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이 야훼께 대답하여 말하였다:
“이제야 나는 알았습니다. 주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을!
이제야 나는 알았습니다.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알고보니 바로 나였습니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만, …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한 자가 바로 나였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지금까지는 내가 귀로 듣기만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이제는 내가 눈으로 직접 주님을 뵙듯이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모든 주장을 모두 거두어 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아, 이제야 나는 알았도다.
즐겁게 사는 것,
그러나, 가능한 한 남에게 좋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먹고 마실 수 있고
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만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욥"(בויא Job)은 구약성서가 가장 대표적인 의인(義人)으로 내세운 세 인물, 노아, 다니엘, 욥 중의 한 분(겔 14:14)입니다. 그 중에서도 “욥”이라는 인물은, 다른 두분과는 달라서, 하나님과는 대적(對敵)하는 관계에 있으면서도!! 그의 그 대적행위가 오히려 “의(義)롭다”고 인정받은 “저항 경건”(욥 1:1-3)의 대표적 인물이었습니다.
“욥기”는 고대 중동세계에서 널리 회자되었던 논쟁문학들 중의 한 대표적 범례(範例)였을 것으로 널리 추측되어 온 책으로서, 성서가 낳은 경전문학(經典文學) 중에서는 최대의 걸작품에 속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특히 서론(1-2장)과 결론(42:7-17)이 제기한 논제와 본론(3:1-42:6)이 제기한 논제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差異)가 있는 특징이 있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책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의 통일된 논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렇게 쉽게 결론짓기가 어렵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 수록된 다양한 논쟁들과 그 복잡한 논쟁의 와중(渦中) 속에서도 한 가닥 분명하게 손에 잡히는 중심적이고 통일된 논제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유없는 경건(敬虔)도 있는가?” “이유없는 고난(苦難)도 있는가?”라는 논제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이중(二重) 논제는 괴테(Goethe)가 쓴 『파우스트』(Faust)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라는 악마(惡魔)가 흉내를 내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른 바, 천상(天上)의 사탄(Satan:"accuser" "adversary")이 천상회의에서 하나님에게 던졌던 그 논제요 동시에! 지상(地上)에서는 고통 속에 앉아 있는 욥이 그의 세 친구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사이에 두고 격렬하게 논쟁하였던 그 논제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유없는 경건(敬虔)도 있는가?” “이유없는 고난(苦難)도 있는가?” 즉 아무런 바라는 것이 없는 순수한 의미의 경건이라는 것도 있는가? 아무 저질른 일이 없는데도 사람이 고통을 당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는 참으로 풀기 어려운 신학적 난제라 아니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천상회의에 참석한 하나님의 아들들 중의 하나인 사탄은 하나님께서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고 칭찬하신 그 욥과 그의 경건을 가차없이 평가절하하고 의심에 찬 눈으로 비난하면서 “욥이 어찌 아무 까닭도 없이(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cf. 표준 새번역)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리이까?”라고 비꼽니다. 끝까지~ 비꼰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두 번이나 반복적으로 “내기”를 걸었다는 것은 그것을 잘 말해 준다 하겠습니다. 분명, 이 논제, 즉 <이 부조리한 세상에도 “정의(正義)”라는 것이 있는가? 이 악한 세상에도 “선(善)”이라는 것이 있는가? 그런 것은 실제로는 없지 않은가?> <아무 바라는 것이 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무런 저질른 악도 없고 또 아무런 뿌려논 죄도 없는데 재앙이라는 것이 그에게 들이닥칠 수도 있는가?> <콩 심은 데서는 콩이 나고 팥 심은 데서는 팥이 나게 되어 있지 않은가?>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철학적이고도 신학적인 논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 기이하게도! 욥기는 모든 예상을 뒤엎고 <이 부조리하고 악한 세상에도 “정의”라는 것이 있고 또 “선”이라는 것이, 희귀(稀貴)하지만, 있다!> <콩 심은 데서는 콩이 나고 팥 심은 데서는 팥이 나는 것은 자연의 정한 이치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생(生)을 그러한 일정한 논리에 대입하여 억지로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생이 지닌 다양성과 역동성을 무시하고 인간의 생을 너무 조잡하게 단순화하여 마침내는 인간을 비인간화 하거나 상품화하거나 운명의 노예로 만드는 매우 불행스러운 결과를 가져 온다>라고 대답하고 있었습니다.
욥기는 이러한 인생고(人生苦)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전하기 위하여 매우 특이한 방법으로, 즉 논쟁문학이라는 형식으로 대답하였습니다. 그 문학 형식은 매우 코믹하게도 하나님과 사탄이 <내기>를 건다는 형식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잔인하고 황탄무계(荒誕無稽)한 야훼 하나님의 “내기”는, 매우 운 나쁘게도 온전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는 의인 욥(1:1,5,8; 2:3)에게로 불똥이 튀어 차마 눈을 뜨고서는 볼 수 없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비정한 고난(苦難)이 순식간에 욥을 급습(急襲)하였던 것입니다(2:12-13). 그리하여,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었던(2:8) 욥은 이 불의(不意)의 재난 앞에서 고통하며 탄식합니다: “아,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토록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무슨 목적으로 빛을 주셨으며,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토록 마음이 아픈 자에게 무슨 연고로 생명을 주신 것입니까?!”(3:20) “하나님께 둘러 쌓여 길이 어두워 갈길이 아득한 자에게 어찌하여 하나님은 빛을 주신 것입니까?!”(3:23)라고 울부짖었던 것입니니다. 말하자면, 욥은 “이유없는 고난(苦難)도 있는 것이 아니냐?” 라고, 모든 인간고가 반드시 그 무슨 인과론(因果論)이라는 운명의 고리에 꽁꽁 얽매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라고 감히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즉 부조리하고 사악한 세계 속에 속수무책 내 던져진 이 인생고(人生苦)의 불가사의함을 원인과 결과의 엄격한 상관법칙에 억지로 얽매어 둘 수만은 없지 않으냐 라고 2
욥은 항변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난제에 대한 욥기의 대답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병 문안한다면서 욥을 찾아 온 이들 세 친구의 입장은 이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의 입장은 단호하고 엄격하였습니다. 돌비에 새긴 비문처럼 확고하고 냉엄한 언어로 “이유없는 고난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있겠느냐? 그런 것은 없다!”라는 입장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욥을 위로한다고는 하였지만, 실상은, 욥을 인과론적인 엄격한 언어로 단죄하고 급박하면서 욥의 아픈 상처를 마치 고소하게 생각하기라도 하듯이 더욱 더 그 아픈 곳을 짓눌렀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현실이 갖고 있는 출처불명의 난치병인 것 같습니다.
첫 번 째의 친구(1)인 엘리바스는 이렇게 그의 논지를 폅니다: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낭패를 당하는 일이 있더냐? 내가 본 대로는, 악을 밭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4:7-8)라고 말합니다. 말은 옳은 데 덕을 끼치는 말은 아닌 그런 성격의 말이었습니다. 정의는 정의인데 살리는 정의가 아니라 죽이는 정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에 부합하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 메시지 결론부에서 저는 “진정한 의미의 의(義)는 자기의 의를 포기할 수 있는 의(義)이다”라는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공의성을 설명하면서 말씀드린 바가 있었습니다만, 우리 인간 사회가 이유없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욥이 겪는 고난의 상황과 같은 상황에서의 최선은 결코 그의 고통의 원인을 어떤 종교적 철학적 원리에 따라 규명하고 해명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 가지면서 그의 고통을 이해해 주는 것이고 할수만 있다면 함께 아파 주는 것입니다. “상담학”이라는 학문 영역에서는 상담의 가장 기초되는 원리는 상담받으러 온 자의 문제를 상담자가 빨리 해명 분석하여 속히 해결해 주려고 덤벼들기 보다는 우선 그 상담하러 온 자의 고충을 무조건 그의 편이 되어서 들어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보다는 듣는 침묵이 훨씬 더 중요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언젠가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이스라엘 사회에 지혜문학이 꽃피기 시작하던 무렵, 후일 지혜의 왕으로 칭송을 받았었던 솔로몬 왕이 꿈에 만난 하나님에게 “지헤로운 마음”을 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있었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지혜로운 마음”(המכח בל)이라고 번역된 말이 사실은 원문의 축자 그대로는 “듣는 마음”(עמשׁ בל: a listening mind)이라고 되어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영어 번역에서는 여러 번역들이 an understanding mind라는 번역을 하고 있는데), 사실, 이스라엘이 깨달은 깨달음 중에서 이 지혜 개념을 전적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행위 또는 이해해 주는 행위에서 찾았었던 것은. 그것은 분명 그 어떤 깨달음보다 더 놀라운 깨달음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실제로, 솔로몬이 “지혜의 왕”이라고 전 중동지역에 파다하도록 소문이 퍼지도록 한 그 사건은, 다른 사건이 아니라 저 유명한 재판 사건, 즉 생후 하루 밖에 안된 어린 유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창녀가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일종의 친자소송을 지금부터 2900년 전인 그런 고대 사회에서도 아주 간단하게 그러나 논의의 여지 없이 확실한 방법으로 판결을 내린 바가 있는데, 그 때 행한 솔로몬의 그 명 판결은 전혀 전적으로 그 두 여인의 호소를 “듣는 행위”를 통하여 비로소 이룩되었다고 성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하늘같이 높은 대왕이지만 그러나 저 낮고 천한 창녀 따위들의 말에도, 즉 그 신생아의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를 만큼 그런 비천한 “몸파는 여인들”의 이야기에도 성실하게 귀를 기울였다는 거기에 이스라엘 지혜의 뿌리가 있었다는 그 3
런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친구 엘리바스의 얼굴에서는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친구의 아픔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는 자세나 understanding하는 자세란 눈꼽만큼도 없었습니다. 단지, 거기에는 상대방의 아픔에 대한 예리한 원인분석에만 몰두해 있는 비정한 변론가의 날카로운 나이프와 핀센트 만이 있었습니다. 즉 인과론이라는 이론 과학적 논리에 의거하여 욥의 고난를 죄의 결과라고만 분석하고 욥을 단지 정죄하려고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욥의 답변(1)은 이러 하였습니다: “아, 내가 겪은 고난을 모두 저울에 달아 볼 수 있고, 내가 당하는 고통을 모두 저울에 올려 놓을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그것은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겁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내 말이 다소 거칠었던 것은 단지 이 때문이다(6:2-3). 친구라는 것들이라고는 모두들 물이 흐르다가도 마르고 말랐다가도 흐르는 개울처럼 미덥지 못하고 단지 배신감만 느끼게 하는구나(6:15). 그렇다. 인생이 땅 위에서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고된 종살이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라고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곧 욥의 이 탄식은 항변의 기도로 옮겨 갔던 것입니다. “아,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님께서는 이토록 대단하게 여기시는 것입니까? 설령 제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 것 때문에 창조주 주님에게 무슨 해(害)라도 입히는 것이 있는 것입니까?(7:1,17,20)“ 라고 절규하였던 것입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분명,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세상원리의 틀에 맞추어 욥의 항변을 꺾어 보려 하였지만, 욥은 ”생“(生) 그 자체가 이미 고통을 동반하고 있는 것이므로 인생이란 그렇게 그 무슨 인과응보의 원리에 족쇄가 채워져 있는 그런 것은 결코 아니라는 입장, 즉 인생이란 ”생(生)의 다양한 역동성(力動性)“을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그 어떤 한가지 원리에 짜맞추어 예단(豫斷)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그대로 견지(堅持)하였던 것입니다.
두 번 째의 친구(2)인 빌닷은 이를 보고 참다 못해 욥의 말이 한 매듭 끝나기가 무섭게 황급히 이 논쟁에 뛰어 듭니다. 그리고는 엘리바스의 편에 서서 욥의 고통을 이해하려 들기 보다는 그가 갖고 있는 경험적 정통교리에 근거한 변론을 전개하는 데에만 열중하였던 것입니다: “너는 정말 하나님이 심판을 잘못하신다고 생각하느냐?(8:3) 조상들이 경험한 바를 통하여 배워 온 진리!를 한 번 잘 생각해 보아라.(8:8) 늪이 아닌 곳에서 어떻게 왕골이 자라겠으며 물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갈대가 크겠느냐?(8:11) 하나님은 온전한 사람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며, 악한 사람의 손을 잡아 주지는 않으시는 분이시다.(8:20)”라고 적확한 경험전통에 입각하여 욥을 견책(譴責)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욥의 대답(2)은 여전히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아니하며 다음과 같이 응답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도 잘 알거니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9:1) 내게 정말 흠이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는 일이지만, 다만,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고통스럽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래서 [선이든 악이든] 모든 것이 내게는 한가지로만 여겨진다. 그러므로, 나는 <흠이 없는 의인이나 흠이 많은 악인이나 간에 하나님은 다 한 가지로 심판하신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말하고는 곧 이어서 욥은 그의 얼굴을 하나님에게로 돌려 이렇게 항변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이시여, 나만을 이토록 죄인 취급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무슨 일로 나 같이 허무한 이런 병든 인생과 이토록 심하게 다투시는지 알려 주십시오.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이 몸, 주님께만 매달리는 이 몸은 학대하고 멸시하시면서도 악인들은 잘만되게 하시니 그것이 주님께 무슨 이익이라도 되신다는 말씀입니까?”라고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세 번 째 친구(3)인 소발은 이 모든 논쟁을 다 지켜 본 다음, 다른 두 친구와는 그 논 4
조를 달리하여 그의 논조를 매우 사변적(思辨的)인 논리로 바꾸어서 이 논쟁에 뛰어듭니다: “네가 하는 헛소리를 듣고서 [지성인이라면] 어느 누구인들 잠잠할 수 있겠느냐? 말이면 다 말인줄 아느냐? 너는 네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고 또 네가 흠이 없다고 우기지만, 지혜란 우리가 가진 지성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너는 어쨌거나] 네가 받는 벌이 네 죄보다는 가볍다는 것을 너는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인 네가 신(神:엘로아ㅎ)의 뜻을 어찌 다 알아낼 수 있겠느냐?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네가 어찌 다 측량할 수 있겠느냐?”(11:2,4,6,7) 라고 윽박지르고 나섰던 것입니다. 일종,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 사변(思辨)이라는 초강수(超强手)를 던져 욥을 제압(制壓)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답변(3)은 이러한 지성인들의 사변(思辨)이란 단지 “빈말”이요 “궤변”일 뿐임을 밝히면서 끝내 자기 자리를 지킵니다.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고는 마치 너희밖에 없는 것 같구나. 그러나, 나도 알만큼은 알고 있어서 적어도 너희만큼은 알고 있다.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너희가 불행한 내 처지를 어찌 안다고 그렇게 시종 위로는 없고 비웃기만 하는 것이냐?” 라고 반박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란 인간 이성이 추론해 낸 그 어떤 원리나 교조처럼 그렇게 제한적이고 단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욥의 확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당하는 자를 향하여 그의 고난을 이해하려 들지는 아니하고 <너의 죄가 네가 받는 고난보다는 가볍다>라는 식의 “물먹이는 자백강요 형식의 궤변으로 가볍게 처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욥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지혜란 상대방의 아픔을 냉혹한 이성으로 원인규명을 해 주는 그런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고 가능하다면 상대방의 처지보다 낮은 자리로 내려서는 행동입니다. 영어의 understand가 under와 stand의 복합어이듯이, 상대방의 아래에 서서 상대방의 아픔을 헤아리는 그것이 참 이해요 참 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에 속한 것이라고 보고 계속되는 친구의 사변적 논리에 저항을 하며 이렇게 응대하였던 것입니다: ”<지혜>란 본래 그분의 것이며 <슬기>도 전적으로 그분의 것이다. 그분이 헐어버리시면 세울 자가 없고 그분이 감금하시면 풀어 줄 자가 없으며 그분이 물길을 막으시면 땅이 곧 마르고 그분이 물길을 터 놓으시면 땅은 송두리째 물에 삼켜질 것이다. 능력과 지혜가 그분의 것이니, 속는 자와 속이는 자도 다 그분의 통치 아래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12:2-3,5, 13-16) [그분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분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다. 그분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이 사라져 간다.... 그분께서 노하시면,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한평생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만다. 우리의 연수가 팔십이요 강건하면 구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나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다(시 90:3-6,9-10)] “그러므로, 나는 전능하신 분께 나의 모든 것을 말씀드리고 싶고 그분 하나님(엘)에게 내 본 마음을 다 털어놓고 싶다”(13:3)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꼬엘: לאג)가 살아 계신다는 것을! 창조주가 살아 계신다는 것을! 나를 세상에 있게 하신 그분이 살아 있으며 생명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보존하시며 생명을 살리셔서 그 생명을 자기의 품으로 회수하시는 그분은 오직 하나님 만이시라는 것을! 나는 안다. 아, 나는 이제야 알았도다! 이 고난을 통하여 나는 이제야 생명 창조의 주이신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내가 비록 죽어 이 몸 다 썩은 다음이라 할지라도 나는 내 하나님(엘로아ㅎ) 그 5
분을 뵈올 것을 확신한다”(19:25-26)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빈말> 만으로 나를 괴롭히려 하느냐? 너희가 하는 말은 온통 <궤변> 뿐이로구나”(21:34)
이러한 논쟁은 욥기 전체를 통하여 지루할 정도로 무려 9회에 걸쳐서 계속됩니다. 여기에 제4의 인물인 “엘리후”의 긴 변론(32장-37장)까지 포함해서 계산한다면 이 신학적 철학적 변론은 열차례나 이어지는 장거리 변론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욥의 칠전팔기(七顚八起)의 저항은 집요하여 “이유없는 경건도 있는가/원인없는 고난도 있는가?”라는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의 그토록 장구한 변론은 마침내 무승부(無勝負)!!로 끝이 나고 맙니다. 욥은 마지막 순간까지 인생을 인과응보의 운명적 사슬에 얽매어 둘 수는 없다!라고 고집하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야훼 하나님께서 직접(!) 이 불가사의한 변론 속에 뛰어 들어 와서 이 변론의 판결자로 나서시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결정적으로 주목할만한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즉 전혀 예상을 뒤엎고 야훼 하나님이 비록 철저한 욥의 대적자(對敵者)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욥의 승리를 선포하고 그 대신, 저토록 높은 수준의 논리를 대변하였던 저 당대의 동양의 석학들인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에게는, “너희들은 욥처럼 올곧고 진실하게 말하지 아니하고 단지 어리석은 궤변(詭辯) 만을 늘어 놓았다”라고 판결하시었다는 점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지식이 힘이다”라고 하여 우리의 지식이 능히 하나님을 규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우리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혜를 규제하거나 능가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대담하게 말하기를 “하나님은 불가피하게 지식인의 편이고 지식인의 논리에 하나님도 마침내는 승복하고 말것이다”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허구이고 거짓입니다.
그렇다면, 욥기와 이에 상응하는 저항의 지혜인 전도서 기자는 이러한 논의에 대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고난받는 생의 문제, 그리고 그 부조리한 고난의 삶 속에서도 경건함(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우직하게 고집하며 산다는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욥은 여기서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삶의 원리에 따라 모든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라고 역설(力說)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랜 경험에 근거한 조상 전래의 그 전통적 지혜도 참 삶의 길은 아니라고 강변(强辯)합니다. 더욱이 불가지론적 사변론은 더더욱 참 삶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리하여, 시간(時間)의 허무성(虛無性)이 지닌 인간 생의 본질에 대한 깊은 신학적 성찰을 도모하였었던 전도서 기자와 거의 꼭같은 방식(전1-3장)으로, 욥도 또한 여기서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으로 “인간 삶의 이해에 대한 분명한 한 방향”을 확정(!!)하였던 것입니다: 즉 첫째(1)풀기 어려운 인간 생의 다양(多樣)한 역동성(力動性)은 인간의 이론으로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인간 생의 본질이라고 하는 사실, 즉 인간에 대한 모든 인간 이념적 변론은 모두가 다 단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 이른 바, 잘 알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지껄이는 궤변(詭辯)일 뿐이라는 사실(욥 40:1-5)과 둘째(2)창조주 야훼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 생의 역사를 이끄시기 위하여서라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신 분, 즉 무슨 일이든 못 하실 것이 없으신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사실, 즉 모든 종류의 이원론적 교조를 모두 다 폐기 시키고 있다는 사실(욥 42:1-6)을 귀로 듣고 눈으로 확인(욥 42:5)한 후 신앙고백을 하였다는 점에서 욥은 실로 인간 생이 지닌 모든 신비한 불가해의 본질에 대한 확고부동한 정답을 제시하였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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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인간은 단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확고한 신앙과 그 하나님은 그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러한 신앙의 기초 위에서 첫째 ①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생을, 그것이 어떠한 모양이든, 기쁘게 감사하면서 사는 것, 그리고 둘째 ②하나님은 선도 창조하고 악도 창조하며, 의도 창조하고 불의도 창조하시는 분, 빛도 어둠도, 생명도 죽음도, 승리도 실패도, 행복도 불행도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무엇이든 다 창조해 내시고 이용하실 수 있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 들이며 사는 것 즉 하나님께 항복하고 회개하며 그의 역설적(逆說的) 섭리를 기꺼이 수용하며 사는 것일 뿐이라고 욥기와 전도서는 공히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인생 관조가 다 끝난 후, 욥기와 전도서 기자는 모든 인간 지성들이 결론 내린 모든 사변들이 흙더미처럼 마냥 무너져 내리는 것을 확인한 듯, 소스라치게 무릎을 치며 합창하듯 이렇게 결론지어 외쳤던 것입니다: < 아, 이제야 나는 알았[습니]다!! 이제야 나는 깨달았습니다. 인생이란 처음부터, 창조되는 그 순간부터 이미 허무하고 유한하며 먼지에서부터 와서 먼지에로 돌아갈 뿐인 존재로 창조된 것임을 이제야 나는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생을 진솔하게 인정하고서, 뭘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떠들어대며 주님의 뜻이 설정해 두신 세상이치를 흐려 놓으려 하지 말고 그 주어진 일생을 사는 동안만은 단지 창조주를 기억하며 진솔하게 그의 뜻에 잇대어 사는 것 그것 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나는 비로소 알았습니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욥기와 전도서를 쓴 성서 기자는 인생에 관한 모든 사변을 다 살펴 본 후 다음과 같은 간결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냐 나는 알았습니다. 내게 주어진 일생을 최선을 다하여 즐겁게 산다는 것, 즐겁게 살되, 힘이 미치는 한 좋은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 아, 사람에게 이것 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 있으랴! 사람이 스스로 호흡할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다면 또 스스로 길을 걸을 수 있고 그리고 자기 일에 만족을 누리며 기쁘게 살 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 달리 무엇이랴!!>(전 3:12-13)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