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 총무 김영주) 화해통일위원회가 주최하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고 강영섭 위원장 추모예배가 1일 오후 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열렸다. 나핵집 목사(NCCK 화해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열림교회)의 인도로 진행된 이날 추모예배에서는 박경서 박사(전 WCC아시아국장,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고 강영섭 목사의 만남들을 회고하며 추모사를 전했다.
▲전 WCC아시아국장이 1일 오후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고 강영섭 위원장 추모예배에서 추모사를 전하고 있다. ⓒ베리타스 |
박 박사는 WCC 아시아 스텝의 일원으로서 북한의 교회에 정책에 관여했음을 밝히며 1988년 6월 10일 고 강영섭 위원장과 첫 만남을 가졌다며 고인을 회고했다. 그는 강 위원장의 첫 인상에 대해 "강 목사님이 위원장으로써 권력자임을 느끼고 돌아왔다"고 했으며 "정부 내에서, 그리고 교회를 이끌어가는 명실상부한 실력자임을 알게되었다"고 했다.
강 위원장이 북한 교회 대표단을 인솔해 1993년 호주 칸베라의 제7차 WCC총회, 1997년 제8차 하라레 총회, 2005년 브라질 포트 알레그레 9차 총회에 참석했던 것을 강조한 그는 강 위원장이"남북한 평화통일예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강 위원장의 남북 화해를 위한 공헌과 관련해 "전체주의 사회에서 더군다나 공산당원들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북한 사회의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북한 교회의 성장에 기여하신 분"이라며 "물론 김일성 주석과의 가까운 친척관계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를 훨씬 뛰어넘어 매끄럽게 다른 사람이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게 역할을 하시면서 힘없는 북한 교회를 오늘의 위치까지 끌어 올리신 분"이라고 평했다.
강 위원장의 성격에 대해선 "지저분한 군더더기가 없으신 분이었다"며 "하실 말씀만 필요할 때 하시고 약속한 일은 꼭 지키시는 분이었다. 그 분이 없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앞날이 초조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끝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신앙고백은 특히 강영섭 목사를 잃은 북녘의 형제자매들을 생각하면서 선교의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다"며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 언젠가는 오늘의 우리처럼 신앙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 고난 속에서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 북녘의 형제자매들의 지난 66년간의 고통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우리 모두 신앙 고백을 하자"고 권했다.
추모사에 이어 인사말을 전한 NCCK 김 총무는 "북녘의 굶주린 형제자매들에게 조의를 표하는 것은 아마도 신속한 식량 지원일 것"이라며 "조속한 시일 내 식량 지원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북에 대한 인도주의적 식량 지원을 약속했다. 특히 김 총무는 "지원을 하면서 이런 저런 조건을 내거는 것은 기독교 정신과는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무조건적 지원으로 꺼져가는 북녘 동포들의 생명을 살려내는 일이 시급함을 역설했다.
추모예배를 마무리하며 축도를 한 서광선 박사(이화여대 명예교수, 본지 논설주간)는 "남북한 분단의 아픔과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북한)교회를 지키고, 교인들을 위로하면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한 강영섭 목사님 영혼의 머리 위에와 그 뒤를 이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간절히 사모하는 여기 모인 모두의 머리 위에 하나님이 은총이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고 기도했다.
한편, 지난 21일 작고한 고 강영섭 위원장은 1931년 10월 15일 강량욱 목사(김일성의 외종조)의 차남으로 태어나 레닌그라드대학교를 졸업한 뒤 1989년부터 조선그리스도연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북한 종교인협의회 부회장(1989년 5월)과 평양신학원 학장(1991년 3월)을 역임했다.
또 범민련 북측본부 부의장 겸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 겸 상임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1969년 12월 루마니아 대사를 역임하고 2006년 3월부터는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