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
그 꿈의 내용은 이러했다. 꿈속에서 그는 자신이 누운 그 척박한 길바닥 위에 돌연히 층계가 세워지고 땅 위에 놓인 그 층계의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아마도 그것은 쫓기는 자가 ‘하늘’을 향하여 가진 그의 마음의 ‘투사’(投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살의(殺意)를 품은 형의 분노가 지워지지 않는 영상(映像)으로 남아서 그를 여기까지 뒤쫓아 오고 있는 것으로 느껴질 그에게는, 즉, “아버지를 속인 죄로 저주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창 27:12b)에 둘러싸인 것으로 보이는 그에게는 이러한 꿈은 ‘전혀 예기치 못한 현상’이었다. 물론 그는 형의 분노로부터 해방 받을 수 있는 탈출구를 마음 속 깊이에서 ‘하늘’(‘솨마임’)로 보았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도 있겠다. 즉 땅으로부터 ‘하늘’로 이어지는 수직(垂直) 지향적(vertical) 마음, 이것이 번뇌에 찬 야곱이 우선적으로 추구하였던 바, 현실타개의 첫 방안이었던 것이라고도 추론해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의 이전 모습, 즉 그의 ‘본래적 모습’은 하나님의 구원사적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이것이 야곱의 본래의 모습이었다. 그는 ‘붉은 죽’으로 허기진 형의 약점을 이용하여 ‘장자의 권리’를 사들인 간교한 자(창 25:29-34)였다. 단지 그는 ‘형의 살의에 찬 분노에 쫓기는 자’(창 27:41-45)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하늘을 향한 수직지향적인 경건’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자였다. 그러므로 찬송가 338장(통일 찬송가 364장)의 가사(歌詞; S.F. Adams)는 이러한 야곱의 본 모습(창 28:12)을 표현한 것이기 보다는 먼 후일 그의 옛 모습이 깨어지고(창 32:22-32 [23-33]) 새롭게 거듭난 야곱(창 33:10; 35:1-15)을 가상한 그 야곱의 신앙의 자리에서 야곱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야곱의 꿈속에 나타난 이 <하늘과 땅을 잇는 층계>(‘사닥다리’라는 전통적 번역은 ‘쌀랄’șll[직구랏 ziggurat 모양의 층계]에 대한 오역[誤譯]이다)에 대한 꿈은, 우리 본문의 문맥이 분명하게 말하듯, 야곱의 심적(心的) 투사(投射)가 아니라 전적으로 야훼 하나님께서 먼저 위에서 주시는 바(창 28: 13a “붸힌내 야훼 닛찹 알라오”=“아, 보라! 야훼께서 그 꼭대기에 서셨다!”라는 수사학[rhetoric]을 주목하라.), 야훼의 자기계시(自己啓示)의 사건일 뿐 이었다!
이러한 꿈속의 영상은 그리하여 여기 우리 본문에서는 분명하고 확고하게 신학적인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우선은 야곱과 하나님과의 ‘수직적 만남’이 먼저(!) 이루어졌던 것이다. 즉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지는 ‘층계’가 놓이고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이 그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것을 야곱이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즉시! 야곱은 그 층계 꼭대기에 서서(출 2:4, 모세 누이의 기대에 찬 서있음과 일치된 언어임을 참조하라.) 말씀하시는 야훼 하나님과 대면(對面)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①야훼 하나님의 ‘나타나심’(顯現)과 ②야훼 하나님의 ‘말씀’(=神의 約束)이다.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말하자면 야곱이 야훼 하나님을 사모하고 또 그의 도움이 필요하여 그를 찾아간 사건(eros)이 아니라(즉 찬송가 338장 가사의 작사자 Adams가 상상한 것과는 달리) 야훼 하나님이! 찾아오신(agape) 사건이다. 찾아오셔서 선수(先手: initiative)를! 써서 자신의 구원사적 의지(意志)를 밝히신(자신의 뜻을 啓示하신) 사건이다. 바로 여기에 신학적 중요성이 있다. 야곱이 찾아간 것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신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을 사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에게 자기를 계시(啓示)하신 것이다. 성서의 하나님 신앙이 가진 본질은 이렇게 ‘에로스 모티프’(eros-motif)적인 것이 아니라 ‘아가페 모티프’(agape-motif)적인 것이다.
이러한 아가페적인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에 대한 ‘야곱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야훼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벧엘)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말하자면 야곱은 여기서 정말 놀라운 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즉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말씀하시는 곳, 그 곳이 어느 곳이든, 비록 돌들이 마구 뒹구는 황량한 광야길이라 할지라도, 바로 그 곳이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로 가는 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실로 위대한 발견이었다.
먼 후일 최초의 성전 건립자인 솔로몬 왕이 성전건축 일을 다 마친 후(왕상 7:51) 맨 처음 ‘법궤’(=언약궤=‘토라’를 넣어둔 궤,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왕상 8:9)를 먼저!! 성전 지성소에 안치한 후, 그리고 난 후, 성전 헌당 예배의 기도 순서 때, 그는 그 헌당기도의 서두에서 이렇게 기도드린 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참으로 이 땅[이런 공간에]에 거하시겠습니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는 부족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런 성전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나 내 하나님 야훼여, 주님의 종이 드리는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이 종이 오늘 주님 앞에서 부르짖으면서 드리는 이 기도를 들어주십시오.”(왕상 8:27-28)라고.
이러한 솔로몬의 기도는 또한 역시 먼 후일 사도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설교할 때 외쳤던 그 말씀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즉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 바가 있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殿)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행 17:24-25)
참으로 놀랍다. 도피자 야곱이 루스 땅 노상에서 잠자다가 꾼 꿈에서 깨달은 ‘깨달음’과 최초의 성전 건축자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마친 후 깨달은 그 ‘깨달음’ 그리고 부활의 증언자 사도 바울의 그 ‘깨달음’이 어찌 이리도 정확히 일치하는지! 그저 우리는 놀랄 뿐이다.
야훼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 건물 안에, 또는 사람이 만든 그 어떤 종교이념 안에 갇혀 있어서, 사람의 조종에 따라 이것저것 사람을 위하여 ‘복’을 실어 나르는 ‘복덕방망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가 아닌 분, 오히려 이와는 정 반대로! 모든 만유의 유일한 주권자요 생명을 주시기도 하고 빼앗아 가시기도 하시는 분이시다는 것, 그것을 야곱-솔로몬-바울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야곱이 꿈에서 깨어난 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 즉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곳 그곳이 곧 ‘하나님의 집’(‘벧엘’)이요 하늘로 가는 입구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었는데, 이 ‘깨달음’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반응한 야곱의 그 행위는 다름 아닌 <베고 자던 그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거기에 기름을 붓고 그 곳을 ‘벧엘’(하나님의 집, 즉 성전!)이라고 고쳐 부른 그 일>이었다는 점이다. 아, 무명의 땅 ‘루스’라는 이 황무지를 저 유명한 성지 ‘벧엘’로 바꾸는 일! 이 일이야 말로 오늘의 ‘교회주의’의 모순과 그 해악에 대하여 경고한 이 이상의 강력하고 놀라운 가르침이 어디 또 있을까!
물론 이것은 ‘교회무용론’이나 ‘무교회주의 주장’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다. 이 증언은 교회가 교회다워야 한다는 주장이고 성전이 성전다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로, 이것은 참 교회운동의 효시(嚆矢)라고 할만하다. 이 길이야 말로 성전이 성전 되는 길이고 교회가 교회 되는 길이다. 그러므로 아모스 예언자가 “너희는 벧엘 성소를 찾지 말고 길갈 성소로 들어가지 말고 브엘세바 성소로도 넘어가지 말라. 너희는 단지 야훼만을 찾아라. 그러면 산다!”(암 5:4-6)라는 말씀의 참 뜻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야곱은 바로 이 진리를 깨닫고 실천한 첫 번 째 사람이 된 것이라 하겠다.
‘루스’를 ‘벧엘’로 만드는 일!! 이것이 교회가 그리고 성전의 사제들이 입을 모아 선포하여야 할 하나님의 ‘말씀’(생명의 ‘로고스’)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으로 ‘모이기만’ 하는 것, 교회로 ‘모이기만 ’하는 것, 그리하여 대 성전이 되고 대 교회가 되는 것, 그것은 생명의 길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길이 아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 야훼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 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1b-32)라는 외침은 예언자 에스겔이 대언(代言)한 바, 오늘 교회가 참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이 시대를 향한 예언의 말씀이라고 하겠다.
‘루스’가 ‘벧엘’되게 하는 일, 길바닥의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는 일이 우리의 본 과제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28:20의 진정한 의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온 우주를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이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 놓은 우상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형상이 아니시기 때문이다.(구약 십계의 제2계에 나타난 ‘형상 거부’[veto on images] 사상은 구약 신이해[神理解]의 핵심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사 45:15; 그러나 새 번역본은 “구원자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진실로 야훼께서는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번역되었음.)이시다. 야훼 신의 얼굴(본체)을 ‘보고서’ 살자는 없다(출 33:20). 하나님은 자신을 말씀으로 ‘보이시는 분’(啓示하시는 분)이실 뿐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말씀으로 계시(啓示)하시는 곳이 곧 ‘벧엘’이요 ‘성전’이다. 야곱의 신학적 각성의 절정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의 위대함은 ‘돌들이 나뒹구는 황야의 길바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말씀이 계시되는 곳이면 그 곳이 어느 곳이든 그 곳이 곧 벧엘이요 그 곳이 곧 하늘로 가는 입구이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것이요, 동시에, 내가 서있는 이 자리가, 그곳이 비록 이름 없는 황량한 돌밭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면, (=하나님이 계시는[顯現 theophany 하시는] 곳이면) 그 곳이 곧 ‘하나님의 집’(‘벧엘’)과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 되도록 만드는 것(‘루스’를 ‘베엘’로 改名하는 사건), 그것이다.
그렇다!! ‘루스’를 ‘벧엘’로 바꾸는 그 일이 우리의 과제이다.
그러므로 이에 역행하여 한사코 어깃장을 놓으며 ‘벧엘’을 되레!! ‘루스’로 변질시키려는 것, 그것은 ‘성전’을 도적들의 소굴(굴혈)로 만드는 악행이라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고 비판, 힐책하신 것이다. ‘루스’를 ‘벧엘’로 만들자! 우리의 삶의 현장을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