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박사 |
공군에 근무하는 기상전문가 반기성 대령은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 호수에 자리 잡게 되었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는 마르 4,1의 보도를 알기 쉽게 풀이해 주었다. “소리는 밀도가 다른 매질을 통과할 때 밀도가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굴절되며 진행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예수가 배 위에서 설교했던 그 날은 기상학적으로 볼 때 아주 날씨가 맑은 날 오후였을 것이다. 기온 상승으로 인해 소리가 높은 쪽으로 전달이 더 잘될 뿐만 아니라 호수에서 산 쪽으로 부는 바람으로 인해 소리가 넓은 지역으로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신문에서 읽은 글이다. 예수님이 호수에 배에 띄운 상태에서 설교한 까닭을 내내 궁금해 했던 필자에게 한줄기 시원한 바람 같은 해설이었다.
삼 년의 공생활 동안 예수님의 인기는 최고였다. 물론 예수님의 탁월한 하느님 나라 해석과 그분의 인격에 감동을 받아 한 가지 말씀이라도 귀담아 들으려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딘가 몸이 불편해서 온 이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다 고쳐주었다. 그랬더니 이제는 배가 고프다며 밥을 내 놓으라고 한다. 그 소원도 예수님은 다 들어주었다. 4천명이 모였든, 5천명이 모였던 그들 모두를 배불리 먹이고 남은 음식을 추려보니 7광주리와 12광주리가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 날 예수님이 한 턱 단단히 쓴 셈이다. 그러면 다음 차례는 무엇일까?
아픈 몸이 편해지고 배까지 부르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즐거움을 원하기 마련이다.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당시에 무엇을 가지고 그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었을까? 요즘처럼 TV가 있어 강호동의 쓸데없는 너스레를 들을 것인가, 운동경기 생중계를 볼 것인가, 아니면 예루살렘까지 가서 전차 경기를 즐길 것인가? 사람들의 졸음이 쏙 달아나게 할 방법은 재미있는 이야기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느 여인이 은전 한 닢을 잃어 버렸다. 그래서 온 집안을 발칵 뒤져서 겨우 은전을 찾아냈다. 기쁨에 겨운 여인은 마을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잔치를 열었다.
그 여인이 과연 정상인가? 그깟 은전 한 닢 찾았다고 동네잔치를 열 게 무어란 말인가? 잔치 비용이 은전 한 닢을 족히 뛰어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이치에도 닿지 않는 엉뚱한 말씀을 했을 리 만무이고....... 이제 이야기 속에 있는 의미장치와 재미장치를 찾아보자.
이스라엘의 풍습에 따르면 딸이 결혼 할 때 부모는 지참금을 딸려 보낸다. 그러나 그런 공식적인 돈이 아니라 딸에게 아무도 몰래 슬며시 쥐어주는 돈도 있었는데, 급한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한 돈이다. 보통 은전 열 닢 정도를 주었는데, 우리 식으로 보면 ‘급전’으로 돌려쓸 수 있는 패물인 셈이다. 그런데 말이 ‘급전’이지 시집간 딸에게 은전 열 닢은 부모님의 존재를 암시해주는 돈이었다. 딸은 그 돈을 보면서 언제나 생각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관절염은 차도가 있는지, 환절기면 더해지는 아버님의 천식은 좀 어떤지...’ 그렇게 귀중한 돈이기에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머리를 땋을 때 항상 그 속에 같이 묶어 보관해 두었다. 그런데 머리를 감다가 그만 그중 한 닢을 잃어버렸다. 여인은 마치 실성한 듯 그 은전을 찾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이들 중에 그 여인이 바로 하느님을 암시한다는 사실을 짐작 못할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하느님은 죄인 한사람을 그렇게 열심히 찾는 분이고 만일 그를 찾으면 기쁨에 넘쳐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돌아가신 줄 알았던 부모님을 다시 만났을 때 딸이 느끼는 기쁨으로, 하느님은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섬세한 사랑을 알려주기에 더 없이 좋은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보다 특이한 점은 예수님이 이야기 중에 하느님을 여성에 비긴 것이다. 하느님을 그릴 때 우리는 보통 남성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등장하는 하느님이 그렇다. 그런데 비유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다정다감한 여성으로 그려내고 있다. 천편일률적으로 남성중심 사회였던 당시의 정서로 볼 때 이만저만 영혼의 자유를 누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수님 덕분에 지긋지긋했던 고통과 굶주림이 사라졌다. 이제 갈릴리 호숫가에 편히 앉아 시원한 바람에 실려 오는 예수님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얼마나 심오하고, 예수님이 전해주는 영혼의 자유는 얼마나 놀라운가!
오늘따라 그 사람들이 몹시도 부러워진다.
박태식 박사(서강대, 가톨릭대, 성공회대 신학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