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16,4-8절: 옳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다. 내가 청지기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자기네 집에 맞아들이게 해야지.'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렀습니다. 그가 첫째 사람에게 '당신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소?' 하고 물으니 그 사람은 '기름 백 말이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앉아서 얼른 쉰 말로 적으시오' 하고 일렀습니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나 빚졌소' 하고 물으니 그는 '밀 백 섬이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에게도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여든 섬으로 적으시오' 하고 일렀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했습니다. 그가 슬기롭게 처신했기 때문입니다.
▲박태식 박사. |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의 강점은 내용이 평이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고 비유의 뜻도 한 가지에 불과해 크게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는 데 있다. 누차 설명했던 바이다. 그처럼 비유는 쉽고 단순해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 나라의 엄청난 비밀을 담고 있어 듣는 이의 마음을 활짝 열게 만드는 신비한 매력이 있다. 하지만 오늘 다루려고 하는 ‘약은 청지기의 비유’(누가 16,1-8절)는 좀 예외인 듯 하다.
청지기에게 재산관리를 맡긴 주인은 누군가로부터 청지기가 재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를 불러다 혼쭐을 낸다. 그러자 청지기는 쫓겨날 것을 예비해 빚 문서를 위조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 칭찬을 하는데, 칭찬의 이유는 그가 슬기롭기 때문이었다.
어이가 없다. 청지기는 주인이 믿고 맡긴 재산관리를 허술히 했을 뿐 아니라 잘못이 드러나자 주인 재산에 축을 내면서까지 자기 살 궁리만 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 자는 관아에 고발해 치도곤을 내야 마땅하지 칭찬을 하다니? 그렇게 보면 주인도 어이없는 사람이기는 매한가지이다. 일단 매듭이 생겼으니 풀어보도록 하자.
당시 유다 풍습에 따르면 재력가는 중간 관리자인 청지기에게 전권을 행사하게 만드는 것이 상례였다. 사실 이는 비단 유다 풍습만이 아니라 로마제국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던 관례이기도 했다. 주인은 믿음직한 친구와 계약을 맺어 자기 재산의 법적인 관리를 부탁하고 서로는 최선을 다해 상대를 보호하고 지지했다. 그 경우 주인을 보호자(파트로누스)라 부르고 친구를 피보호자(클리엔텔라)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상부상조의 관계였다. 요즘처럼 각종 법적, 재정적인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에도 전문가가 필요한데, 당시 상황에서는 그런 전문가 친구가 더더욱 필요했을 것이다.
상황이 그 정도였으니 주인의 전적인 신뢰를 받는 사람이 청지기 자리에 임명되었음은 물론이다. 요즘으로 치면 전문 경영인, 혹은 월급 사장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어찌어찌하다 주인 재산을 잘못 관리해 주인 밑에서 붙어먹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큰 곤란을 겪게 되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누구를 원망할까? 청지기일까, 아니면 주인일까? 당연히 주인을 원망할 것이다. 설혹 월급 사장이 잘못했더라도 기업주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왜 그런 돼먹지 못한 인간을 청지기로 선택했냐는 말이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에 붙어먹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 그들의 손해를 만회해 준다. 비유에 보면 청지가가 이미 쫓겨나기로 결정 되었다니 이는 청지기 지위를 유지하려는 조치는 아니다. 오히려 실추되었던 주인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조치로 보는 게 비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될 것이다. 청지기는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그들의 구체적인 손해를 점검하고 그에 걸 맞는 보상을 해 준다. 따라서 이제 자칫 길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놓인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었다. 주인의 이름으로...청지기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인의 충복이었던 것이다.
오랜 전승 과정 동안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을 거치면서 비유의 원래 모습이 많이 손상되었다. 그래서 비유 자체만으로는 내용의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주인과 청지기를 로마의 파트로누스와 클리안텔라 관계에 기대어 바라보면 어느 정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속 시원한 설명은 불가능하니 이는 성서학의 한계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청지기와 같은 사람을 원한다. 언제나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 말이다. 아마 예수님의 비유를 처음 들었던 청중은 약은 청지기를 칭찬하는 주인의 처사에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생각을 해보고 나서 ‘아하!’ 하면서 무릎을 쳤을 것이다. 예수님이 닫혀있던 통찰력의 문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깨닫는 우리의 통찰도 그리 되기를 원한다.
글/박태식 박사(서강대, 가톨릭대, 성공회대 신학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