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불편함 1
결혼을 준비할 때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29년 전쯤이다. 결혼을 결정하니 막상 결정은 했지만 절차라는 것이 있어서, 대학교 3학년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는 것이 몸에 밴 나로서는 그 절차에 따른 준비 이전에 결심이 필요했다. ‘부모님의 도움은 최소한으로 한다' 였다. 딸을 시집보낼 형편이 못 되는 상황도 그랬지만 난 그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자발적 불편함 2
약혼식 한복도 동네 한복집에서 내가 직접 가서 맞추어 입었다. 3만 원으로 기억된다. 대학원을 다니던 내가 당시 한 달에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이 약 14만 원 정도였다. 약혼식 머리와 화장은 감사하게도 교회 언니의 미장원에서 약간의 경비로 해결했다. 물론 예단은 없었고 이불과 그릇만 부모님께 신세를 졌다. 다음은 결혼식인데, 드레스와 예식화장은 막내 시누님께서 대여 드레스를 맞추어 주셨고 화장도 손수 해주셨다. 머리는 드레스 하는 데서 해결했다. 처음 만나는 시댁 가족들에게 공연한 방어벽을 만들어 자존심 지키기를 하지 않으면서 얻어진 도움이었다. 환상적인 신부가 되겠다는 것을 접으면 아주 간단하다.
자발적 불편함 3
신혼여행은 이랬다. 고급호텔에서 하루를 잘 자고, 집에 들러 여행복으로 갈아입고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예수원으로 향했다. 대천덕 신부님 내외분과 그곳에 계시던 시이모님 장권사님께 인사를 드리면서 예수원공동체에서 경건하게 보냈다. 이틀 후, 택시를 타고 황지, 태백을 지나 백암온천을 다녀왔다. 그 뒤로 우리 부부는 평생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다. 남들은 절대로 흉내 내지 못할 신나는 우리만의 이야기가 그때부터 생긴 것이다.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가끔 우연을 가장한 섭리라는 생각을 한다. 지금 생각해도 신혼여행을 그리 선택한 것은 참 잘한 일이라 생각된다.
자발적 불편함 4
신혼살림은 시댁 가족들의 배려로 시조카의 집을 전세 내어 시작했다. 시댁 어른들의 배려였다. 그러나, 홀로 계신 시어머니를 나 몰라라 할 정도로 내가 무정하지 않았나 보다. 6개월 만에 다른 집을 얻어 합가를 했다. 50년을 먼저 살아 내신 73세의 여성과 이제 막 인생이라는 것을 시작하는 25세의 여자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사랑 전쟁을 하며 큰 사랑, 작은 사랑, 빨강 사랑, 파랑 사랑, 그리고 묵힌 사랑, 가벼운 사랑들을 배우는 가장 경제적인 인생 실험의 장, 시집생활 시작된 것이다. 이것도 참 유익했다.
자발적 불편함 5
그리고 난, 배 속에 생명체가 불쑥불쑥 잘 생기더니 네 명의 아들을 낳았다. 지금은 다산을 슬쩍 부추기는 분위기라서 잘 이해되지 않는 대목일 수 있는데 그 시절은 정부에서 출산억제 정책을 시행하던 때였다. 셋째부터는 의료보험 혜택도 없었으니 주위의 눈은 어떠했겠나! 그래서 더 잘 키워야겠다는 의지가 컸나 보다…. 옷은 이리저리 물려 입혔다. 대체로 버리기 아까운 옷들을 받았으니 내가 절대로 사지 못할 언감생심의 물건들이었다. 그래서 더 좋은 옷을 입힐 수 있었다. 물론 신도. 또 저들끼리 물려주고. 되돌아보니 성년이 되기까지 저들의 입에서 명품을 들먹이거나 의식주 그 어떤 것으로도 내게 투정 부린 적을 난 기억하지 못한다. 난, 이 점이 정말 경제적이라 생각한다. 자발적 불편함 6, 7, 8 등등 내가 생각하고 살아온 단순하고 경제적이면서 가치 중심의 실천 사항들이 제법 근사해 보인다. 열매를 보므로. 이상은 세상에서 제일 불편한 일,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가면서 배운 인생의 해법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