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믿음의 새싹
소래 마을의 김좌수 김성섬은 일찍이 깨어난 사람인데도 여전히 옛 습관을 벗어나지 못한 점이 있었나보다. 그의 후처 안씨가 그 집 자녀로써는 열 번째로 아이를 낳게 되었다. 김성섬은 아들 낳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딸을 낳은 것이다. 크게 실망한 김성섬은 홧김에 막말을 하였다.
“쓸데없는 것을 낳았군.”
“고년 내다 버려.”
그러나 어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으랴! 오히려 엄마 품에서 더욱 애지중지 잘 자라났다. 아버지가 마지못해 지어준 이름은 필녀(畢女)였다. [이제 여자는 그만!]이라는 뜻으로 마칠 필(畢)자로 지은 것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에는 [팔녀]였는데 그가 후에 정신학교에 들어가면서 필례(畢禮)로 개명한 것이다.
김성섬의 전실 아들 김윤렬은 어려서부터 장래가 촉망되는 천재였다. 그가 한양에 올라가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다. 수행했던 머슴이 먼저 달려와 그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버지 김성섬은 하늘에 오를 듯이 기뻤다. 그리하여 장원한 아들이 돌아오면 큰잔치를 벌릴 준비를 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귀향하던 중에 김윤열이 급성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도중의 어느 주막에서 급사하고 말았다. 아버지 김성섬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홧병이 나더니 1년이 못되어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김필례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 후로는 동복으로 첫 번째 오빠인 김필순이 실생활에 있어서나 교육적인 면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② 성장기의 환경
김필례는 어린 시절에 유서 깊은 소래마을에서 태어나 산과 숲, 호수와 해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마음껏 누리면서 자라났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 [소래교회]에서 성서번역 및 보급의 대부 서상륜, 그의 동생 최초의 목사 서경조, 그리고 한양에서 자주 내려와 신앙을 지도하던 언더우드 목사의 보살핌 등의 신앙훈련을 받으며 그들이 설립한 해서제일학교에서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진보된 교육환경 안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필례는 어머니 안씨를 따라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습관을 생활화하여 그 신앙자세가 일생을 지배하였다. 그리고 아주 총명하여 한번 공부한 내용은 잊지 않았다. 언더우드 목사는 소래교회에서 교인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각자의 수준을 살펴서 12세 이상의 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는 하였다. 그런데 김필례는 아직 9세밖에 되지 않았는데 목사님과 엄마에게 세례를 받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엄마, 저도 목사님께 말씀드려 세례를 받게 해 주세요.”
“얘야, 아직은 이르다. 너는 아직 열두 살이 되지 않은 어린애야.”
“아녜요, 엄마. 저도 언니, 오빠들만큼 성경도 잘 읽고 찬송가도 잘 부르며 기도도 열심히 할 수 있어요. 목사님께 얘기해 주세요.”
엄마는 기특한 생각이 들어 한번은 언더우드 목사가 찾아왔을 때 김필례를 데리고 가서 그 일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언더우드 목사 역시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자매님, 세례라는 것은 똑똑하다고만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상태를 점검하고 [성경요리문답]을 익히고 목사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님, 저에게 그 요리문답서를 가르쳐 주세요. 저도 공부하고 나서 목사님께 대답할께요,”
“허허, 그래? 너같이 어린 아이가 할 수 있겠니? 내가 이 책을 줄테니 한 주일동안 공부하고 다음 주일 오후에 세례문답을 해 보자.”
그런데 일주일 후 언더우드의 세례문답에 김필례는 어느 성인보다 더 뛰어나게 대답을 잘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 목사는 그의 성의와 열성을 인정하고 아홉 살짜리 어린 아이에게 세례를 시행하였다. 김필례는 그 성례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예수님이 요단강 가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받으시는 모습이 떠올랐어요. ”
이와 같이 어려서부터 성서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김필례였다.
글/박종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