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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식] 몰살당한 돼지떼

역사적 예수(31)

▲박태식 박사
마르 5,12-13: 더러운 영들이 예수께 간청하여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어 그 속에 들어가게 해 주소서.”하였다. 그해서 예수는 허락하셨다. 이에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니 돼지 떼는 호수를 향해 내리 달렸다. 이천 마리쯤 되었는데 모두 호수에 빠져 죽었다.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 ‘게라사’라는 도시가 있었다. 2천 년 전 그 도시에서 이스라엘 역사에 단 한번도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 예수님이 호수에 돼지 2천 마리를 한꺼번에 수장시킨 것이다.
 
마르 5,1-20은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은 ‘구마기적사화’이다. 기적사화는 보통 예수님과 기적의 수혜자가 만나는 ‘상황묘사’, 기적의 과정을 묘사하는 ‘기적묘사’,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증명하는 ‘기적실증’, 그리고 ‘주변 반응’으로 이루어진다. 마르 5,1-20은 구성 면에서 볼 때 전형적인 기적사화이다. 그런데 여느 기적사화와 비교할 때 그 스케일이 상당히 큰 편이다.
 
마귀들에게 이름을 물어보았더니 ‘레기온’이라고 대답한다. 레기온은 로마군의 사단 급 단위로 모두 6천 명이나 된다. 이스라엘에 주둔했던 일반적인 로마 군 규모가 고작 ‘백인대’(센투리오)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숫자의 귀신 떼이다. 다음으로, 물에 빠진 돼지 떼가 거의 2천 마리였다고 한다(마르 5,13). 당시에는 양이고 염소고 보통 백 마리 정도를 키우는 게 상례였던 점을 고려하면 그 역시 어마어마한 숫자다. 그러니까 귀신들은 돼지 한 마리에 세 마리씩 사이좋게 들어가 호수에 빠져 죽은 셈이다.
 
종종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학생이 있다. 루가복음에는 게라사가 아니라 ‘게르게사’ 지방에서 같은 기적이 있었다고 하며(8,26), 마태오복음에는 ‘가다라’였다고 하는데(8,28) 어찌된 사정입니까? 귀신을 내쫓은 것은 놀라운 기적이나 돼지 치는 이는 도대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귀신 떠난 사람에게는 축복의 날이었지만 돼지 치는 이에게는 저주의 하루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유대인들이 돼지고기를 절대 안 먹는 걸로 아는데 왜 돼지를 키웠습니까?
 
마르코복음의 게라사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동남쪽 55km쯤 떨어진 도시이다. 그런데 귀신이 옮겨간 돼지 2천 마리가 떼를 지어 55km의 광야를 뛰어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원래 돼지란 뛰는 짐승이 아니기에 그 먼 거리를 뛰어가면 아마 심장이 견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는 갈릴래아 호수와 가까운 ‘가다라’로 슬쩍 바꾸었고(8,28) 루가복음에는 ‘가다라’보다 호수에 더 가까운 ‘게르게사’로 되어 있다(8,26). 재미있는 현상이다.
 
율법에서는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겨 취식을 엄격하게 막았지만(레위 11,7) 실제로 유대인들은 돼지를 먹었다. 돼지 먹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천민 신분이었다. 돈 있는 자들이야 양이든 소든 골라가며 마음대로 먹을 수 있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 세끼 연명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예로부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살기 위해서는 돼지라도 먹어야 하는 법이다. 다만 돼지를 먹어 율법을 어겼다는 죄의식이 무척 컸을 텐데 그 죄의식을 예수님이 말끔히 씻어 주었다. ‘모든 음식은 다 깨끗하다.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마르 7,19-20).
 
돼지 치는 이의 비운에 대해서는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기적사화는 돼지 치는 이의 재수 없는 하루를 묘사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탁월한 기적능력을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다. 예수님은 6천 마리의 귀신 떼와 맞서 이길 수 있고 돼지 2천 마리가 상징하는 부정한 세력을 한꺼번에 몰살시킬 수 있는 막강한 능력의 소유자이다. 바로 하느님의 사람인 것이다. 기적을 베푼 후 예수님께서 마귀 떠난 죄인에게 “그대 집, 가족들한테 가서, 주님께서 그대에게 행하신 일, 그러니까 그대에게 자비를 베푸신 일을 모두 알리시오.”(19절)고 다짐한 데서 잘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능력을 가진 분이다. 그분만 믿으면 귀신이고 돼지고 다 물러가고 만다. 이 기적사화가 씌어질 때 원래 목적은 불신자들에게 예수님의 존재를 각인시키는데 있었다. 즉, 기적사화를 통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못박아두려는 의도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원래 의미보다는 기적이야기를 둘러싼 상황 해석에 더 관심을 쏟게 되었다.
 
이제 원래 의미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볼 때이다.       
    

글/박태식 박사(서강대, 가톨릭대, 성공회대 신학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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