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검소와 절약은 크리스쳔에게 필요한 덕목이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풍요해지면서 그런 단어 자체가 조금씩 거리감이 느껴지게 되었다. 그래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을 경험했거나 적어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중요성을 알지만 그렇지 않은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별로 실감을 못하는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자발적 불편 운동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검약운동이라고 생각이 들고 이 운동은 적극적으로 펼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발적 불편 운동을 펼쳐서 많은 사람이 동참하도록 하고 또 실제적으로 여러 영역에서 구체적인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로 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불편을 감수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 다른 사람에게 조금 더 힘들 수 있고, 반대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수하기 힘든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쉬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에너지 사용에 대해서도 전기기구 사용에 대해서는 불편을 감수하기 쉬운 사람이 자동차 사용을 포기하기는 힘들 수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불편을 감수하려고 하면 용기가 나지 않을 수 있지만 불편을 감수하기 쉬운 부분만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시작해서 조금씩 불편을 감수하는 영역을 늘여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둘째로 그렇게 하면 불편을 감수하는 일을 기꺼이 할 수도 있다. 불편을 감수하는 일이 꼭 힘든 일만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감수할 수 있고 하다보면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경지에 이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수동식 소형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다들 나를 보고 힘들지 않느냐고 하는데 나는 하나도 힘들지 않다. 물론 자동변속 자동차와 비교하면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감수하고 운전을 하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져서 불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수동을 즐기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수동 자동차를 권하고 있다. 사실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자동차가 수동식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물론 이런 예가 얼마나 많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불편을 감수하던 일이 즐거워질 수 있다면 이 운동은 정말 많이 확산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불편을 감수하는 것을 단계적으로 하면 좋을 것 같다. 우리 몸이 편한 것에 익숙해지는 것도 단계적이다. 조금씩 편한 것에 익숙해지다가 완전히 익숙해지면 처음 상태로 돌아가기가 어렵다. 그래서 어떤 이는 “편안의 덫(Comfort Trap)”이란 말을 하기도 한다. 한번 그 덫에 걸리면 여간해서 빠져 나오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불편을 감수하는 것도 단계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한 번에 엄청난 불편을 감수하라고 오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작은 불편을 감수하는 것으로 시작하면 그것보다 조금 더 불편한 것을 감수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러다보면 나중에 큰 불편도 감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대로 이 운동도 작게 시작해서 점점 커지도록 하면 좋겠다.
넷째로 신앙인들에게는 이 운동을 윤리적인 운동의 차원을 넘어서서 경건훈련을 위해서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경건훈련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우리의 몸의 불편을 감수하는 훈련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규칙적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식사를 하지 않고 기도에 전념하는 금식기도를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것들이 일반적으로 불편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절제의 훈련의 하나로서 불편을 감수하도록 한다면 분명히 영적인 유익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과거에 교회 안에 있었던 비성경적인 금욕주의로 변질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얼마든지 몸의 불편을 감수함으로 영혼의 유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기독교윤리실천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