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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 칼럼] 돼지와 성자의 갈림길

김성 목사·예수원교회(www.jesusone.kr)

▲예수원교회 김성 목사 ⓒ베리타스 DB
<사람들은 가면을 벗고, 돼지와 성자의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이 그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결론지어 한 말이다. 빅터 프랭클은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의사이자 철학자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험을 바탕으로 로고테라피라는 정신분석학을 창시했다. 로고테라피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어 제3의 정신분석학으로 불린다. 로고테라피는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줌으로써 마주한 시련과 역경을 이길 수 있는 정신적 힘을 길러주는 정신치료기법이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강제수용소에서는 누구나 모든 개인적인 목표를 철저하게 잃어버리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각축을 벌여야 했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매순간 선택해야 했다. 명백하게 잘못된 상황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변화시킬 힘이 자신들에게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잘못된 상황에 제 나름 적응하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이 선택의 기로에서 사람들은 돼지와 성자, 두 부류로 나뉘었다고 빅터 프랭클은 증언한다. 똑같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돼지의 길을 택하였고 또 다른 사람들은 성자의 길을 택하였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죽음의 수용소에서 가장 먼저 인간의 가면을 벗어던진 사람들은 바로 카포(Capo)라 불린 사람들이다.  카포는 한마디로 말하면 나치의 개(走狗)노릇을 맡은 사람들이다. 나치로부터 수감자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은 이들은 수감자, 즉 같은 유태인 가운데서 뽑은 사람들인데 이들의 만행은 수용소의 감시병이나 나치대원보다도 더 악랄하고 가혹했다. 나치는 수감자 중에서 가장 성질이 난폭한 사람을 카포로 선발했다. 그리고 카포에겐 다른 수감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혜택을 주었다. 충분한 음식과 휴식, 술과 담배를 제공했다. 대신 그들에게 나치의 충실한 개가 될 것을 요구했다. 삶과 죽음이 한 순간에 갈라지는 수용소에서 카포로 선발된 사람들은 나치가 던져주는 빵조각과 관리자 완장이 주는 권력의 달콤함을 누리기 위해 주저 없이 나치의 개가 되었다. 이들이 가장 먼저 돼지의 길을 갔다. 

그 다음으로 돼지의 길을 간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감시병들이다. 이들은 수용소에 유태인들이 새로이 수감될 때마다 유태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물건을 빼앗았다. 돈, 시계, 반지, 구두, 머리띠, 허리띠, 속옷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값어치가 나가거나 쓸 만해 보이는 물건은 닥치는 대로 모조리 빼앗아 가로챘다. 그들은 돈이나 귀금속을 감추어놓은 사람은 대들보에 목을 매달겠다고 위협하며 수감자들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발아래에서 예수에게서 벗긴 옷가지와 속옷을 놓고 서로 차지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한 군병들 같이 이들은 수감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모조리 발가벗겨 놓고 채찍질을 해가며 모든 것을 빼앗았다. 이들은 탐욕스런 돼지였다.

수감자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경우 점점 돼지가 되어 갔다.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에서 직접 목격한 일이다. 한 환자가 발진티푸스로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몇 사람이 방금 죽은 시신 곁으로 다가갔다. 그 중 한 사람이 죽은 이의 손에 쥐어져 있던 먹다 남은 감자를 손에서 낚아채 갔다. 그 다음 사람은 시신에서 신발을 벗겨 자기의 신발과 바꾸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죽은 이의 외투를 벗겨 갔다. 사람들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그 모습을 부러운 듯이 지켜보았다. 시체를 막사에서 끌어내 땅에 질질 끌고 가는 동안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스프가 담긴 그릇을 손에 들고 맛있게 먹으며 그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동료 인간의 비극 앞에서도 더 이상 타인의 고통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무감각해진 그들은 인간의 감정과 정신이 죽어버린 채 스프에 코를 박은 돼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처럼 많은 사람이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돼지의 길을 가게 되었을 때조차 인간의 존엄성과 따뜻한 인간미를 잃어버리지 않고 아름다운 인간성을 보여준 숭고한 사람들이 있다. 빅터 프랭클은 이들을 가리켜 성자의 길을 간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한 탈옥미수범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 대신 아사(餓死)형을 받고 자진해서 죽음의 길을 간 아우슈비츠의 막시밀리언 콜베 신부 같은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굶주린 동료수감자에게 자기 몫의 빵을 나누어준 사람도 있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음식을 나누어주기 위해 배식할 때는 일부러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은 요리사도 있고,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동료를 위로하기 위해 우스갯소리로 늘 동료들을 웃게 만든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도덕적, 정신적 자아가 무너지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환경이 인간에서 빼앗아갈 수 없는 마지막 자유는 주어진 환경에 어떤 태도로 대응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자유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성자의 길을 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겪고 있는 시련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시련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시련 속에서도 자신이 살아야 할 의미를 찾고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빅터 프랭클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의 삶에 더 이상의 느낌이 없는 무감각해진 사람, 이루어야 할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삶의 의미도 찾지 못한 사람일수록 빨리 파멸하고 말았다. 

릴케는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라는 시를 썼다. 어느 누구의 삶도 시련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자신의 고통의 짐을 대신 져 줄 사람도 없다. 시련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돼지의 길과 성자의 길을 선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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