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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 칼럼] 망상(妄想)

예수원교회 김성 목사

▲예수원교회 김성 목사.
연암 박지원의 <答蒼厓之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화담 서경덕 선생이 길을 가다가 길에서 울고 있는 한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선생이 물었습니다. “자네는 왜 길에서 울고 있나?” 그러자 젊은이가 답했습니다. “저는 다섯 살에 눈이 멀어 지금까지 이십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섰다가 갑자기 천지만물이 또렷하고 환하게 앞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기뻐서 집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길에는 갈림길도 많고 집집마다 대문은 어찌 그리 똑같은 지 도무지 집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 그러자 선생이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내가 자네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네. 도로 자네의 눈을 감게. 그러면 다시 자네 집을 찾을 수 있을 걸세.” 선생의 말을 들은 젊은이는 도로 눈을 감고 예전처럼 길바닥을 지팡이로 두드리며 조심스럽게 한걸음씩 발걸음을 옮기자 어느새 자기 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박지원은 이 이야기 끝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色相顚倒 悲喜爲用 是爲妄想” “빛깔과 형상이 전도되고, 슬픔과 기쁨이 작용하여 이것이 망상을 일으켰다” 눈먼 젊은이의 눈이 열리는 순간 도리어 그는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을 때는 지팡이를 두 눈 삼아 길을 두드리며 마음으로 길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눈이 보이자 더 이상 마음으로 길을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길을 보면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눈앞에는 여러 갈래 길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집집마다 대문은 똑같아 보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는 집으로 가는 길도, 집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젊은이가 다시 집을 찾기 위해서는 다시 눈을 감고 마음으로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色相)과 감정(喜悲)은 망상(妄想)을 만들어낼 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한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눈을 뜬 그에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9:39)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발끈했습니다. “우리도 맹인인가?” 아무도 바리새인들더러 맹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말을 들은 그들 스스로가 “우리도 맹인인가?”라며 예수의 말에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이유는 그들 스스로 자신들은 ‘보는 자’라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는 예수의 말을 자신들은 맹인이 될 것이라는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의 답변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41) 예수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는 이들을 가리켜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마15:14)라고 했습니다. 예수에 말씀대로라면 바리새인들은 ‘보는 자’라고 자부하나 실제론 맹인과 다름없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두 눈과 감정이 만들어낸 망상을 보고 좇을 뿐 실상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진리와 구원에 이르는 길을 홀로 알고 있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지만 실제론 그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고려 말의 충신 이달충의 <愛惡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愛惡箴>은 좋아함과 미워함을 경계한다는 뜻입니다. 한 젊은이가 노인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날마다 모여서 인물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노인장을 사람으로 깍듯이 대우하고, 또 다른 사람은 노인장을 사람취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는 노인장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노인장께서는 대체 어찌하여 어떤 사람으로부터는 사람대접을 깍듯이 받고 다른 어떤 사람으로부터는 사람취급조차 받지 못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노인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나를 사람으로 대우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또 나를 사람취급하지 않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네. 사람다운 사람이 나를 사람대우했다면 기뻐할 일이요, 사람답지 못한 사람이 나를 사람취급하지 않았다면 이 또한 기뻐할 일 아니겠나? 그리고 사람다운 사람이 나를 사람취급하지 않았다면 이는 내가 두려워할 일이요, 사람답지 못한 사람이 나를 사람대우했다면 이 역시 두려워 할 일이 아니겠나?” 노인은 젊은이에게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깍듯이 사람으로 대우하거나 혹은 사람취급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우선 사람다운 사람인지 아니면 사람답지 못한 사람인지 먼저 살펴보고 나서, 기뻐하거나 두려워해야 하는 거라네. 나를 사람으로 대우한 사람이 어진 사람이던가? 아니면 나를 사람취급하지 않은 사람이 어진 사람이던가?”

우리는 늘 누군가를 평합니다. 그리고 거꾸로 누군가의 평을 받습니다. 그런데 대개 우리는 사실 그대로의 실상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色相)과 감정(喜悲)이 망상(妄想)을 지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겉모습만 볼 수 있는 두 눈과 굴절된 감정의 렌즈를 통해 실상을 비뚤어지게 바라봅니다. 실제의 모습이 두 눈과 감정의 렌즈를 통과하며 굴절되어 보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실상으로 여기고 이런저런 평을 합니다. 자기 자신이 굴절되어 있는 사람에게 타인이 바르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조차도 죄인으로 정죄하고 비난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위엣 이야기에 나오는 노인장이 자신을 사람취급하지 않고 비난하는 사람이 어진 사람인지 아닌 지부터 알아본 이후에 기뻐하든 두려워하든 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자신의 감정이 만들어내는 망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감정은 순간적일 것일 뿐 진리와 영원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이 사실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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