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
함무라비 법전의 전통이 형성된 이래(以來)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계층사회에는 ‘몸종’(쉬프카또는 아마)의 평등관습법이라는 것이 전래(傳來)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의하면, ‘몸종’이라고 할지라도, 그 여주인의 허락 아래, 그리고 대(代)를 잇는다는 목적으로라면 여주인 남편의 ‘대리모’로 들어갈 수 있었고, 그 경우, 이 ‘여종’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그녀를 아내로 취한 그 남자(=아브라함)의 ‘아내’(!)의 자격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여종이 신분이 상승하였다 하여 자기 여주인을 깔보거나 멸시하는 것은 더더욱 이 관습법에서는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본문에 의하면, 신의 축복 약속을 받은 사라에게는 그토록 오래 동안(75세, 창 12:4; 16:3) 자식 잉태의 축복이 없었던 그 축복이 여종 하갈에게는 곧(아마 첫 동침과 더불어?) 이루어졌습니다(창 16:4a). 임신과 출산의 신비(神秘)는 신(神)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는 것은 당시에서는 매우 보편적인 확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뜻이 그러하였다는 믿음의 세계에서는 양자(사라-하갈)가 다 이에 순응하여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20세기 구약 주석(註釋, exgegetics)의 대 스승, 궁켈(H. Gunkel)은 “하갈은 이제 더 이상 사라의 완전한 지배 아래 있지 않았다.”라고 보았습니다(Genesis, trans. by M. E. Biddle, p. 185).
그러나 여종 하갈은 이런 큰 신의 은총이 이토록 신속히 자신에게 내려지자, 천민의 굴욕적인 지난날이 자극되어서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만, “자기의 여주인을 깔보았습니다.”(창 16:4b, 새 번역; 그러나 개역 개정은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라고 번역) 그러나 이러한 하갈의 여주인 멸시행위는, 그 무엇보다, 함무라비 시대부터 전래된 그 관습법의 세계에서조차도 금지된 불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을 향해 “내가 받는 이 고통은 당신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창 16:5a)라고 항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라는 자존심이 상처받는 느낌을 느꼈을 것이고 그것이 신의 저주로까지 인식되었던 것입니다(cf. J. Skinner).
아브라함은, 즉 믿음의 조상(창 15:6)인 아브라함은 이 경우 두 여인 사이의 ‘중재자’로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즉각, 아브라함은, 비록 그것이 신의 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창 16:9), 아내 사라에게 “여보, 당신의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소? 당신이 좋을 대로 그에게 하길 바라오.”(창 16:6)라고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사라는 즉각 여종 하갈을 학대하였습니다. 이것은 비록 남편 아브라함의 동의(同意)를 확인한 후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는 어긋나는 일이었고 당시의 관습법(함무라비 전통)에도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하갈은 사라로부터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존’의 질서는 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수르로 가는 길 옆 한 우물가에서 야훼의 사자(使者=天使)는 하갈의 길을 가로막고 “사라의 여종 하갈아, 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창 16:8)라고 물어 오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신학적 주석’이 필요한 중대 사건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하갈의 도피현실은 부당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야훼 하나님이 <약자의 편> <약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이 점에서 소위 민중 신학과 인권운동가들의 편견은 비판 받아야 합니다. 출 23:3,6의 말씀, “너희는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해서 치우쳐서 두둔해서는 안 된다.”(3절) “너희는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해서 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6절)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가르침은, 소위, 약자 보호법에 나오는 계율입니다. 그러므로 민중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편당 성’이론은 옳지 않은 이론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이 뜻은 그리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하갈을 향한 하나님(의 使者)의 입장(창 16:9)에서 우리는 그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갈의 대답, “나의 여주인 사라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창 16:8b)라는 대답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뜻)은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반응은 그 신학적 맥락에서 반드시 바르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 반응에 담긴 뜻은 성서의 아주 초기 기록에 이미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창 2:18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인간창조 이야기(창 1:26-28과 2:7,18)는 두 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것과 그 다른 하나는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co-existence, co-humanity, social being)라는 점입니다.
창2:18은 창 1:26f.보다 200-300년 앞 선 기록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인데, 더 고대의 기록인 창 2:18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 성(性, sex)의 구별이 없는(남성이기 보다는) 단일 인간으로 창조되었으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이 “좋지 않아서”(no good) 여자를 만드시어 남녀 둘이 함께 사는 인간(co-existence) 즉 ‘참 인간’(=하나님의 형상)을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즉 ‘함께 사는 인간’ ‘더불어 사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가장 유일한 교훈은 ‘이웃 사랑’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 얻는 길’ ‘영생하는 길’인 것입니다(누가 10:25-27).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한 말,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창 16:9)라는 말씀의 진정한 뜻은 바로 이러한 문맥에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함께 사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배자(=사라)와 피지배자(=하갈)의 갈등구조 속에서 함께 살 때 생기는 부조리의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의 이념세계에서 보듯이, 흑백논리의 투쟁을 통하여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거기서 생기는 문제는 각자의 믿음의 문제(합 2:4에 대한 올바른 이해 참조)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하갈에 대한 하나님의 나머지 말씀, 그 하나님의 배려(配慮)에서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는 임신한 몸이다.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여라. 네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님(=야훼)께서 들으셨기 때문이다.”(창 16:10-11)
이 말씀은 논의의 여지없이 하갈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사입니다. 넘치고 넘치는 축복사입니다. ‘이스마엘’(하갈이 낳은 아들의 이름)이라는 말의 뜻은 ‘엘(하느님)이 들으신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여자의 기도 소리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들으시며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선민(選民)도 비(非) 선민도 따로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며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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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자녀,
시온 딸 못지않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딸,
그에게 ‘종’이라는 신분을 준 자는
하나님도 아브라함도 사라도 아닌,
인간사회의 갈등이 빚어낸 産物,
그러므로 그는 匠人의 손에 들린 모퉁이 돌!
그리하여 아브라함 가문의 머릿돌 된 여인!
그 녀를 멸시하거나 오만하다 말라.
그 녀 때문에 아브라함 가문에
희망의 서광이 비치었기에!
하갈의 ‘자궁’은 솔로몬의 칼 앞에 흔들린
진짜 모성의 자궁처럼 흔들리었기에!(왕상 3:26)
선민 조상 아브라함의 집안에 비로소
그녀 때문에 아기 울음소리 들리기 시작하였기에!
오, 하늘이여, 하늘이여!
하갈은 믿음 약한 아브라함 품에 당신이
안겨주신 그 믿음의 조상의 ‘아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