 도입하여 1644년에 18세 이상의 모든 영국인이 이 동맹과 계약을 수용하게 결의하였다. 이것은 영국의 그리스도교회가 개혁파교회(Reformed Church)의 신앙과 제도를 따르게 하는 것이었고 이것을 스코트랜드와 아일랜드와 함께 지켜서 교황주의와 감독제도를 폐기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공회가 사용하던 공동기도서를 폐기하고 대신에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종교회의를 열게 해서 거기서 신앙고백과 예배지침을 만들고 장로교 제도를 확립하게 하였다.
1643년 7월에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회의가 소집되었는데 대부분의 회원이 청교도였고 감독제도의 교인들과 독립교단의 대표들 소수와 투표권이 없이 참석한 소수의 스코트랜드 교회 대표들도 있었다. 이 회의에서 신조와 예배를 포함한 신앙고백을 작성하도록 결의하여 1646년 11월에 그 신앙고백을 완성하여 영국 국회에서 그것을 논의하였다. 국회는 그 고백을 정식 인정하는 결의는 하지 않았다. 이 신앙고백과 함께 대소(大小) 요리문답도 작성되었다. 이 고백이 영국 장로교회의 고백이 되었고, 스코트랜드 국회는 이 고백을 정식으로 인정하여 스코트랜드 교회의 고백으로 만들었다.
촬스 1세는 국회의 이 결의를 반대하고 군대를 일으켜서 국회 군대와 대항하였다. 그러나 촬스의 관군을 패배시키고 청교도가 승리하였다. 국회 군대의 대장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었다. 그는 이제 영국을 다스릴 책임을 지고 청교도 공화국을 세웠고 1649년에 촬스 국왕을 사형에 처했다. 이것을 청교도 혁명이라고 부른다. 크롬웰 정부는 종교적 관용정책을 세우고 어떤 종류의 종교탄압도 없앴다. 그리하여 그가 통치하던 40년 동안에 영국에는 여러 종파가 생겼고 그들도 영국을 위한 정책들을 가지고 있었다.
레벨라즈파(Levellers)는 만인평등론을 가지고 국회의원 선거를 국민투표로써 치르되 모든 국민이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디거파(Diggers)는 토지분배와 같은 농지개혁을 주장하였고 제5왕국파(Fifth Monarchy Men)는 그리스도가 조속한 시일 안에 재림해서 로마제국을 이어서 제5왕국을 지상에 세우고 통치하실 것이라고 설교하였다. 죠지 폭스(George Fox)라는 사람은 성령의 내적 광명을 받고 몸을 떨어 보여서 “퀘이커”(Quakers)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일종의 신비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직접 나아가 그의 음성을 듣고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비춰서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고 대낮에 촛불을 켜 들고 나체로 거리로 나갔다. 사람들이 놀라서 집 안으로 달려가 그를 피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맹세하지 말 것과 정직하게 진실을 말할 것을 가르치고, 의복과 의식을 간소하게 하여 계급의 차이를 보이지 말 것과, 어떤 전쟁에도 참전하지 말 것과, 예배와 종교생활에서 형식주의와 수치스러운 일을 버릴 것을 가르쳤고, 정신이상 환자들을 간호하고 완전한 민주정치를 부르짖었다. 퀘이커들의 단체를 ‘Society of Friends’라고 불렀다. 이들은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박해를 받았으나 소수의 단결력 있는 교파로서 살아남았다.
크롬웰의 청교도 공화국을 세울 때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삼으려 했으나 그가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의 아들 리차드(Richard)가 1658년에 그의 부친을 이었으나 군대를 통솔하고 공화국을 통치할 만한 인물이 못되었다. 영국 국민은 영국의 왕정 복구를 열망하였다.
7. 촬스 2세와 왕정 복구
죠지 몽크(George Monck)라는 용맹한 군인이 군대를 몰고 런던으로 진격하여 도시와 정부를 점령하고 촬스 1세의 아들을 유배지로부터 불러와서 왕으로 세우고 왕정을 복구시켰다(1660년).
촬스 2세는 신중하지 못했고 아주 이기적이고 생활이 부도덕하였고 자기의 권세를 과신하였다. 영국 국회는 청교도 사이에서 일어났던 내란 이전 상태로 돌아갔으나 촬스 2세의 기대에는 못 미쳤다. 그는 내심으로 로마가톨릭 제도를 좋아하여 장로교도들과 급진파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을 미워하였으나 밖으로는 영국성공회 제도를 신봉하였다. 아무튼 영국교회는 옛날의 감독제도를 복구하고 그동안의 장로제도를 폐지하고 그리고 청교도들이 싫어했던 예배지침서도 회복하여 교회 예배의 통일법령에 따라 영국의 모든 교회가 이 지침대로 예배를 드리게 하였다. 그리고 감독제도 아래서 안수 받지 않았던 목사는 다 파면되었다. 그리고 1664년에 ‘Conventicle Act’라는 법령을 만들어 5인 이상이 예배 드릴 때 이 기도서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그 모임을 금지하도록 했으며, 5마일 법령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누구든지 교회와 국가의 제도를 고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는 사람은 도시와 준도시에서 5마일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 촬스 2세는 1673년에 가톨릭 신도들을 돕고 프로테스탄트에서 이탈해 온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위하여 면죄부 발행을 선언하고 그 두 부류의 신도들의 예배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리고 ‘Test Act’라는 법령을 만들어서 모든 공무원과 군인은 왕의 지상권(至上權)에 충성을 맹세하고 영국성공회의 예식대로 성만찬을 받아야만 하도록 만들었다.
촬스 2세의 이 같은 엄격한 시책에 대하여 성공회 안에서와 독립교파 교인들 가운데서 반항하고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청교도 지도자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는 왕정 복구 후 목회직이 박탈되고 투옥되었다.
침례교 목사 죤 번얀(John Bunyan, 1628~1688)은 촬스 2세 치하에서 성공회의 예배지침대로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 고전으로 손꼽히는 책 중의 하나이다. 이 책의 영명은 ‘순례자의 행진’으로 되어 있다. 한 영혼이 회심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영적 순례의 과정을 알레고리칼하게 진술한 책이다. 번얀의 자서전으로 볼 수 있는 책은 「Grace Abounding to the Chief of Sinners」인데 죄인의 괴수에게 주시는 은혜라는 뜻이다. 이 책은 자기 영혼의 순례의 한 평생을 서술한 것이다. 또 기억할 만한 다른 인물은 죤 밀튼(John Milton, 1608~1674)이다. 그는 장로교 청교도로서 혁명정부를 지지하고 촬스 1세의 처형을 지지하였다. 그는 시인이었다. 그는 1651년에 실명하여 앞을 보지 못하였지만 만년에 「실락원」(Paradise Lost, 1667)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1671년에는 「Paradise Regained」을 저술하여 그리스도가 받은 유혹을 논하였고 또 가자(Gaza)의 옥에 갇혔던 맹인 영웅 삼손에 대한 책도 썼는데 맹인이 된 밀튼 자신과 삼손의 인생 종말에 대한 연상(聯想)이 함축된 책이었다.
촬스 2세가 1685년에 사망하고 그의 동생 제임스 2세가 왕이 되었는데 그도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면죄부를 발행하였다. 제임스 2세의 면죄부 발행을 반대한 성공회 감독 7인이 제임스 2세의 한 아들이 왕이 되면 로마가톨릭을 국교로 만들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였는데 이때 영국의 국민들이 일제히 경각심을 가지고 제임스 2세를 배척하였고 그는 영국을 떠나고 말았다.
8. 명예혁명
국외로 추방당한 제임스 2세의 딸 매리(Mary)는 프로테스탄트 신도였는데 칼빈주의자였던 오렌지 공(公) 윌리엄(William of Orange)과 결혼하여 제임스 2세의 모든 종교정책을 폐기하는 법령(Bill of Rights)을 1689년에 발표하였는데 이것을 ‘권리장전’(權利章典)이라고 부른다. 이 법령에서 로마가톨릭 신자는 영국의 왕이 될 수 없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관용법령」(Toleration Act)을 발표하며 그동안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이 국왕에게 충성하는 맹세를 하지 않거나 성만찬의 화체설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잃어버렸던 권리를 되찾게 하였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를 불신하거나 로마가톨릭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권리장전이 보장하는 혜택을 받을 수 없게 규정하였다. 영국 국교인 성공회를 믿지 않는 독립교회의 신도들 즉 비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는 갖지만 영국 국교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은 납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옛날처럼 엄격하지는 않았다.
이때 영국의 두 정당이 생겼는데 토리파(Tories)는 비국교도에 대한 관용을 반대하였고 위그즈(Whigs)는 비국교도에 대한 관용을 지지하였다. 1711년 토리파 정권 아래에서 옛날의 Test Act가 다시 살아나서 비국교도들에게는 새로운 어려움이 생겼고 1714년에는 비국교도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가 될 수 없다는 법령이 나왔다. 비국교도들 중에는 프로테스탄트들도 있었고 로마가톨릭 신도들도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왕권보다는 국회가 나라를 지배하고 국회가 국민의 소리를 존중하여 정치하는 나라가 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