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이 물음은 이스라엘 종교사(宗敎史) 연구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제는 우리 기독교신자들의 하나님 이해를 바르게 정립하는 데 있어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여기서 신에 대한 신앙고백을, 특히 종교의전적인 문형을 사용하되 신학적으로 매우 정련(精鍊)된 신앙고백 문형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의 본문은 아브라함이 소돔 왕과 살렘(옛 예루살렘=가나안의 ‘여부스’ 땅)의 제사장(‘엘’을 섬기는 이방인 司祭)인 ‘멜기세덱’과 만난 사건, 즉 ‘신학적 해석이 꼭 필요한 한 사건’에 대한 매우 심도 있는 해석학적 보도로 구성되어 있음이 확실합니다.
창세기 본문 중에서 주석하기가 가장 난해한 장(章)으로 널리 알려진 이 창 14장 전체의 이야기는, 크게 나누어보면, 약 세 개 정도의 독립된 이야기가 편집자의 의도에 의하여 잘 조직된 하나의 큰 편집물로 구성되어 있음을 봅니다. 즉 ①아브라함이 외국 이주민으로서 거주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남방 헤브론의 마므레 땅에서 보면, 팔레스타인 동북지역에 운집해 있는 제국들(4+5개 帝國) 사이의 정치적 긴장관계가 전쟁으로 비화되어 침략과 약탈의 소요가 크게 소용돌이 쳤었던 한 전쟁에 관한 보도(1-11절)와 ②그 전쟁의 여파가 ‘소돔’ 땅에 살고 있는 ‘롯’에게까지 미쳐서 롯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자, 아브라함이 나서서 자신의 집에서 길러온 종[私兵] 318명(Jewish Gematria [of Eliezer]? or a sizable army in the El-Amarna tablets?)을 데리고 밤을 틈타 탈취자들을 추격하여 가서 조카 롯과 빼앗긴 그 모든 것을 되찾아오는 아브라함의 전쟁영웅(warrior)적인 모습(아브라함 설화 전체의 분위기와는 전혀 조화되지 않는 아브라함의 전혀 색다른 전사[戰士] 이미지)에 관한 보도(12-16절) 그리고 ③조카 롯을 구출한 아브라함이 개선(凱旋)하여 돌아오는 길에 ⓐ소돔 왕과 ⓑ살렘 제사장(이방인 제사장) ‘멜기세덱’의 영접을 받고 그들과 나눈 이야기(17-24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본문은 세 번째③ 본문(17-24절)입니다. 즉 ‘믿음의 선조’요 전쟁용사인 아브라함이 자신의 개선(凱旋)을 영접하는 두 지도자, 즉 ⓐ소돔 왕(정치 지도자)과 ⓑ살렘 제사장(종교 지도자)을 만난 사건에 관한 보도가 갖고 있는 그 ‘신학적 의미’를 한번 다루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갖는 관심은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1)는 이방인(가나안 ‘여부스’족의 땅) 제사장의 제의(祭儀) 의전적인(‘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오는) 영접에 대해서는 그 얻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十一條]을 드리고 또 그 이방인 제사장이 자기가 섬기는 신(=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엘’)을 찬양한 그 ‘찬양’을 아브라함은 십일조 헌금의 형식으로 답례한 반면에, 세속 제왕의 영접에 대해서는 아브라함이 그 얻은 모든 것을 한 톨도 가지지 않고 다 내어 놓으면서 왕의 사은(謝恩)은 실오라기 하나도 또 신발 끈 하나도 손대지 않겠다고 선을 그으며 사양하였다는 증언이 갖는 그 의미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더 중요한 하나(2)는 이방인의 제사장(가나안 여부스의 ‘엘’ 제사장)이 자기가 섬기는 신, 즉 ‘천지를 지으신 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엘 엘룐 코네 솨마임 봐아렛츠’)인 그 신(神), 즉 히브리 말로 ‘엘 엘룐’이라고 부르는 그 신을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이 전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그 신(엘) 옆에 나란히 ‘야훼’를 병렬시킴으로서 ‘야훼’와 ‘엘’을 동격화 시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이방신’을 함께 섬기는 ‘다신론자’이거나 야훼 신을 모독하는 불경을 저지른 자이거나 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일까요?
그러나 창 14장 기자의 생각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창 14장의 기록은 아브라함의 야훼 신앙이 매우 당당함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cf. 창 14:23-24). 뿐만 아니라 이 창 14장과 곧바로 연결되는 창 15장의 소위 아브라함 계약기사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야훼 하나님께서 ‘의’(‘義’)로 여기셨다”(창 15:6)고 선포함으로서 아브라함은 아, 저 위대한 작호 ‘믿음의 선조’(The Father of Faith, C. Westermann, Genesis 12-36, Minneapolis, Augsburg Pub. House, 1985[독어 판은 1981], p. 222; cf. B. Vawter, On Genesis, New York: Doubleday & Co., 1977, Pp. 207-208 "the quintessential example and model of the man[sic] of faith"; G.J. Wenham, Genesis 1-15, Waco: Word Books, 1987, P. 329)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게 되었음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증언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컨대, 신학적 사고(思考)를 진솔하고도 확실하게 하는 한국의 어떤 대표적 개신교 목사님이 만일 애국가를 부를 때 “하느님이 보우하사 …”라고 하는 가사 속에 나타난 조상전래의 그 통속적 ‘하느님’ 신앙을 전혀 거부감 없이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 ‘하느님’을 “하나님이 보우하사 …”라고 신학적 재해석을 하며 애국가를 불렀다라고 할 때, 그리고 한국의 가톨릭교회가 개신교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하느님’이라고 표기하고 또 그렇게 호칭할 때, 아마도 이 상황은 아브라함이 당시 셈 족 일반이 통상적으로 ‘신’을 통칭하여 불렀던 그 ‘신’ ‘엘’과 이스라엘의 ‘신’ ‘엘로힘(출 3:6)과 ’출애굽 구원의 ‘신’ ‘야훼’(출 6:3)를 동일한 신으로서 고백한 그 상황과 매우 동의 평행된다고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셈 족 유랑민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중동지역을 유랑하면서 그의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만나고 또 “불렀었던” 그 ‘신’(“예배하였었던”=“qr’하였었던” 그 신 cf. 창 4:26; 창 14:22[맹세]; 창 33:20[“엘-엘로헤-이스라엘”=“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이 어디까지나 셈 족의 사람들에게는 ‘엘’이었다는 사실(!!)과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비인 ‘야곱’이 그의 고통스러운 긴 순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주신 신 ‘엘’의 은총에 감사하여 제단을 쌓고는 “엘[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엘로힘[하나님]이시다”(“엘-엘로헤-이스라엘”) 즉 “하느님은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하였다는 것(창 33:20)은 바로 이러한 신앙현실을 웅변적으로 반영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우 놀라운 사실은, 먼 후일 이스라엘 12지파 공동체가 마침내 하나의 어엿한 ‘나라’로 설립될 때에도! 그 국호[國號]를 ’이스라-야[후]‘라고 하지 않고! 감히 ’이스라-엘‘! 이라고 하였다는 것은 놀라움 중의 놀라움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두 행위(①소돔 왕의 사은은 단호히 사절하고 멜기세덱의 제의적 축복은 기꺼이 받아들인 행위와 ②가나안의 ‘엘’과 이스라엘의 ‘야훼’를 동일 신이라고 고백한 행위)는, 그가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창 15:6[E]; cf. 창 12:1- 3[J])이라는 전제에서 보면, 우리의 신(神) 신앙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매우 계몽적이고 선도적인 그리고 혁명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분명, 우리는 여기서부터 ‘구약성서-신약성서’가 일관되게! 증언하는 그 ‘신’의 ‘유일하고도 보편적인’(!!) 본질에 비로소 바르게 근접하기 시작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큰 놀라움입니다. 이 내용을 풀이한다면 대강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첫째(1)로는 ‘정교관계’(政敎關係)에서의 사제(司祭)의 권위 문제에 관한 가르침이 이 본문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구약문헌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들 중 하나로 널리 알려진 출 15:18의 말씀, “야훼께서 영원무궁토록 [왕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와 우리 본문 창 14:17-24 사이에는 비록 정확히 직접적인 평행전승이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런 개연성은 충분히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되며 따라서 이 둘 사이에는 동일한 신학적 맥이 이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더욱이 이 아브라함의 십일조 헌납행위가 후일 다윗시대의 십일조 조세법(十一租 租稅法)의 법적 권위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런 생각은 더욱 더 떨칠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분명,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여기서 소돔 왕의 권위는 평가절하하고, 비록 이방인 사제라 할지라도, 멜기세덱 제사장의 ‘사제적인’(the Priest-King) 권위는 ‘진정한 왕권’(theocratic kingship)의 권위로서 인정하였음(‘다윗’의 사제적 활동 참조. cf. 삼하 6:13-18; 24:24:17; 시 110:4)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정이념(神政理念)은 이렇게 하여 그 근원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로까지 소급하게 된 셈입니다.
‘멜기세덱’은 또한, 우리 본문에 의하면, 사제일뿐만 아니라 “살렘 왕”(창 14:18)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매우 후대의 해석 자료인 신약의 히브리서 7:2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로 해석되었습니다. “[멜기세덱이라는]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느]님[θεός]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2b-3).”라고 해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해석은 기독교의 신앙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쳐 왔었습니다. 즉 ‘멜기’라는 히브리어는 ‘나의 왕’을 뜻하고 ‘세덱’이라는 히브리어는 ‘의(義)’를 뜻한다는 통상적 이해와 그리고 또 그를 ‘살렘 왕’이라고 할 때의 그 ‘살렘’(샬롬)이라는 히브리어의 의미는 또한 ‘평화’(平和)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통상적 이해에 근거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진정한 제사장 ‘멜기세덱’은 ‘의’와 ‘평화’의 왕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멜기세덱’이라는 말의 좀 더 근원적인 원시-기원을 찾아가보면 비록 그것이 ‘나의 왕은 찌드크(zidk는 남부 아라비아와 페니키아의 신의 이름임)이시다’를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창 14장 기자의 이러한 해석학적 적용은 오히려 후대 신약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과 더 잘 조화된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창 14장에서 ‘멜기세덱’을 ‘왕이요 동시에 대제사장’(priest-king)으로 묘사한 그 전통의 원형(prototype)은 가나안의 그것(priest-king)에서 유추한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①메시아적 다윗 전승에 의거하였을 가능성(cf. 시 110:1-4; cf. H-J Kraus, Psalms 60-150, Minneapolis: Augsburg, 1989, Pp. 350-351)과 ② 신약의 히브리서 7:3이 고대 ‘텔-아마르나’(Tel-Amarna, 기원전 14C) 문서에 나타난 바, 여러 번 반복된 조문과 오히려 더 평행을 이루었을 것으로 볼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등에서 볼 때, 여기의 ‘멜기세덱’은 다윗 전통에서 계승한 바, 저 ‘메시아적-이상적 신정이념’(Messianic Theocracy)의 모형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즉 ‘왕’은 야훼 신의 인준(God's promise and sanction, 삼하 7장 참조!)에 의해서만 비로소 왕이 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 전통은 출 15:18(cf. 삼하 7:16,26,29; 시 110:4)의 전통을 잇게 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그러므로 지상(地上) 왕은 왕이기 보다는 야훼의 ‘기름부음 받은 종, 메시아’일 뿐이며 ‘신의 양자(養子)’로써, 여기에 맞서는 이방의 왕들(세상의 군왕과 관원들, cf. 시 2:1)을 모두 철장으로 깨뜨릴 분이시라고 하겠습니다(시 2편). 따라서 세속 ‘왕’은 신의 ‘사제’의 권위 아래에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소돔 왕과 멜기세덱 제사장에 대한 아브라함의 구별적인 이 태도는 이러한 전통의 ‘모범’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념은 사실 현대의 기독교 신앙인에게 있어서도 내면화되어야 할 신앙이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둘째로(2), 아브라함의 이 사건이 우리 신앙 정립에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한 점은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창 12:1; cf. 창 15:6)이 ‘이방인 사제 멜기세덱’의 신 ‘엘’(하느님, 셈계 세계에서는 일반화된 ‘神’의 통칭)을, 이 경우엔 가나안의 셈계 토속 민들의 신앙의 대상인 ‘엘’을, 이른 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애국가에 나타나는 ‘하느님’과 같은 분, 그 분을 자신이 믿고 있는 ‘야훼’(구약과 신약이 일관되게 ‘유일하신 신’으로서 믿는 神)와 동일한 신이시라고 감히! 고백하였다는 사실(창 14: 19,20,22)입니다. 비록 우리 한국인들은 이 구절들에 나타나는 ‘지극히 높으신 신’(히브리어 ‘엘 엘룐’)이라는 말을 한국어 번역 성서가 ‘엘’(하느님)과 ‘엘로힘’(하나님) 사이를 구별 않고 모두 ‘하나님’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이 고백의 신학적 의미가 전혀 인지되지 않았다고는 하더라도, 이 본문들의 히브리어 원문이 말하려는 의미는, 그러나, 그렇게 슬쩍 넘어 지나가기에는 신학적으로 너무나도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이른 바 이스라엘 예언역사의 초기(특히 기원전 8세기) 히브리 예언자적 정신(헤브라이즘)의 본질적이고도 탈 민족주의적이며 탈종교적인, 이른 바, 범 세계주의적인 혁명적 야훼 신앙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야훼’는 ‘엘’이시며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하느님’(출 3:6; 6:3)이시라는 것입니다. ‘야훼’(유대교)가 따로 있고 ‘알라’(이슬람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은 ‘천지를 지으신 엘(하느님)’ 그 분만이실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 바로 그 분(O, He!),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그 분께서 모세를 그의 종으로 부르셔서 인류가 살 길(신 32:47)이 ‘토라’(‘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가르치신 것이고 또 아들 예수도 ’보내셔서‘(요 6:38,39; 8:26,29) 인류가 구원 받는 길(요 14:6)을 몸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 간의 전쟁(이스라엘 아랍 간의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 간의 경쟁이나 다툼까지도 또한 그것은 ’한 분 하느님‘에 대한 반역이요 모독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 신앙을 바로 정립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실로, 구약성서가 ‘바알’은 영원히 격파할 원수 ‘아말렉’(출 17:14-16, cf. 왕상 18:38-40)이라고는 끝끝내 주장하지만 그러나(!) ‘엘’(‘하느님’)과 ‘엘로힘’(‘하나님’)은 영원한 ‘동의평행 어’(同義平行 語; synonymous parallel)로 끝내 견지해 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신’은 오직 ‘한 분’이시며 우주는 이 ‘한 분’의 질서 안에 있으므로 그러므로 구약성서 안에 이 ‘한 분’을 수식하는 말들(predicates)은 많으나(cf. 엘 엘룐, 엘 샤따이, 엘 올람, 엘 로이, 앨 벧엘, 엘 야훼[?엘 야휘?] 등등) 그러나 ‘엘’(하느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고 ‘엘로힘’(하나님)도 ‘야훼’도 그 ‘엘’(하느님)이실 뿐인 것입니다.(201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