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본지 편집고문) ⓒ베리타스 DB |
그런데 지난 12월 4일 공중파 방송 등이 총동원되어 중개된 대통령후보들의 TV토론에서 남북문제, 특히 안보와 평화의 문제가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 사이에서 날카로운 대립각을 이루었다. 문재인 후보는 과거 김대중. 노무현정부의 대북한 햇빛 정책이 남북간의 평화를 가져왔으나 현재의 한나라당 이명박 정부의 대결적 대북정책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사건을 불러와서 젊은 군인들이 생명을 잃고 연평도민들이 생명을 위협당하고 재산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러자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이 가져온 남북간의 평화는 대북한 지원 즉 “퍼주기”를 통해서 얻은 평화이며 그렇기 때문에 “거짓 평화”라고 주장하고 자기가 주장하는 평화란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함으로써 얻어지는 안보가 진정한 평화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어떤 것이 참된 평화고 어떤 것이 거짓된 평화인가 하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정부가 돈을 주고 얻은 평화는 거짓 평화이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상대방을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평화가 진정한 평화라고 말하는 박근혜후보의 말이 맞는 것인가? 돈을 주고 북한으로부터 평화를 사서 불안 없이 사는 것과 (미국에 막대한) 돈을 주고 강력한 무기를 도입하여 군사력으로 북한을 위협하여 안보를 통하여 불안하게 사는 것 중 어떤 것이 참 평화이고 더 바람직한 것인가?
첫째 평화학적 관점에서 보면 돈을 주고 북한으로부터 얻는 것은 평화(peace)이고, 돈을 주고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사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안보(security)이다. 박근혜에게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 북한에 퍼주는 것은 나쁜 것이고 안보를 얻기 위해서 미국에 더 많이 퍼주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논리다. 안보를 얻든지 평화를 얻든지 돈이 들어가고 손해를 보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평화를 위해서 북한에 퍼주는 것이 안보를 위해서 미국에 퍼주는 것보다 훨씬 더 싸게 든다. 평화를 위해서 북한에 퍼준 비용은 대북한 안보를 위해서 미국으로부터 사오는 무기구입비와 주한 미군 주둔비용에 비하면 새발에 피다. 따라서 북한에서 평화를 사는 비용보다 미국으로부터 안보를 사는 비용이 훨씬 많다. 따라서 경제적으로만 봐도 평화를 위해서 북한에 퍼주기 하는 것이 미국에 퍼주는 것보다 우리에게 훨씬 유리하다.
둘째 평화는 상호간 신뢰를 바탕으로 한 화해에서 가능한 삶의 형태이고 안보는 상호간 위협을 바탕으로 한 적대적 위협관계에서 주어지는 삶의 형태이다. 북한에 퍼주기를 하고 얻는 평화는 적대시하던 같은 민족에게 먹을 것을 줄 수도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상호 신뢰의 바탕을 마련할 수도 있다. 나아가서 화해를 통해서 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남북한이 서로 화해하고 통일을 이룰 때 한반도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가 올 수 있다.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의 궁극적 목표는 평화, 즉 평화로운 삶이다. 그러나 미국에 퍼주기를 하고 보다 강력한 무기들을 사들여서 상대방을 위협하는 이른바 안보는 북한의 굶주리는 어린이들을 도울 수도 없고 또 서로 신뢰를 쌓아서 화해의 길로 나아갈 수 없다. 더군다나 민족의 통일을 통해서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수도 없다. 따라서 박근혜가 말하는 안보는 비용이 더 들어갈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위협하는 적대시 정책이기 때문에 화해의 가능성도 통일의 희망도 가질 수 없고 우리의 헌법에도 위반되는 남북한의 영구분단을 획책하는 정책이다.
역사적으로 오늘날까지 현존하는 평화의 모델들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세 종류로 나누어 생각해 볼 때도 현금의 새누리당과 박근혜후보의 안보정책은 잘못된 정책이다.
첫째는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했던 평화이다. 그들은 도시국가들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고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에 철학자들은 참된 평화를 ‘마음의 평정’(ataraxia), 즉 不動心이라고 생각했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사에서 벗어나 고요한 자연에 들어가 평정심을 갖고 근심도 걱정도 없이 사는 것을 그리스인들은 참된 평화라고 생각했다.
둘째 로마인들이 생각했던 평화는 안보(securitas)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이웃 나라들을 점령하여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던 로마인들은 안보란 곧 점령지들에서 일어나는 독립운동들이나 봉기를 강력한 군사력으로 억제하는 것이 곧 평화였다. 로마 역사에서 잘 알려진 대로 이른바 강력한 힘으로 제국을 이루었던 나라들은 점령당한 민족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 국가의 과제였다. 이것을 위해서는 강력한 군대와 무기체계를 갖추고 계속적으로 적들을 위협(menace)하고 억제(deterrance)함으로써만 평화가 유지된다. 이것이 곧 안보이다. 그래서 로마역사가 타키투스(Cornelius Tacitus)는 “영국인들은 로마의 평화를 두려워했다.”고 적고 있다. 로마인들이 소위 안보(평화)를 위해서 영국인들을 위협하는 것을 그들은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인들의 평화를 공동묘지의 평화라고도 한다. 오늘날 북한은 사실상 미국의 평화 즉 안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이스라엘 사람들(유대인)은 평화를 샬롬(shalom)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예수가 생각한 평화는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어떤 마음의 평정심이나 로마인들이 생각한 무력의 억제에 의한 평화가 아니다. 그래서 예수는“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요한복음14:27).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른 평화는 곧 거짓된 평화(안보) 세력에 대항해서 투쟁하는 것을 말한다. “너희는 내가 땅 위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복음 10:34).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너희는 내가 지상에 (로마)의 평화, 즉 안보를 주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로마의 평화(Pax Romana)에 대해서 칼(도전하러) 왔다.”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러면 성서가 말하는 평화, 참 평화란 무엇인가? 참된 평화란 마음의 안정을 누리는 그리스의 평화도 아니고 상대방을 위협하여 침묵시키는 로마식의 평화도 아니다. 성서가 말하는 평화는 역동적 평화로서 한 국가나 사회에서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는데서 주어지는 평화를 말한다. 아무리 국가안보가 튼튼하다고 해도 사회에서 불법이 지배하고 약자들이 강자들에 의해서 착취당하는 상태가 되면 평화는 불가능하다. 오늘날 한국에서처럼 대기업들에 의해서 중소기업이 하청화되고, 골목시장소상인들의 삶의 권리가 위협당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마음대로 해고당하여 처참한 생활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은행 빚에 시달리는 사회, 정의가 실종된 사회에서는 아무리 국가안보를 튼튼히 한다고 해도 사회적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구약성서 시편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실 것입니다... (그 때)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본다.”(시편 85:8-11).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춘다는 것은 한 사회에서 정의가 실현될 때만 참된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사 32:17).
신약성서 로마서에서도 평화와 정의는 밀접한 관계에서 논의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경제성장을 통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정의가 이루어진 평화 가운데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로마서 14:17).
새누리당 박근혜가 말하는 평화는 군사력에 의한 국가안보 즉 로마식의 평화다. 그러나 참된 평화란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함으로써 모두가 화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말한다. 한반도에서 참된 평화는 강대국에 의지해서 군사적 보호를 받는 안보가 아니라, 분단된 민족이 서로 돕고 화해하여 통일함으로써 적대감을 버리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