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교회는 안팎으로부터 철저한 자기개혁을 요구 받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에 준하는 철저한 개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한기총은 금권선거의 추문으로 일반사회와 교계 양쪽으로부터 강력하게 해체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복음진영을 자처하는 교회와 신자들이 보이는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는 사회일반은 물론 양식 있는 신앙인들로부터도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엄청난 자연재앙으로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일본을 두고서 하나님의 심판 운운하는 망언까지 내뱉어 기독교를 향한 한국사회의 분노와 지탄에 기름을 끼얹고 있습니다. 대체 기독교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이 지경까지 타락한 한국의 기독교가 어떻게 종교개혁에 준하는 철저한 자기개혁을 할 수 있을까요? 선거제도를 뜯어고치면 금권선거가 사라질까요? 물론 보다 투명하고 엄정하게 선거를 치르도록 제도를 개혁하고 관리하면 보다 깨끗한 선거를 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법과 제도를 뜯어고쳐도 결국 그것을 운영하는 주체는 사람이므로 금권(金券)의 힘을 빌어서라도 교권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제도의 개혁만으로는 어차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한국기독교는 독선적이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선교행태 때문에 사회적인 물의와 비난을 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독교가 땅밟기기도나 말뚝박기와 같은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를 버리고 상호존중하는 성숙한 자세로 종교간 대화와 화해, 협력에 나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타인의 끔찍한 고통을 두고서 서슴없이 신이 내린 재앙이라는 망발을 일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 모든 병폐들은 결코 제도나 문화적 관습을 적당히 손질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개선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늘 한국기독교의 총체적 타락의 밑바닥엔 보다 근원적인 문제가 놓여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한국기독교뿐만 아니라 현대 기독교가 공동으로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오늘의 기독교가 하나님에 대해 매우 편향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편향은 곧 굴절이고 왜곡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가 가져온 하나님 이미지는 예수가 소개했던 하나님의 참 이미지와 동떨어져 있습니다.
기독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예수가 이천년 전에 넘어서고자 했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속 좁은 가부장적 하나님 이미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하나님을 그저 제 새끼만 감싸고도는 이기적인 아버지로 믿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하나님을 내 편이 아닌 네 쪽에는 무자비한 형벌과 재앙을 퍼붓는 폭력적인 전사(戰士)로 믿고 있습니다. 오로지 충성할 것만을 요구하는 절대군주 지배자의 이미지, 자녀에게 절대복종할 것만을 엄명하는 무서운 남성 아버지 이미지, 죄와 허물을 샅샅이 찾아내 벌주는 재판관의 이미지가 오늘까지 기독교가 믿어 온 전통적인 하나님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소개한 하나님은 달랐습니다. 이방인은 사랑과 구원의 대상에서 일찌감치 제외해 놓고 오로지 친자식을 자처하는 유대인만을 감싸고도는 하나님은 예수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신학자 존 쉘비 스퐁은 그런 신은 세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부족신의 하나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기독교인이 아닌 타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재앙으로 응징하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도와는 달리 하나님을 조잔하기 비할 데없는 부족신으로 망신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가 알려준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보편적인 사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의 제자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행10:34~35> 예수는 유대인이 그어놓은 수많은 구분과 금기의 선(線)을 주저없이 뛰어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이웃과 원수, 주인과 종, 남자와 여자, 스승과 제자, 정결과 부정, 금식과 잔치 등등…
하지만 어찌된 노릇인지 예수를 주(主)로 믿는 기독교는 오늘까지도 여전히 스스로 구분지어 그어놓은 선 안에 갇힌 체 선 너머의 세상과 사람들을 배척하고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들이 적대시하는 대상을 하나님도 적대시하는 대상이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자신의 적이 곧 하나님의 적이라는 오만과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보다 더 위험하고 끔찍한 것은 없습니다. 배타적인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적은 곧 하나님의 적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의 편협한 생각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이토록 편협하고 옹졸한 부족신으로 믿는 왜곡된 믿음의 껍질을 깨고 나오지 못하는 한 땅밟기기도나 말뚝박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타인의 끔찍한 불행을 가리켜 신의 심판 운운하는 망언 역시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한국기독교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을 다시 보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배타적인 신관(神觀)을 버려야 합니다. 배타성은 공격성과 정복적 발상의 모태입니다. 나와 다르면 나와 같도록 동화시키거나(선교) 아니면 멸망시켜야 한다(정복)는 배타성은 예수의 정신과 무관하고 하나님의 본성과도 동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녕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시라면(딤전6:15) 하나님은 기독교가 둘러친 속 좁은 교파와 교리의 울타리에 갇히지 않는 분입니다. 정녕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면(요일4:16) 그 분의 사랑은 부족적이지 않고 우주적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되는 날 세상에는 해함이나 상함이 없을 것이라며 그 날의 도래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11:6~8)> ‘여호와를 아는 참된 지식’이 중요합니다. 종교마저 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분열과 다툼, 전쟁과 살육의 아수라장으로 몰아넣는 이유는 신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되는 날이 오면 모든 적대와 살생의 관계가 공존과 공생의 관계로 바꾸어질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서로가 누구도 해치지 않는 세상, 나란히 음식을 나누고 함께 평안을 누리는 세상이 곧 하나님이 주인 되는 세상입니다. 오늘 기독교는 이러한 세상을 당신의 나라로 계시하신 하나님을 다시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을 다시 보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글: 김성 목사(예수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