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성 칼럼] 베드로의 배신과 예수의 침묵

예수원교회 김성 목사

▲예수원교회 김성 목사
엔도 슈사쿠는 17세기 에도막부시대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다룬 소설 <침묵>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입니다. 가톨릭교도였던 엔도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깊은 탐구와 이해를 담은 작품들을 여럿 남겼습니다. 그 중에서 1973년에 출간된 <예수의 생애>는 예수를 역사적인 인물로서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신화와 교리의 채색옷을 입은 신의 아들 예수가 아닌 이천년 전 갈릴리에서 목수로 살았던 인간 예수의 삶을 밀도 있게 그렸습니다. 성서에 대한 깊은 이해에 작가의 상상력을 보태어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새로운 눈으로 조명한 작품입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는 다음의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예수가 체포되는 순간 뿔뿔이 도망친 제자들은 어째서 예수가 재판을 받고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 부활하기까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있었는가? 그것도 한 곳에 함께 모여서. 예수를 재판하고 처형한 유대교 사제들과 공회원 그리고 빌라도총독은 어째서 이들을 추적하거나 체포하려들지 않았을까? 주범(主犯)을 처형하면서 왜 종범(從犯)이자 공범인 제자들을 잡으려 하지 않았을까? 제자들은 왜 예수의 죽음을 자신들의 죄를 대신 짊어진 대속(代贖)의 죽음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을까? 엔도는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이 요한복음에 기록된 베드로의 부인(否認)이야기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요18:19~27)

예수가 가야바 관저로 끌려갈 때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그 뒤를 따라 가야바 관저로 향합니다. 베드로와 동행한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성서는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고만 간단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 사람은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는 분명 아니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대다수가 갈릴리의 어부 출신이었던 열 두 제자 가운데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그냥 들어갈 수 있는 인물은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그룹의 리더인 베드로조차도 가야바의 관저 문밖에 서서 출입허락이 떨어지기까지 기다리고 서 있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문밖에 서 있는지라;요18:16> 잠시 후 관저에 먼저 들어갔던 그 제자가 다시 문밖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문지기 여자에게 무슨 말인지를 전하고 곧 베드로를 데리고 관저로 들어갑니다. 문지기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요? 가야바관저에 들어와도 좋다는 내부의 허락을 전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허락이 떨어지기 까지 문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문을 통과하는 순간 문지기 여자가 묻습니다. “너도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 베드로가 얼른 대꾸합니다. “나는 아니라.”

베드로가 ‘나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딱 잡아떼는 장면에 뒤이어 예수가 가야바에게 심문받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가야바는 예수에게 두 가지를 집중적으로 물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요18:19> 가야바가 물은 것은 예수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해서 입니다. 제자들에 대해 물은 것은 제자들이 누구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리고 교훈에 대해 물은 것은 예수가 주장하는 ‘하나님나라’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가야바는 예수가 펼치는 하나님나라 운동의 조직과 이념에 대해 심문한 것입니다. 가야바의  심문에 대해 예수는 둘을 나누어 답했습니다. 교훈에 대해선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며 일축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드러내놓고 말했으니 새롭게 자백할 감추어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 대한 심문에 대해선 침묵하셨습니다.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침묵은 십자가 죽음까지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심문받는 장면에 이어서 다시 베드로가 시치미를 떼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가야바의 관저 뜰에서 불을 쬐고 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에 모여 있던 이 ‘사람들’은 대체 누구일까요?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은 아무나 모일 수 있는 장터바닥이 아닙니다. 대제사장의 관저입니다. 때문에 이들은 예수를 심문한 사제들과 고위관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가 심문받을 때, 대제사장에게 답변하는 태도가 불손하다며 예수를 손으로 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서는 그를 ‘아랫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대제사장의 아랫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심문하는 자리에 함께 배석한 사람입니다. 바로 그들이 예수의 심문이 끝난 후 베드로를 심문하는 것입니다.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런데 이 질문은 본래 부정의문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NIV 영어성경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뉘앙스를 가진 질문입니다. <너, 예수의 제자가 아니지? 그렇지?>의 뜻입니다. 베드로가 곧바로 답합니다. <나는 아니다>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 하는 질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정의문문입니다. <올리브동산에서 네가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못 본 게 맞지? 그렇지?> 베드로를 심문한 이 사람들의 질문은 질문이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올리브동산에서 그와 함께 있지 않았다고 허위자백을 받아내고 다짐시키는 것입니다. 이 허위자백의 대가는 무엇일까요?

엔도가 제기한 수수께끼로 돌아가 봅시다. 예수의 제자들은 왜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지 않고 예루살렘 의 모처에 함께 모여 있었을까요?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왜 예수를 죽인 자들은 제자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음에도 이들을 추적하거나 체포하려들지 않았을까요? 대제사장 가야바를 잘 아는 어떤 제자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베드로를 데리고 가야바관저를 찾아갔을까요? 베드로를 심문한 사람들은 왜 베드로에게 예수와의 관계를 부인하는 허위자백을 요구했을까요? 그 대가는 무엇일까요? 왜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두고 ‘주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말하기 시작했을까요? 

베드로의 배신은 결코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배신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가야바를 만났습니다. 가야바를 잘 아는 어떤 제자가 다리를 놓았습니다. 베드로를 심문한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끊기만 하면 신변에는 아무 이상이 없을 것임을 베드로에게 약속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과 제자들의 신변안전을 약속받는 대가로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자신들을 대신해서 죽은 대속의 죽음으로 실제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제자들의 고백은 그들에게는 신학적 고백이 아니라 뼈아픈 진실이 담긴 고백입니다. 제자들에 대해 끝까지 침묵하며 죽으신 예수는 실제로 제자들의 모든 죄를 홀로 짊어지고 죽으신 분이었습니다. 엔도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극심한 고통과 혼미한 의식 가운데서도 자신을 저버리고 배신한 이들을 사랑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예수, 제자들은 비로소 그러한 예수를 알았던 것이다. … 자신들의 비열한 배신행위에 대해 노여움이나 원한을 품지 않고, 도리어 사랑으로 대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제자들로서는 이제까지 살아오는 가운데 그러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십자가 대속의 죽음은 관념이 아니었습니다. 고통 앞에 연약해지고 비열해지는 인간을 끝까지 사랑으로 품은 뼈아픈 진실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신앙의 밑바탕엔 공허한 신앙고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훗날 진정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신앙고백이 뼈아픈 진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은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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