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한(恨)의 개념은 우리 한국인의 감정 깊은 데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어서, 원수를 갚아야 한풀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원수가 되고 그것이 영원한 과거가 되어 해결의 길이 없으면 운명적인 것이 된다. 원수끼리 만나는 날에는 비극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옛 중국의 성현은 원수를 맺지 말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면 피할 길이 없으리라고 말했다. 혹시 이 세상에서는 만날 기회가 없을지 모르나 사람이 죽으면 다 간다는 천당 아니면 지옥에서는 반드시 서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죽기 전에 원한을 갚으려 하지 말고 선하게 해소하는 길이 상책이다.
금년 부활절에 어느 신부가 TV에서 교인들에게 한국의 정(情)과 한의 문화를 설명하면서 한국인의 한 문화를 설명하는 ‘서편제’라는 영화의 한 장면도 보여 주었다. 그러면서 이 한을 푸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문화를 신학에 접목시키려 했으나 조잡하게 접목시켰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가 지은 죄를 용서받고 또 다른 사람이 나에게 지은 죄(원한거리)도 용서하는 길이지, 내가 품은 타인에 대한 한을 갚는 길은 아니다.
4.19 묘지에 잠들고 있는 그 망령들은 사죄를 위하여 찾아온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세운 업적은 영구적인 것인데 그것을 금후의 한국의 역사의 발전을 위한 값진 희생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희생자는 반드시 대가와 칭송을 기대하여 타산적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유가족이나 동지들은 전쟁터에서 전우의 사체를 밟고 전진하여 갈 것이지 원한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