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는 나이 20에 평양 쾌재정에서 열린 관민공동회에서 그리고 서울 종로 만민공동회에서 민족을 깨워 일으키기 위해 연설함으로써 수많은 청중을 감동시켰다. 그의 연설을 듣고 수많은 청중이 하나로 되고 이 연설을 통해 안창호와 청중이 하나로 되었다. 젊은 나이에 안창호는 민족을 깨워 주체로 일으키고 민족을 하나로 만드는 민족의 교사로 나섰고 연설을 통해 수많은 민중과 하나 되는 체험을 하였다. 민족의 교사로서 민족과 하나 되는 체험을 함으로써 안창호는 민족 전체의 마음을 제 마음으로 삼고 민족을 깨워 하나로 만드는 교사의 심정으로 평생을 살았다.
민족 전체의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안창호는 지극히 겸허하고 지극 정성을 다해서 가르쳤다. 한신대 학장, 건국대 총장, 한국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지낸 정대위 박사가 평양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몇 친구와 식당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친구는 큰 정치가가 되어서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고 하였고 한 친구는 큰 기업가가 되어서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였다. 정대위 소년은 목사가 되어서 민족의 정신을 깨우겠다고 하였다. 마침 그 식당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안창호 선생이 다가와 정대위에게 큰 절을 하면서 “미래의 목사님, 부디 훌륭한 목사님이 되셔서 이 민족의 정신을 깨워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후에 정대위는 정치권으로부터 정치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지만 안창호에게 큰 절을 받았기 때문에 차마 정치권으로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처럼 안창호는 어린 소년에게도 큰 절을 하며 가르치고 일깨웠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할 때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이념과 지역과 당파가 갈려서 통합이 되지 않았다. 안창호는 미국에서 동포들을 조직하고 흥사단을 만들어 많은 재정의 뒷받침을 받을 수 있었고 많은 젊은이들을 독립운동에 참여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높은 직위를 사양하고 민족운동의 대동단결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였다.
안창호가 지방열이 강한 야심가라고 비난 하는 사람들까지 안창호는 아우르며 통합하려고 애썼다. 수적으로 2/3이상의 세력을 대표했던 안창호는 소수 반대파를 끌어안아 통합된 민족대표기구를 만들기 위해서 입에서 피를 토면서도 밤낮없이 그야말로 망식분주(忘食奔走)하였다. 이런 안창호의 모습을 지켜 본 공상주의자 김철수는 안창호에 대해서 깊이 감동하고 존경하였다. 안창호는 갈라지고 다투는 자녀들을 끌어안으려는 어머니처럼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심정과 자세로 일관했다. 그가 자신을 희생하고 버리면서까지 민족의 통합과 단결을 위해 헌신한 것도 민족 교사로서의 정신과 자세가 투철했음을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