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돌릴 틈도 없이 바빴던 6월 어느 날, 베리타스 신문사로부터 갑작스런 원고청탁을 받았다. 동성애와 자살을 주제로 칼럼을 부탁해 온 것이었다. 동성애와 자살. 우리 사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워낙 민감한 주제여서 어떤 논지로 글을 쓰든 비판과 비난이 일어날 게 뻔하다는 생각에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러다가 결국 수락을 했다.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 아니라, 어느 누구든 이런 글을 쓸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심리상담연구원 '나무와 새' 최의헌 원장 |
내용은 다르지만 비슷한 일이 예전에 있었다. 누가 나에게 상담을 받겠다고 찾아왔는데 나름 유명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 분의 문제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고, 잘 안 되는 면만 부각될 수도 있기에 거절하고 싶었으나 결국 수락했다. 얼굴이 잘 알려진 분이 우리나라 어딜 가서 속 편히 상담 받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
만화작가 황인호의 ‘은혜’라는 한 컷 만화가 있다. 예수님이 무리와 함께 웃고 있는 두 장면인데, 첫째 무리는 멀쩡한 사람들이고 둘째 무리는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들의 복장과 표정에서 알 수 있다. 두 그림 밑에는 간단한 제목이 있는데 첫째 그림은 ‘grace’(은혜), 둘째 그림은 ‘amazing grace’(놀라운 은혜)다. 마음에 쏙 드는 그림이다. 둘째 그림처럼 예수님은 나의 이상한 심성을 그대로 수용해주실 것 같다. 그렇다고 그 심성이 옳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비난하지 않으실 것 같다. 내가 예수님에게 “이런 내 모습이 싫지 않으세요?”라고 하면, 예수님은 “너 스스로 충분히 비난하고 있는 줄 아는데, 내가 거기에 뭣 하러 하나 더 얹어야겠니? 그 정도면 됐다” 하실 것 같다. 이런 상상은 내가 정신과 의사가 된 배경 그리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요한복음 8장)에 대한 나의 이해를 반영한다.
예수님은 죄 있다 하는 사람에게 한없이 너그러웠고 죄 없다 하는 사람에게는 칼처럼 날카로우셨다. 그런 태도는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적도 많았고 욕도 많이 먹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군중들 가운데서 수치를 당하고 있을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당신이라면 이 여인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추궁한다. 다시 말해 “너는 어느 편이냐?”는 것이다. 다수에 속할지 아니면 소수에 속할지 압력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속함으로써 어메이징한(!) 마이너리티가 되셨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평생 마이너리티라는 보장은 없다. 바리새인도 어찌 보면 순수한 신앙을 표방하는 마이너리티에서 출발했으나 기득권의 대열에 들어가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집단이 됐다. 역시 마이너리티에서 출발한 한국의 기독교는, 냉정히 말해 더이상 마이너리티가 아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인맥을 만들어 세상에서 성공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엔 대중문화예술인이 자기 종교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 종교를 표방하는 데 따른 불이익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상황이 변했다. 오히려 기독교인임을 표방하는 것이 더 멋있어 보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참 여러 면에서 약자의 편이 되어 왔다. 그런데 소수가 어느덧 다수가 되고 기득권자가 되면 변질이 된다. 변질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약자와 소수자로서 살던 시점에 당한 억울함과 압박을 기억하면서 혹시 상황이 변해도 공정하고 정의롭게 사람과 상황을 대하는 게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성적소수자를 향한 우리의 도덕적 판단과 분획화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는 성적소수자를 비난하기 전에 이해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며, 다수가 그들을 공격하려고 한다면 기꺼이 소수의 편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소수가 다수가 되거나 기득권을 취하는 날이 왔을 때 이른바 올챙이 적 시절 잊고 더 큰 권세를 행사하려 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심으로 그들이 스스로 마음을 돌이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드셨다. 우리는 집단의 압력을 받으므로 집단이 “그렇다”고 할 때에 “아니다” 하는 얘기를 쉽게 꺼낼 수 없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할 때도 군중은 집단의 압력에 충실히 따랐다. 그런데 어떻게 이 상황에선 다수가 집단의 압력보다 개인의 양심을 따를 수 있었을까…. 그것을 터득해보려고 일단 따라 하기를 시작한다. 칼럼을 통해 소수를 대변하는 끄적거림과 외침을 다수를 향해 시작한다. 나는 예수님처럼 담대하지가 않아서 집단의 압력이 걱정되고 나의 위신과 입지에 목을 맨다. 부디, 살살 대해 주시기를.
최의헌 · 심리상담연구원 '나무와 새' 원장, 연세의대 외래교수, 목사.
※<최의헌 칼럼>은 9월부터 본격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