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박사. |
지난달에 이어 또 하나의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누가 12,13-21)입니다. 이 비유는 자체적으로 알쏭달쏭 하다기 보다는 숨어있는 뜻을 잘 헤아려야 하는 비유입니다.
여러분은 배가 터질 정도로 먹어본 적이 있습니까? 요즘은 살찌는 게 무서워 그렇게들 먹지 않지만 20-30년 전 만 해도 상황이 영 달랐습니다. 그 때는 우리나라에 전체적으로 먹을 게 귀하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어디 잔치라도 열리면, 그날로 한판 승부를 거는 겁니다. 그래도 어른들은 체면을 차리느라 수저를 천천히 옮겼지만 아이들의 손놀림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요. 자식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쓰는 요즘 부모들의 세태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부자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생필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당시 사정에서 오랜만에 대풍을 맞아 앞으로 몇 년간 온 가족이 먹고 살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창고가 협소해 곡물을 다 저장할 수 없다니 말이나 되는 노릇입니까. 그래서 부자는 큰 맘 먹고 옛 창고를 부순 후 창고를 새로 크게 지었습니다. 어차피 내년 추수 때에 또 수확물이 들어 올 테니 짓는 김에 확실하게 해두자는 것이었습니다. 창고가 완성된 날 기분이 몹시 좋아진 부자는 그만 예전에 먹던 실력대로 마구 먹어댔습니다. 하지만 살찐 몸에는 무리였던 모양입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잠들었던 부자는 그만 횡격막이 눌려 호흡 곤란으로 그날 밤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물론 성서에는 호흡곤란이라는 말은 안 나옵니다. 추측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비유에는 가엾은 부자에게 한 치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제풀에 넘어갔다는 겁니다. 가상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부자의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좀더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합니다. 과연 부자만 그렇게 허무하게 죽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꼭 그렇게 극적으로 죽는 경우만 예를 들었을까요? 아닙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언제 어느 때 갈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9월 11일에 뉴욕의 무역 센터로 출근했던 사람 중에 어느 한사람이라도 오늘이 나의 제삿날이 될 것이라는 예견을 한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에게 내일이란 없는 것입니다. 그저 오늘 하루 예수 믿고 잘 살면 됩니다. 오늘은 상당히 바쁘니까 다음에 적당한 기회에 착한 일도 하고, 어디 날을 잡아 차분하게 기도를 드리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오늘 밤에 죽습니다. 다음 주에 피정 날짜까지 잡아놓고 말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말씀을 처음 듣던 이들은 치를 떨었을 겁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자비가 고작 그 정도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존적인 결단을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결단을 내려라!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서리 발 같습니다.
같은 비유를 두고 누가는 조금 달리 알아들어 21절을 첨가했습니다. 말하자면 비유의 참뜻을 독자들이 올바르게 알아듣도록 돕기 위해 21절을 편집해 넣은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재산을 쌓아두는 사람은 그 꼴이 난다.’(21절)는 것이지요. 누가는 부자가 갑작스레 죽은 이유는 그가 지독한 수전노이기 때문이었다고 단정을 한 겁니다. 물론 비유에서 그런 교훈을 도출해낼 수도 있습니다. 아마 누가의 공동체에 수전노들이 많이 있어 그들이 듣고 깨우치라고 일부러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가의 편집 문으로 실존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예수님의 의도가 퇴색되는 느낌이 듭니다. 이는 그저 누가의 해석에 불과합니다.
인생의 승부는 오늘 걸어야 합니다. 오늘 먹을 빵을 오늘 달라고 하는 주의 기도를 보십시오. 혹시라도 여러분 중에 내일 먹을 빵을 미리 달라거나, 한달 양식을 냉장고에 채워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오늘 걱정은 오늘 하루로 족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강조한 실존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글/박태식 박사(서강대, 가톨릭대, 성공회대 신학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