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이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이젠 완연한 봄임을 느낄 수 있을 터이다. 최근 십여년은 봄이오기도 전부터 늘 봄꽃이 그리웠다.
그리하여 저 멀리 동해까지 복수초가 피었다는 소리에 달려가고, 눈이 수북하게 쌓인 산을 돌아다니며 봄맞이를 했다.
언 땅에서 꽃망울을 올리는 복수초와 변산바람꽃, 앉은부채와 꽃샘추위 남았건만 피어나던 작은 풀꽃들과 길가 여기저기에 피어나던 민들레나 냉이, 꽃다지, 큰개불알풀꽃, 쇠별꽃 같은 것들은 잊을 수 없는 만남을 한번씩은 가지고 있을 정도로 봄꽃을 찾아다녔다.
그러더니만 이제 시들해져버렸는지, 올해는 찾아다닌다기보다는 내 일상에서 보이는 꽃도 다 바라보지 못하고 산다. 바빠서는 아닌 것 같고, 담고 싶은 사진의 주제가 조금 달라져서 그럴 것이다. 그리하여 올해 만난꽃은 고작해야 제비꽃, 냉이, 꽃다지, 꽃마리, 개나리 정도다. 누구에게나 보이는 꽃을 보았을 뿐이다.
어젠가 해 군항제가 열린다고 하더니만, 일주일 늦게 만개했다는 매화마을의 매화꽃 사진이 일간지 메인면을 장식하고, 저기 청산도에 유채꽃 피었다하니 4월 중순 제주도만 고대하고 있는 내 몸은 근질거린다. 그래도 아직 마음은 보이는 꽃을 보고자 할 뿐, 꽃을 찾아 나설 마음이 별로 없는 듯하다. 솔직히 사진의 주제가 달라졌기때문만은 아닌듯하다. 내 삶의 져러가지 정황들이 꽃이라는 작은 것들을 보며 느끼는 기쁨을 앗아간 듯하다.
보이는 꽃을 보는 것과 꽃을 보기위해 찾아다니는 것, 그것은 완전히 다른 행위다.
보이는 봄을 보는 것과 봄을 보려고 찾아다니는 것, 그것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기왕이면 수동적으로 보이는 것을 보는 이들보다 혹은 들리는 것을 듣는 이들보다 능동적으로 보고, 듣는 들이 더 많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그 깊이가 한 차원 다른 차원이 되는 것이다. 어찌, 보고, 듣고, 느끼는 오감의 것에만 이것이 해당되겠는가?
봄을 보고자 했을 때에는 참으로 많은 것을 보았다. '미리 봄'이다. 다른 이들은 아직도 겨울이라는 계절에 머물러 있는데, 나는 이미 봄을 본 것이다.
보이는 봄을 보았을 때에 나는 내년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 일도 모르면서, 내년을 기약하는 미련함, 그러나 보지 못한 봄에 대한 아쉬움으로 봄을 보내는 것이다.
'탐구'라는 말이 있다. '찾아 구함'이라는 뜻, 공부란 그렇게 해야 잘하는 법이다.
요즘 우리 아이들이 옛날에 배우던 지식의 수준과는 엄청난 차이가 나는 지식과 내용을 배우면서도 옛날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보다 어려보이는 것은 구겨넣어지는 입시위주의 제도교육때문일 터이다. 자율이 아닌 타율에 의한 공부, 그것이 아이들의 꿈을 앗아가버린 것이다.
그런데, 매사가 그렇지 않은가!
신앙도 그런 차원중 하나다. 한 예만 들자면 '믿음'은 '미리 봄'이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은 아직 현실은 아니라는 것,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처럼 보는 것이니 '미리 봄'이다.
그런 점에서 성서에 나타난 신앙은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강조하는데 '우물가의 여인처럼 구하는 것', '불의한 재판관에게 요구하는 것', '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 등은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본문들을 해석할 때에 마치 아이들이 과자를 사달라고 떼를 쓰듯이 하는 것 쯤으로 천박한 해석을 하고 설교를 해왔다. 그렇다면 '잠잠히 기다리라'거나 '인내, 오래참음' 등등의 말씀에는 뭐라 응답할 것인가?
이것은 반대의 개념이 아니다.
봄을 본다는 것이 방방곡곡 꽃 피는 곳을 다 다녀야 하는 것이 아니지만, 봄꽃이 피었는데도 감동할 줄도 모르는 사람도 봄을 볼 수 있음은 아니다. 때론 수많은 봄꽃 가운데에서 작고 보잘 것 없는 꽃 한송이를 보고 봄을 온전히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디에 벚꽃이 피었다, 매화 피었다하여 꽃구경을 가고 싶어 안달하며 달려가 기념사진 찍고, 술이나 마시고 돌아온다면 꽃구경을 가긴 갔으되 꽃구경을 제대로 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게 꽃 구경이라고 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꽃에 대해 좀더 깊에 아는 사람은 그걸 꽃구경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꽃구경만 그런 것이 아니다.
관광버스가 출렁거릴 정도로 종일 흔들어대는 여행도 여행이긴 하지만, 답사여행도 있고 다양한 여행이 있다. 궂이 어떤 여행이 수준있는 여행이냐 옥석을 가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관광버스 춤여행에 맛을 들인 분들이 답사여행 같은 것은 고리타분한 여행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건 여행도 아니라며, 자기들 처럼 술에 취해 종일 춤추고 먹고 목적지를 찍고 오는 것만이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 강요한다면 많은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터이다.
신앙도 그렇지 않은가? 한국은 개신교가 들어온 이후 '좋은 신앙'에 대한 일정한 패턴이 생겼다.
그런 패턴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궂어진 결과들이 요즘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욕먹이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은 탐구해야 한다. 성경을 읽되 보이는대로 읽을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해야 한다. 이것 없이 그저 읽다보면 감동을 주시겠지하며 색연필로 줄을 치며 읽고, 필사를 하는 것, 그리하여 성경통독을 몇 번을 했네, 필사를 몇 번을 했네 자랑하는 것으로 성경을 읽었다고 한다는 그야말로 읽거나 쓴 것이지 성경을 본 것이 아니다. 성경을 제대로 본 사람은 몇 번 읽었다는 것으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대로 살지 못해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겸손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너무 완벽한 신앙인들이 많다. 자기 아니면 안 된다 하고, 자기 교회가 아니면 안 된다 하고, 우리 목사님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 이것을 확신이라고 봐야할지, 맹신이라고 해야할지 난감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후자의 경우가 많다보니 신학교의 난립부터 사이비의 창궐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간판은 달았으되 교회가 아닌 경우가 많은 것이다.
보이는 봄을 보는 것과 봄을 보는 것의 차이, 우리의 모든 일상에도 존재한다. 그 차이는 엄청나다.
글: 김민수 목사(제주노회,기장 총회교육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