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사순절(四旬節)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四旬)은 ‘네 개의 열흘’을 뜻합니다. 부활절로부터 시간을 거꾸로 세어서 중간에 들어있는 주일을 뺀 사십일이 사순절에 해당합니다. 사순절은 예수의 수난을 기리는 절기입니다.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처음 사십일로 기한을 확정짓기까지는 정해진 기한 없이 대략 이삼일 정도 지켜오던 절기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죄로 더럽혀진 삶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참회와 금식을 해왔습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이라 부릅니다. 그 이유는 죽음의 상징인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죄를 참회함으로써 사순절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참회의 상징은 금식입니다. 금식을 통해 죄로 더러워진 영혼을 깨끗하게 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에 금식해 온 것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 지켜온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금식이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아름다운 것이라면 예수는 왜 금식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지 않았을까요?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던 즈음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공생애기간 중에는 금식 대신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기를 즐겼습니다. 세례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께 이렇게 묻기까지 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마9:14> 또 당시 사람들은 예수를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마11:19> 이 기록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나 세례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을 즐겨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예수가 세례요한의 회개운동과 다른 길을 걷게 된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저는 금식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보게 만드는 글을 읽었습니다. 인도의 철학자 오쇼 라즈니쉬가 예수의 어록복음서인 도마복음서를 강해한 <도마복음강의>의 한 대목입니다. 도마복음 제 14장은 예수의 이런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금식을 행하면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너희가 어느 마을이든지 그곳을 지나갈 때 그곳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면 그들이 너희 앞에 차려주는 것을 먹고 그들 중 병든 자가 있으면 그들을 치료하라.…”> 금식을 행하는 것이 죄라니 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일까요? 금식을 통해 영혼이 깨끗하게 된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오해를 사기에 딱 좋은 발언입니다. 하지만 오쇼는 이 말씀에 담긴 예수의 뜻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우선 오쇼는 금식을 생리적인 측면과 심리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았습니다. 생리적인 측면에서 본 금식은 일종의 육식(肉食)입니다. 왜냐하면 금식은 자기 자신을 먹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금식하면 활동에 필요한 열량을 얻기 위해 체내에 축적해 놓은 지방을 가져다 씁니다. 육체에 지방질을 더 많이 축적하고 있는 여자가 남자보다 금식하기 수월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른 사람보다 살찐 사람이 금식하기 쉬운 이유 또한 같습니다. 오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종교적인 축제를 벌일 때는 배불리 먹는 것으로 행사를 치른다. 부자들이 종교적인 날을 축하할 때는 금식을 하는 것으로 그날을 보낸다> 오쇼는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계층인 자이나교도들은 금식에 매달리다시피 하는 반면에 가난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은 종교적인 축일에 배불리 먹는 것을 예로 들면서 금식은 가난한 사람들이 좋아한 종교전통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리기 위해 사십일을 금식과 참회의 날로 지낼 것을 확정한 니케아공의회(325년)의 결정은 그리스도교가 더 이상 박해받는 가난한 약자의 종교가 아니라 로마제국의 공인과 보호를 받는 배부른 제국의 종교가 된 이후(313년)라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은 대목입니다. 가난한 자는 금식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체내에 쌓아둔 지방이 적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가난한 갈릴리의 민중들에게 금식 대신 함께 먹고 마시는 잔치를 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난한 갈릴리 민중들에게 금식을 요구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심리적인 측면에서 본 금식은 마음이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시계추와 같습니다. 오른쪽으로 갔다가 다시 왼쪽으로 갑니다. 시계추가 양극단을 오가듯 마음도 양극단을 오갑니다. 오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쪽 극으로 달려가면 머지않아 반대편 극이 의미를 갖게 되며 매력적으로 그대를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그 쪽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다> 금식은 과식(過食)의 정반대편에 서 있는 극단입니다. 사람들은 평소 게걸스럽게 먹고 마십니다. 미식(美食)이란 이름 아래 탐식(貪食)합니다. 맛집을 소개하는 블로그는 사람들의 식탐을 자극하며 최고의 인기 있는 파워블로그에 이름을 올립니다. 많은 성인병이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는 탐식에서 비롯된다고 하나같이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단식(斷食)하고 절식(節食)할 것을 주문합니다. 극단에서 다시 극단으로 달려가는 거지요. 마음은 이처럼 극단으로 치우치기 쉽습니다. 이쪽 끝 아니면 저쪽 끝, 어느 쪽이든 극단을 향합니다. 예수가 금식을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금식은 극단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극단이 죄가 되는 이유를 오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극단으로 움직여 가는 것이 죄인가? 극단으로 움직여 가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은, 극단 속에서는 절반은 선택되고 절반은 부정되기 때문이다. 진리는 전체이다.> 과식이나 금식이나 모두 절반만 선택하는 극단입니다. 한쪽은 남아돌도록 먹고 다른 한쪽은 모자라도록 먹지 않습니다. 필요한 만큼 적당히 먹고 소비하는 균형을 잃어버린 점에서 양쪽 모두 똑같습니다. 둘 다 극단에 치우쳤습니다. 예수는 균형을 잃어버린 체 극단을 선택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가 당시의 종교적, 정치적 양극단을 모두 멀리하신 이유는 바로 이 때문 아닐까요? 예수는 철저한 금욕과 세상과 격리된 삶을 추구했던 에세네파와 거리를 두었습니다. 예수가 세례요한과 다른 길을 걸은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예수는 가난한 민중들에게 일상적인 금식과 성결을 강조했던 바리새파와도 거리를 두었습니다. 권력과 적극적으로 야합했던 사두개파와도 거리를 두었고 거꾸로 권력에 대해 무장투쟁 했던 젤롯당과도 거리를 두었습니다. 이들 모두 극단을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만 구원하고 이방인은 저버리는 유대인의 구원관에 예수가 반대한 이유 또한 이 때문입니다. 절반의 구원은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사회의 병폐는 무엇일까요? 모두 극단으로 치닫는다는 것입니다. 나와 다르면 그냥 적입니다. 진보는 보수의 적이고 여(與)는 야(野)의 적입니다. 노(勞)는 사(社)의 적이고 좌(左)는 우(右)의 적입니다. 어느 쪽도 아닌 나머지 사람들은 회색분자, 개량주의자, 기회주의자로 욕을 얻어먹습니다. 중간지대란 없습니다. 이쪽 아니면 저쪽입니다. 예수는 절반만 택하고 절반을 버리는 극단이 저지르는 이 짓을 죄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마9:> 생베조각과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 이들은 서로 양쪽 극단에 서 있습니다. 극단끼리 만나면 찢어지고 터집니다. 종교는 극단을 택해서는 안 됩니다. 절반은 버리고 절반만 얻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한 쪽 극단에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양쪽 극단 모두를 포용하고 초월하는 곳에 있습니다. 사순절에 밥을 굶는 금식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과 신앙이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잃지 않는 일입니다.
글: 김성 목사(예수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