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역사는 과거의 여러 문명과 제국들과 민족들의 흥망성쇠의 이야기이며 또한 인류가 살아온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그리하여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과거의 지식과 어떤 교훈을 얻으려고 한다. 그리고 지나간 역사 이야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과거사건들의 발생의 원인을 규명하는 길을 찾는다. 소위 실증주의 학파와 이념주의 학파가 그 원인을 규명하는 두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실증주의 학파는 과거 사건의 발생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이나 여건을 찾는다. 이것은 사건을 나타난대로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여러 조건이나 여건 중에서 가장 유력한 원인을 찾아낸다. 그러나 한 사건에는 여러가지 여건이나 조건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가는 자기 판단으로 가장 유력한 원인을 찾아내서 그 사건을 설명한다.
관념주의 학파는 사건의 배후에 어떤 사상이나 이념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숨은 사상이나 동기나 목적을 찾아서 그것을 사건의 원인으로 정한다. 이것은 역사가의 주관적 판단일 수도 있다. 이 두가지 역사 해석에는 다 주관적인 판단이 작용한다.
다른 한편으로 과거 역사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곧 역사의 현상(現像)을 연구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일찌기 구약의 전도자는 역사의 회귀를 간파하였다. 즉 한 세대가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와도 세상은 그대로이며 해는 졌다가 뜨기를 반복하며 바름은 이리불고 저리불다가 불던 곳으로 되돌아가니 해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하였다. 지구도 같은 궤도를 반복해서 돌며 그 시간도 24시간으로 반복되며, 또 우주 공간의 수 많은 위성들도 태양 주위를 같은 궤도를 돌고 돈다. 이렇게 지구나 천공에도 반복 현상이 있고 시간도 지구의 회전에 따라 측정되지만 그것도 24시간으로 제한되어 반복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사람이 사는 이 시공의 세계는 밀폐되어진 상태에서 그 안에서 반복과 회귀만이 일어난다.
문명에도 영고성쇠가 있으나 비슷한 유형의 것이여서 역시 회귀하는 것이다. 이 회귀론은 사람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간과 시간의 제한 또는 밀폐 상태에서 산다는 말이다. 이것은 일종의 숙명론과 회의주의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 이러한 현상은 끝도 없고 희망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자로서 만물의 시작을 주셨고 그리고 역사(시간과 공간의 산물)를 초월하시면서도 때로는 역사 안에서 역사에 개입도 하시면서 인류의 역사를 경륜하신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의 시제(時制)가 없는 영원한 현재자이므로 인간이 과거사는 영원히 고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지만 하나님은 그 과거도 자기의 자비와 사랑으로 속량 또는 용서하시고 고쳐 주신다. 사람은 과거사를 가지고 서로 원수가 되고 복수를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만드는 잘못된 사건들도 카이로스로 전환시키시기도 한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으로 이집트로 팔려갔으나 하나님은 그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큰 민족을 이뤄서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와서 한 나라를 만드셨다. 요셉의 형들의 죄도 속량되었다. 용서와 속량이 있는 곳에 역사의 희망이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 속량의 사랑을 전하여 인류사회의 희망을 전하며 또 그 희망을 증거해 보여 주어서 인류의 역사의 회의론이나 운명론 사상을 극복하게 해야 한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역사의 주(Lord) 이시다. 사람은 역사가 회귀나 반복의 현상으로 진행된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어떤 원인에서는 반드시 결과가 나온다는 인과율을 가지고 역사를 해석하지만 하나님은 이 역사의 현상과 법칙을 초월하셔서 역사를 자기의 경륜대로 이끄시는 역사의 주이시다. 사람은 아무리 선량하고 좋은 생각과 목적으로 일을 해도 반드시 부작용이 생기는데 이것을 필요악이라고 자인한다. 목수가 대패질을 하면 대패밥이 생기기 마련이다. 정당한 전쟁도 상대방을 죽이거나 파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사람이 하는 일에는 완전이 없지만 하나님의 역사 경륜에는 과오가 있을 수 없고 자기 뜻대로 역사를 경륜하신다. 예수를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십자가에 달아 죽였지만 그 십자가가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 되게 하셨다. 역사는 인간의 이야기인 동시에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구약성경에서 그것을 잘 볼 수 있다.
인간의 문명이 진보와 발전을 거듭해 오다가 오늘날 물질문명의 발달의 극치를 보이고 있고 행복을 추구하고 있지만 현대 문명의 이기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고 대량살생의 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진보와 발전을 거듭할수록 사회는 더 불안하고 인간공동체는 일치보다도 와해되어 간다. 인간이 역사를 바로 이끌어 갈 힘이 한계에 다달았다. 역사의 희망을 인간의 문명의 발전에 둘 수 없다. 오직 역사의 주 되신 하나님에게 만이 역사의 희망이 있다.
다음으로 앞에서 말한대로 인간의 역사는 끝 없는 회귀나 반복이어서 종결이 없다. 이러한 역사에서는 참된 의미를 찾기 어렵다. 유폐된 공간과 유한한 시간 안에 갇혀 인간은 사는 동안에는 거기서 탈출할 길도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끝날을 말씀하시고 그 끝날이 언제올지 모르지만 미리 준비하는 여러가지 삶의 길을 가르쳐 주셨다. 이것이 소위 종말론적 윤리다. 그리고 그 종말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그는 말씀하셨다. 지상 세계의 역사의 종말이 어떤 모양으로 끝날지는 수수께끼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믿거나 묵시 또는 환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그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날이지만 어떻게 심판하실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이 종말에 우리는 희망을 두고 살아간다. 교회는 그 종말을 준비하고 전하는 신도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신도들이 반드시 그 종말 시대의 윤리 생활을 해야 한다.
세계의 시작을 주신 창조주가 세계 역사의 종말을 정하실 것이고 마무리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와 함께 즉 그의 사역에서부터 세계의 종말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이 지상에서도 이뤄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이 말은 그 종말을 준비하라는 말씀이었다.
그 종말을 생각하고 종말론적인 윤리 생활을 하는 신도는 세상에서 마땅히 핍박과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인간 역사의 회귀와 반복을 보면서 불의하게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새 피조물인 하늘나라의 시민들이 받는 박해였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하면서 세상과 타협하고 살아간다면 교회가 인류 역사의 희망을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