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박사. |
이제 한 걸음 나아가, 제반 상황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 보도록 하자. 어느 날 바리사이 한 사람이 예수를 자기 집에 초대했다. 틀림없이 그분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이루어진 초대였을 테니 여러 사람들이 함께 초대를 받았을 것이다. 아니면 갈릴리 호수가 어디쯤 높은 곳에 예수가 있었다고 가정해도 좋다. 그리고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러 둘러앉아 있었다.
대부분은 초라한 행색의 청중들이었으나, 몇몇은 희멀건 얼굴로 네 모퉁이에 긴 술이 달린 옷을 잘 차려 입고 군데군데 떼를 지어 앉아 있었다. 주변 이들과 비교하여 눈에 잘 띄는 모습이었다. 예수는 바로 그들의 콧등에 대고 저주의 말씀을 내린다. “너희는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즐겨 찾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 사람들은 무덤인 줄도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닌다.”(누가 11,43-44) 그 꾸지람이 얼마나 호되고 그 순간이 얼마나 민망스러웠던지 어떤 율사의 입에서 그만 볼 멘 소리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선생님, 그런 말씀은 저희에게 모욕이 됩니다.”(누가 11,45)
하지만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일면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통쾌함을 느끼면서, 다른 한 면으로는 큰 걱정을 했을 것이다. “저렇게 바른 소리만 하다가는 크게 다치실 텐데, 제도권 종교인들이 무서운 힘을 가진 자들이라는 사실을 모르시나?” 과연 그들이 걱정한 대로 율사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를 처단할 음모를 꾸몄고(마가 3,6) 마침내 실행에 옮기고야 말았다(마가 14-16장).
예수가 저주를 퍼부은 상대들은 대부분 율사나 바리사이 등 유다교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으며, 모두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에 불과했다. 하느님의 율법을 핑계로 자신들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고, 겉으로는 점잖은 척 하지만 뒤로는 이리저리 추잡한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자들이었으니 말이다. 예수의 독설을 통해 그들의 위선이 남김없이 밝은 해 아래 드러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흔히 역사의 예수를 매우 고상한 분으로 여기고 자신도 그분처럼 고상하게 살아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테면,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마디 하나 하나가 장미꽃으로 변해 공중에 사뿐 사뿐 떠다녔으리라는 상상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역사의 예수는 고상한 언어와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그분은 갖가지 욕설을 입에 담았으며, 자극적이고 끔찍하기 짝이 없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고, 사람의 면전에서 저주를 퍼붓는 등 무교양한(!) 행동을 한 분이었다.
일반적으로 복음서 작가들은 예수에게 누가 될 법한 보도를 가능한 한 옮겨 적지 않으려 애쓴 사람들로 여겨진다. 그러나 복음서 작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이 이 정도였으니, 역사의 예수는 온전한 의미에서 대단한 ‘독설가’였음이 확실하다. 따라서 올바른 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역사의 예수에게서 예의에 사로잡혀 할 말도 못하는 고상함을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두려움을 이겨내는 그분의 자신 있는 태도와 심장을 뒤흔드는 힘 있는 말씀에서 큰 용기를 얻어야 할 것이다.
박태식 박사(서강대, 가톨릭대, 성공회대 신학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