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5년 11월 1일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는 수 만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성당에 모여 있었다. 바로 그때가 가톨릭교회 최고의 축일 중 하나인 만성절이었기 때문이다. 장엄하게 미사가 시작된 직후 리히터 규모 9.0의 지진이 발생했다. 3분 간격으로 일어난 두 번의 지진과 세 차례의 쓰나미, 그리고 이어진 대화재는 리스본 시내의 85%를 파괴하였다. 리스본 시민 27만 명 가운데 3만~7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더 슬픈 사실은 당시 리스본은 성당과 수도원으로 가득한 거룩한 도시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리스본의 시민들은 이해할 수 없어 울부짖었다. 왜 하나님은 성인들을 기념하는 축일에, 그것도 하필 기도 시간에,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도 더 거룩한 도시를 심판하시는가?
▲손호현 교수 ⓒ베리타스 DB |
그는 이번 논문에서 자연재해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견해에 반대한다. 이 견해는 잠재적으로 비성서적이라는 사실을 신약성경의 예수의 말씀에 기초하여 주장한다. 또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지진에 대한 세 가지 가능한 신학적 해석을 제시한다.
지진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견해가 왜 비성서적인가
동남아 쓰나미 때 일부 기독교인들은 쓰나미의 탓을 희생자들에게 돌렸다. 희생자들이 성탄절인데도 휴양지에 놀러 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셨을 것이고, 만일 그들이 성실한 기독교인들이었다면 교회에 있었을 것이라는 논지이다.
손 교수는 이러한 견해가 비성서적이라고 단언한다. 그 근거는 요한복음 9장에 등장하는 소경의 이야기다. 소경의 선천적 장애는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소경 본인이나 그의 부모가 저지른 죄에 대한 “천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예수는 이러한 선천적 장애와 범죄 사이를 묶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연결고리를 단호하게 끊어버린다. 소경이 소경 된 이유에 대해 예수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손 교수는 소경의 장애가 본인의 의지로 결정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는 데 주목하며, 역시 인간의 의지와 상관 없이 일어나는 자연재해를 소경의 장애와 동일선상에 놓고, “따라서 우리는 최소한 죄와 자연재해의 심판이라는 인과론적 연결고리에 대해 예수가 회의적이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누가복음 13장의 ‘무너진 망대’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예루살렘의 저수지 옆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에 대해 예수는 ‘이 18명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한다. 손 교수는 망대가 무너진 원인이 명확하지는 않으나 이 사고의 이유가 인재라고 할 만한 근거가 본문에 없는 것으로 보아 자연재해였을 가능성이 있다며, 이 경우 이 본문 역시 자연재해와 하나님의 심판 사이의 연결고리를 예수가 끊고 있는 예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논의들에 비춰 볼 때, 자연재해가 도덕적·신학적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견해는 비성서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지진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의 주장대로 지진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는 세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첫 번째 대안은, 하나님은 넬슨 파이크(Nelson Pike)가 “도덕적으로 충분한 이유(morally sufficient reason)”라고 부른 것을 가지기 때문에 지진을 허용하거나 일으킬 수 있다는 논리이다. 파이크는 아이의 건강을 위해 쓴 약숟가락을 강제로 아이의 입 속에 밀어 넣는 아버지의 예를 든다. 마찬가지로 지진의 경우 하나님도 그러한 도덕적으로 충분한 이유를 가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대안은, 우주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은 선과 악, 천국과 지옥과 같은 대조적 부분들을 필요로 한다는 성 어거스틴의 미학적 신정론이다. 서로 대조적인 부분들이 존재해야만 우주 전체가 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지옥과 천국이라는 우주적 대조는 영원하다. 이러한 미학적 신정론을 지진에 적용시켜 보자면, 지진은 ‘하나님의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반드시 그것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아니다.
셋째로 손 교수는 지옥은 영원할 수 없다는 수정된 어거스틴의 미학적 신정론을 자신의 입장으로 제시한다. 어거스틴은 영원한 지옥이 존재해야 한다고 보았으나, 이와 달리 자신은 “아름다운 우주는 영원한 지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본다고 밝혔다.
어거스틴은 왜 영원한 지옥을 말했을까. 그는 하나님이 인간의 악행에 대해 도덕적 ‘균형잡기’의 방식을 사용하며, 악행자들에 대한 처벌의 장소를 필요로 한다고 보았다. 또 미학적으로도 대조 효과가 필요하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 모두 영원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즉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천국과 지옥을 포괄하는 ‘우주적’ 범위에서는 구원하시지만, 그 안의 개개인들을 ‘개인적’으로 모두 구원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견해에 반박하며 손 교수는 지옥이 영원할 수 없는 근거를 제시한다. 그는 “영원한 하나님 존재와 비교할 때, 그 어떤 피조된 존재도 무한한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며 “따라서 유한한 가치를 지닌 피조물에 가해진 피해는 어떤 방식으로든 항상 유한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어떤 인간도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상응하는 범죄를 지을 만한 존재론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또 “어거스틴의 도덕적 균형잡기라는 생각에 따르면, 정의는 각자에게 자신의 몫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어떤 죄에 대한 징벌이 무한하게 연장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우주의 아름다운 균형을 깨뜨리는 추한 것이 된다”고 말한다. 징벌이 그 죄에 상응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영원한 것이 된다면, 어거스틴의 논리 자체에 모순이 생기게 된다는 지적이다.
손 교수는 이번 논문의 목적에 대해 “지진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견해가 유일한 기독교적 견해도, 혹은 성서적 견해도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 “지진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며 자연재해에 대한 신학적 응답에 조심성을 가질 것을 신학자들에게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