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
지난 17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제61회기 제1차 정기실행위원회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공동선언문’(이하 선언문) 사태에 대한 대응 논의가 있었다. 당시 회의 중 한국정교회 암브로시오스 대주교는 이 선언문을 "쓰레기와 같은 문서"라고 일갈하며, "(세계교회가 보는 앞에서)이 짐을 빨리 내려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뼈있는 말을 던졌다.
하루만 더 지나면 선언문이 발표된 지 일주일째에 접어든다.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했더라면 NCCK측은 정기실행위원회가 아닌 긴급, 임시 실행위원회로 모였어야 옳았다. 그런데 듣자하니 그나마 열린 정기실행위원회에서 한 실행위원은 "선언문의 내용도 몰랐다. 다음에 논의하자"는 소리를 냈다. 선언문으로 인해 에큐메니칼 진영 전체가 흔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선 무사태평이 따로 없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선언문 대응의 가닥이라도 잡은 것이다. 당초 실행위원들은 NCCK 의장 명의의 성명을 내기로 했고, 대책위원회도 구성해 선언문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기로 했다. 옳은 결정이다. 하지만 이 또한 아쉬운 것은 ‘언제까지’라는 기한을 명시하지 않은 점이다. 만일 절차/행정 탓으로 사태수습이 차일피일 미뤄지다간 더 험한 꼴을 보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당초 NCCK 김영주 총무와 WCC 한국준비위원회 김삼환 상임위원장이 한기총 전,현직 대표들과 서명한 이 선언문은 이미 한기총 주도로 번역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한기총은 지난 14일 실행위원회에서 선언문을 번역해 WCC 본부측으로 보내겠다는 결의를 했으며, 이를 이행하고 있다. NCCK측이 보류나 폐기 처분하지 못한 채 선언문을 "쓰레기와 같은 문서"라 혹평한 데 그친 반면, 한기총은 그 ‘쓰레기 문서’를 번역해 WCC 본부로 보내는 수순을 착실히 밟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번역도 해석이라는 점에 있다. 근본주의적 신학 노선에 서 있는 한기총이 그런 해석의 틀로 번역에 임할 경우 모호한 문구는 가차 없이 이데올로기의 세례를 받아 기존 문구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문구로 탈바꿈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단적인 예로 선언문 제3항에는 ‘개종 전도 금지주의 반대’로 표기되어 있는데 ‘개종 전도’는 있는 그대로의 번역이 어렵다. 왜냐하면 표현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타종교를 향한 개종을 의미하는 것일텐데 타종교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탓이다.
그런데 이번 선언문 번역본에 WCC측이 사용해 왔던 ‘개종주의’(Proselytism)란 단어를 차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기총의 한 관계자는 귀뜸해 왔는데, 이렇게 될 경우 한기총의 의도가 무엇이든간에 WCC측으로서는 그동안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 여겨온 회원 및 협력 교회인 가톨릭과 정교회 신자들을 개종의 대상으로 보라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국제적 망신이다.
하여 NCCK 실행위원회는 정치적으로 손익계산을 따지다 대응 시기를 놓칠 게 아니라 일언지하에 선언문이 에큐메니칼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선언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건 양 혹은 ‘세’(勢)가 아닌 질 혹은 ‘정신’의 문제이기 때문에 양보나 타협이란 건 있을 수 없을 뿐더러 불가하다. ‘쓰레기와 같은’ 무거운 짐을 계속 지고 있을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