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 창 2:7; 3:19; 시 90:1-3; 전 3:18-22; 4:1-3
▲한신대 김이곤 명예교수 |
거대한 문화도시인 ‘소돔’성은, 창 18-19장을 기록한 성서기자의 해석에 의하면, ‘의인’ 열 사람이(창조적 소수가) 없다는 그 이유 하나(창 18:32) 때문에 깡그리 잿더미가 되어 마침내는 소금 기둥이 굽어보는 염해(鹽海)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심판 사건에서부터 살아남게 되는 저 ‘롯’은 두 딸의 희생까지 감내하면서라도(창 19:8) 저 불쌍한 나그네를 극진히 접대하였었던 그의 그 의(義; 비교. 마 25:35,38,43-44) 때문에(성육[成肉]한 하늘사자, 히 3:2 참조) 소돔으로부터 구원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서 나와서, 곧장, 저 “아주 작은 성”(창 19:20) 저‘소알’을 피신처로 정하고 그리로 가서 거기 안착하게 되었다는 것이 소돔 성 멸망보도의 중심내용입니다. 멸망과 삶(‘멸망→삶’)이 극명하게 대조(對照)된 사건보도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보도의 결론 절(창 19:29)을 기초로 하여 ‘몸의 부활’이냐? ‘영혼불멸’이냐 라는 이슈를 문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구약성서가 이 문제(몸의 죽음과 구원)에 관해서 가장 확실하게 계몽해주는 곳인 다음 두 범주의 본문에 의해서 접근한 다음, 우리의 본문에로 돌아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 두 범주는 그 성격상 (1)창 2:7; 3:19; 시 90:1-3과 (2)전도서 3:19-22[특히 3:21]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의 경우는, 저 유명한 구약의 대표적이고도 고전적인 인간학에 관한 본문들인데, 그들 모두가 동일한 내용을 갖고 있는 동일 성격의 본문들로서, <인생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하여 본래 ‘흙’, 더 정확히는 ‘땅’(‘아다마’)의 ‘먼지’(‘앗팔’)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주 분명한 언어로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이외의 구약본문들 모두(!)도 이 내용과 결코 충돌하는 일이 없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이 점에 관한 좀 더 자세한 진술은 저의 <칼럼2> ‘구약성서의 인간이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칼럼 2>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계신다는 것을 전제하겠습니다. 즉 인간의 본질은 ‘흙’이며 그 흙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음으로서 비로소 인간은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었으며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2:7에 나오는 이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말은 개역 성서 및 개역 개정판 성서가 ‘생령’(生靈)이라고 번역은 하였으나 이 말에 대한 개역개정판의 각주(脚註)는 ‘생물’(生物; ‘네페쉬’)이라는 난 아래의 주(註)를 달아서 보충설명을 하였고, 그리고 창 1:21,24 본문에서도 이 히브리어 ‘네페쉬’라는 말을 모두! ‘생물’이라고만 번역하고 있는데, 이 말의 히브리어 원어(네페쉬’)의 그 원(原) 뜻은 그러므로 ‘생명체’라는 뜻이지, 결단코, 소크라테스의 교설이 가르치는 바와 그리고 초대교회의 최대 이단(異端)인 ‘영지주의’(gnosticism)가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런 그 ‘불멸의 영혼’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이 ‘생명체’(生命體)라는 말은. 구약에서는, 비록 가끔은 시편 시에서 흔히 시적(詩的)으로 가끔 ‘영혼’이라고 번역해오기는 하였으나, 그 말은 단지 ‘생명’ 또는 ‘생명체’라는 뜻이지 결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저 ‘불멸의 영혼’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기독교 초기의 이단인 ‘영지주의’가 바로 이러한 헬라사상에 대한 지식을 ‘신비한 영지’(靈智, gnosis)인양 강조하며 초대교회 교인들로 하여금 ‘몸의 부활’에 대한 복음신앙을 믿지 못하도록 위협해왔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변증(辨證)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였지만, 결코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습니다(행 17:32-34). 따라서 우리는 다음의 경우를 우선 집중적으로 검토하려 합니다.
(2)의 경우, 즉 위 (1)에서 언급한 히브리 신앙(구약 신앙)의 기본 핵심을 전제로 하고 구약 최 후대의 글들(지혜서들: 잠언, 욥기, 그리고 전도서)을 보면, 이와 관련된 결정적인 또 하나의 언급이 전도서 3:16-22; 4:1-3에 나타나 있음을 봅니다. 특히 전 3:18-21이 그 결정적인 자료입니다. 얼마나 반가운 자료인지!!
그러므로 우리에게 우리의 이슈(몸의 부활이냐? 영혼불멸이냐?)와 관련하여 특히 중요한 것은 역시 전도서 3:18-21을 어떻게 주석하고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제를 푸는 데 있어서 가장 난해한 문제는 ‘영’ ‘혼’ ‘영혼’라는 거의 입증 불가능에 가까운 언어들, 그 중에서도 특히 ‘영혼’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를 푸는 것이 우리에게는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서는, 전도서 3:18-21을 바르게 번역 해석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전도서 3:18-21 본문(개역 개정판)
18.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19.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20.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21.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22.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전도서 3:18-21 본문(새 번역)
18. 나는 또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이 짐승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사람을 시험하신다. 19. 사람에게 닥치는 운명이나 짐승에게 닥치는 운명이 같다. 같은 운명이 둘 다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가 죽듯이 다른 하나도 죽는다. 둘 다 숨을 쉬지 않고는 못 사니. 사람이라고 해서 짐승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모든 것이 헛되다. 20. 둘 다 같은 곳으로 간다. 모두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21.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아래 땅으로 내려간다고 하지만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22. 그리하여 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곧 그가 받은 몫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그에게 일어날 일들을 누가 데리고 다니며 보여 주겠는가?
위의 두 번역 본문을, 주의 깊게, 자세하게 반복해서 읽어보면, 그 내용은 <사람과 짐승이 둘 다 똑같이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을 봅니다.(①창 2:7과 ②창 1:21,24, 두 곳에서 말하는 ‘생령’이라는 히브리어는 모두 똑 같이 ‘네페쉬’인데, 그 동일한 말을 전자는 ‘생령’으로 번역하고 후자는 ‘생물’이라고 번역하였음.) 둘 다, 즉 사람이나 짐승이나 둘 다 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짐승도 ‘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분명, 인간은 영[혼]을 갖고 있으나 짐승은 영[혼]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우리 인간들의 잘못된 선입견을 날카롭게 그리고 매우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따라서 21절의 말씀도 당연히 <새 번역판>이 <개역 개정판>보다 그 의미를 더 정확이 하였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누가 알랴?>와 <누가 알겠는가?>라는 말도 단순한 의문형이 아니라 ‘강력한 부정’(a strong negation)이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G. A. Barton의 ICC 전도서 주석은 매우 분명하게 이 사실을 설명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새 번역이 말하듯,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아래 땅으로 내려간다고[들] 하지만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라는 말은 성서 밖, 항간에서, 다들, 그렇게들 잘못 믿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믿을 수 없는(결코 믿어서는 안 되는) 가설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말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위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사람이란 ①‘죽을 몸’과 ②‘죽지 않는 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몸은 죽어도 영[혼]은 불멸(不滅) 불사(不死)하여 영원히 산다고 하는 그런 그리스(헬라)의 이단교설에 속거나 미혹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관장하실 뿐이며 결코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신 32:39; 삼상 2:6)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이러한 문맥 안에서 볼 때, ‘소돔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 ’죽고‘ ‘롯’은 구원 받아 ‘살았다’는 우리 창세기 본문의 증언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이제는 분명하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즉 이 성서문맥은 ‘몸이 죽고 다시 사는 것’의 의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불멸의 영[혼]의 심판[?]과 구원’이라는 가설이 어떻게 하나의 이단교설에 불과한지가 이젠 매우 분명하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그분의(His/Her own) 세계’ 안에 그 무슨 ‘이승과 저승’이 나누어져 있고 또 그 무슨, 인간은 짐승과는 달리 피조물 중에서는 유일한 ‘영의 소유자’라든지 하는 것은 결코, 결단코 사실이 아니며 그러한 ‘영혼불멸’ 가설은 성서(구약과 신약)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이단교설로서, 우리의 복음, 즉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주이시고 그분만이 ‘생사화복’의 주인(신 32:39; 삼상 2:6)이시며 우리 인간은 결코 그분에게서부터 도피할 수 없는(시 139편) 존재로서 단지 ‘그분의 것’(시 100:3)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의 희망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오직 이 모든 만유를 지으신 전능자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그 선하신 뜻(‘긍휼’의 본질) 안에만 있다는 진리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들에 있는 성들을 멸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롯이 살던 그 성들을 재앙으로 뒤덮으실 때에, [그분께서] 롯을 건져 주신 것이다.” 창 19:29) *세 문장 모두의 주어는 ‘하나님’만이라는 사실을 주목해 보십시오.
소돔 성 멸망과 롯의 구원에 관한 우리 본문(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증언(복음 선포)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 안에만 있고 피조물인 우리 안에 있지는 않습니다. 옳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러한 복음을 다시금, 다시금 선포(re-telling)하는 ‘하나님 선교’(Missio Dei=Mission of God)의 전진기지, 즉 하나님 선교의 아방가르드이지 결코, 결단코 인간종교의 ‘마켓’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요한 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