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박사 |
누차 설명 했던 바대로 예수님의 비유는 자연스럽고 그 뜻은 한가지다. 루가 18,2-5도 그런 원칙이 잘 통하는 비유이다. 이스라엘은 예로부터 법치국가였다. 유대인이 그만큼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주변 문명권에서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나일 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과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예루살렘 정도 되는 큰 도시에서는 대제관과 70명으로 구성된 정식 의회(산헤드린)가 있어 절차에 따른 재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지방 소도시나 시골 마을은 사정이 달랐다. 거기서는 대체로 회당을 지키는 율사가 재판관 역할까지 도맡아서 했다. 그러니 비유에 등장하는 여인이 절차를 어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막무가내로 재판관을 졸라댄 여인은 과부였다고 한다. 구약 시대로부터 하느님은 눌린 자의 인권을 소중히 여겼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을 야훼 하느님이 구해주신 것 하며, 불의에 맞서 우렁찬 목소리를 냈던 예언자들이 그렇다. 그 중에서도 힘이 없어 늘 멸시만 당하는 과부와 고아는 특별히 인권을 찾아 주어야 할 대상이었다. 비유에 등장하는 과부도 불의한 경우를 당해 몹시 애가 탔던 모양이다(3절).
비유를 읽고 나서 당시 상황을 자연스럽게 반영한다는 느낌을 받을지 모르나, 이것이 사실 그대로의 세상사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분은 아마 없을 것이다. 비유의 주인공이 실은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약자중의 약자인 과부를 업신여기고 그녀의 하소연에 귀를 틀어막은 인간 재판관도 지극정성으로 매달리면 마음을 열거늘, 하물며 하늘 재판관인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을 흘려들으시겠느냐?’ 는 뜻이다. 그렇듯 작은 예를 들어 큰 이치를 깨닫게 만드는 방법을 두고 대비對比논법(a minori ad majus)이라 부른다.
알기 쉬운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에게 성큼 다가설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친자식처럼 아끼시기에 도통 우리에게서 눈을 떼시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이 자식사랑에 눈이 멀어 올바른 판결을 유보하시는 분은 결코 아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올바른 판결을 내릴 줄 안다면, 하물며 하느님은 얼마나 올바르시겠는가(6-8절)! 대비논법은 그렇게도 적용 된다.
주변에 보면 허황된 기도를 하도록 부추기는 이가 있다.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다, 사업에 성공하려면 십일조를 지금보다 두 배로 바쳐라, 재판관에게 매달린 과부를 보아라. 어쩐지 비유를 제대로 안 읽었다는 느낌이 온다.
글/박태식 박사(서강대, 가톨릭대, 성공회대 신학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