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동완 목사 4주기 추모예식이 5일 서울 연지동 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열렸다. ⓒ김진한 기자 |
주변화된 바닥 민중들과 한 몸이 되어 더불어 살고자 했던 고 김동완 목사 4주기 추모예식이 5일 저녁 6시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열렸다. 김동완 목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주관한 이날 추모예식에서는 유경재 목사가 설교를, 김기택 감독이 추모사를, 유족을 대표해 감신대 김홍기 총장이 인사를 했다.
‘바닥으로 거듭난 사람’(요한복음 3:1-8)을 제목으로 메시지를 전한 유경재 목사는 "우리가 추모하는 김동완 목사는 바람으로 거듭나서 바람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가신 분이라고 본다"며 "그는 전태일의 분신사건을 계기로 부흥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고난당하는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함이 바른 신앙의 길이라고 믿고 고난의 길로 그 삶의 방향을 틀었다. 바람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는 그 때부터 바람이 되어 바람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며 고난을 당하다가 홀연히 바람처럼 우리 곁을 떠났다"고 말했다.
유 목사는 특히 유신체제 시절 김 목사가 온갖 고초에도 민주화 운동을 위해 부지런히 일했음을 강조했다. 그는 "김 목사님은 우리가 아는 대로 참으로 부지런한 분이었다. 1970년대에는 유신체제에 반대하여 구속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고, 전태일 사건을 계기로 노동운동에 눈을 떠 부지런히 저들의 아픔에 동참했으며 1980년대에는 계속되는 군사정권의 탄압 속에서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에 앞장섰으며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통일과 평화를 위해 부지런히 뛰셨다. 김 목사님은 바람처럼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그 시대의 부름을 따라 항상 앞장 서 움직이셨던 선구자요 운동가셨다"고 말했다.
또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통일운동에도 큰 열정으로 임한 김동완 목사를 회고했다. 그는 "바람으로 거듭난 김목사님은 1970년에 전태일 사건 이후 신앙적인 변화를 겪고 평생을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을 하면서 사셨다"며 고인이 생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김 목사는 당시 "벽을 넘는 일, 민주화의 벽을 넘고 판문점의 벽을 넘는 운동, 온겨레 손잡기 운동과 같은 벽을 허무는 일을 하느님이 시키셨기에 제가 감당해왔다는 생각을 한다"고 고백했었다.
종교 간 대립과 갈등을 넘어 평화를 지향했던 김 목사의 종교 간 대화 활동을 짚기도 한 유 목사는 "그는(고 김동완 목사는) “진짜 평화운동은 하나님의 평화, 성서적인, 예수적인 평화를 만드는, 평화의 문화를 만드는, 자연의 평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보았다"며 "그래서 교회 이름도 '평화를 만드는 교회'로 바꾸고, 교회학교 어린이들에게 '샬롬!'이라고 인사를 하게 하는가 하면 금요예배 때 평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논의하고 평화를 위한 신학강의를 하는 등 구체적으로 평화를 위한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혔다.
설교가 끝나자 이근복 목사(NCCK 선교훈련원장)의 추모사 그리고 유족을 대표해 고 김동완 목사와 형제지간인 감신대 김홍기 총장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이근복 목사는 "밑바닥 민중들과 더불어 살고자했던 김 목사님의 믿음과 열정이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한국교회에 더 깊이 아로새겨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홍기 총장은 친형인 고 김동완 목사와 재학시절, 교회개척 시절 등을 잠시 회고하며 "개척자로, 선구자로 항상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신학을 탐구하고, 항상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선교현장을 열어가는 형님의 평생의 삶을 기억하면서 용기있는 신앙인의 모습, 갈 바를 모르고 찾아간 아브라함 같은 신앙인의 모습을 본다"고 말했다.
또 여전히 현재 진행형 상태로 교회 안팎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는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사태를 의식했는지 김 총장은 "통일운동의 답보상태를 보면서, 한국감리교회의 안타까운 현상을 보면서 형님이 그리워진다. 아 그가 다시 부활하기를 희망한다. 여기 저기 제2의 김동완이 나타나서 새 역사의 장을 열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