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학자 박신배 교수(그리스도대)가 3대 민중신학자에 김찬국(1927~2009)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최근 발표한 논문 <구약 민중신학의 재발견 – 김찬국 신학을 중심으로>에서 “기존에는 안병무, 서남동만이 민중신학자로서 자리매김되어 있었는데 또 한 명의 실천적 민중신학자인 김찬국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찬국은 연희대학교 신과대와 대학원, 미국 유니온신학교 등에서 공부하고 1956년부터 연세대 신과대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그러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대학 강단을 떠나고 옥살이를 하는 등 고난의 세월을 보내면서, 영등포산업선교회 등 단체 활동을 통해 약자들을 돌보는 삶을 살았다. 1984년 연세대로 돌아온 뒤로도 “교단에 서서 학원과 노동현장의 민주화와 산업선교화를 위해 지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김찬국은 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 및 위원장으로 오래 있으면서 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1993년에는 전국 해직교수들의 복직을 촉구하기 위한 농성에 앞장서는 등 사회정의에 앞장섰다. 박신배는 김찬국이 “항상 민중들의 편에 섰다”며 “그는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한 맺힌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고 평했다.
신학적으로 김찬국은 민중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구약학 이론들을 전개했다. 박신배는 김찬국의 신학에 대해 “그는 이스라엘 민족공동체에서 민중을 찾는다. 억눌린 민중의 탈출, 자유에로의 탈출, 민중 전체의 구원 등을 출애굽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고 보았으며, 예언자들은 이들의 인권을 대변하는 민중대변자라고 보았다”고 말했다.
또 김찬국이 민중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폰라드의 구속사 일변도의 신학적 해석을 지양하고 새로운 창조 신앙을 강조했는데, 이는 그의 사회적, 정치적 민중신학의 기초적 구약해석”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김찬국의 삶과 신학을 볼 때, 박신배는 “(일반적으로) 3대 민중신학자로 서남동, 안병무, 문익환을 꼽는다”며 “(그러나) 신학 연구에서 중요한 요소가 삶의 자리인 것을 감안할 때, 한국 학생운동과 민주화의 중심적 자리에 있다고 한다면 문익환보다는 김찬국의 이름을 드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문익환의 경우는 “민족이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시대의 스승”으로서 김찬국과는 삶의 자리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또 “신약 민중신학자 안병무, 조직신학자 서남동, 그리고 구약 민중신학자 김찬국은 상아탑 안에서만의 학문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학으로 백성들과 함께 하는 신학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삶의 현장에서 절규하는 민중의 한을 대변하고 풀어주는 신학을 했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